164-1
톨먼의 집은 팩스의 슬럼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팩스가 그렇게 화려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공방과 길드가 모여있는 번화가가 있었다.
그런데, 당연히 그런 곳에 있으리란 상식을 깨고, 그는 허름한 슬럼가에 산다는 것이다.
마치, 잘나가다가 엄청난 실패를 겪고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린 뭐 그런 꼰대들처럼 말이다.
그의 집을 방문한 나는 우중충한 분위기에 그런 생각을 확신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나와 동행한 일행은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어?”
“왜 그러세요, 태자님? 문에 무슨 이상이라도?”
“아뇨. 여기 울타리의 문이 너무 빡빡해서···”
“하! 그 톨먼이라는 사람은 설마 자기 집 울타리도 부드럽게 못만드는 건가요?”
“아뇨, 그게 아니에요. 이 문, 펌프랑 연결이 되어 있어요. 공동 우물에서 파이프로 연결되어 문을 열때마다 용수를 끌어와 저장하네요.
이거, 생각보다 신박한데요? 톨먼이라는 사람, 범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그의 말에 쿠타이와 안드로니쿠스, 율리아도 조금 감탄하는 모습이었다.
응? 뭐야? 의외로 숨은 실력자? 그런데 그때였다.
“뉘시오? 남의 집에?”
외출을 나갔다 들어왔는지, 거리에서 잡동사니를 잔뜩 짊어진 무뚝뚝한 표정의 장년의 남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본 나는 그가 톨먼임을 짐작했다.
차 같은 것은 내오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인지 작업선반인지 모를 투박한 목탁에 아무 곳에나 앉으라고 던지듯이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우리는 일단 간단하게 우리의 소개와 찾아온 용건에 대해서 말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의문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졌다. 당신, 정말로 지금 저 위에 자리잡은 난공불락의 성을 세운 올렉을 상대할 사람 맞아요?
그런 의문을 담아 약간 돌려 말한 우리에게, 그는 한참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항상, 남자답게 살라고 말씀하셨지.”
그의 뜬금없는 말에 대답한 것은 바실이었다.
“응? 누가요? 귀공의 은사신가요? 아니면 아버님?”
“둘다. 내 아버지도 그랬고, 내 대부셨던 그분, 바로 올렉의 부친도 그러셨지.”
“올렉 대장의 부친이 당신의 대부셨다고요? 그러면 설마···”
“맞소. 녀석과 나는 일생 동안 친구였지.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이름을 가지셨던 부친들도 친구셨소.
대를 이어서 톨먼과 올렉은 친우였고, 동시에 서로 일생 경쟁해온 라이벌이었지.
그리고,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이상을 현실에 만들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치고 대를 이어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했던 동지였었지.”
그렇게 말한 그는 마치 조금 회한과 후회를 느끼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바실이 물었다.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이상을 구현한다고요? 무슨 말씀이시죠?”
“혹시, 자라(Zara)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그리고, 그 말에 바실의 표정에서, 살짝 탄식하는 듯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율리아와 안드로니쿠스도 마찬가지였고. 응? 뭐지?
자라가 대체 뭔데? 그리고 나는 기억을 더듬어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으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보충하듯 바실이 말했다.
“기억합니다. 단돌로의 농간에 4차 십자군에게 함락당했던 자라. 그러고 보니 그때는 헝가리령이었죠.
거기 출신이신가요? 그리고 그때 일을 겪으신 건가요?”
“나나 녀석이 아니라 우리 부친과 녀석의 부친이 거기 출신이시고, 어린 시절 그 끔찍한 배신을 경험하셨지.
그때도, 우리 부친들은 젊고 유능한 기술자들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자라의 날벼락을 경험하고, 큰 상처를 받으셨다고 하시더군.
고향을 잃고 이곳 팩스로 떠나야 했고, 가족들도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두분을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은, 훈련된 군대의 손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성채였다고 하더군.
그 무너진 성벽으로 난입한 기사들은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난도질했지.
그런 악독한 폭력에 시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 부친들은 힘없이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더군.
그때의 경험이, 우리 부친들의 인생을 결정했지. 그리고 이름을 이어받은 우리들의 인생도 결정하였고.”
그렇게 말한 톨먼은 잠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대지 위에 우뚝 선 올렉의 성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다시 한숨을 쉰 톨먼은 말을 이어갔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 부친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한가지 삶의 목표를 수립하셨지.
그것은, 더 이상 이런 무자비한 폭력이 무고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 결코, 지난번 자라처럼 남자답지 못하게 굴지 않겠다.
기술과 공학을 다루는 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통해 그런 폭력을 저지하는 것에 인생을 바치겠다. 이렇게 결심하셨지.
그리고, 그것에 의기투합한 우리 부친들은 팩스에서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명성과 자금을 얻으시고, 각자 후계자인 자식들도 보셨지.
그렇게 준비가 완료되자, 그분들은 우리 후계자들을 데리고, 인생을 걸고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정에 오르셨소. 그곳은 바로, 성지 예루살렘이었지.
신자들에게는 기적을 바라는 곳이겠지만, 우리 기술자들에게 그곳은 시대의 최첨단 기술들이 집약된 성지였지.
우리는 그곳에서 지향하던 삶의 목적을 달성할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마침내 그 방향성을 발견했소. 하지만, 우리 부자와 올렉 부자의 방향성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지.”
“전혀 다른 곳이라고요? 설마···”
“그렇소. 건축가였던 올렉의 부친이 주목한 것은 무고한 폭력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성이라고 생각하셨지.
그 어떤 적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난공불락의 방패. 그것이 답이라고 생각하셨소.
마침, 그곳에 그런 이상향을 실현한 건축물이 있었지. 그것은 바로 구호기사단의 자랑, 크라크 데 슈발리에였소.”
“아! 그렇군요. 이제야 이해가 갔습니다. 저 팩스성의 형태가 무시무시하지만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바로 그것이었군요.
그거라면 납득할만 하군요.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모티브로 구현한 성이라면, 저 무시무시한 방어력은 당연한 것이었어.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바실은 그제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듯이 탄성을 외쳤다. 그리고, 그런 바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톨먼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태엽과 도르레 장인이었던 우리 부친은 반대로 생각하였지. 원치 않는 시민들에게 농성을 요구하는 성벽이 바로 문제라고 생각하셨지.
그래서, 그 어떤 성벽도 무가치하게 만드는 공성병기가 나온다면, 피를 빨아먹는 공성은 사라지고, 정치적 합의에 의한 협상이 우선시 되리라 여기셨지.
그 어떤 적의 방어도 뚫어낼 수 있는 필살의 창, 그것이 답이라고 생각하셨소.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도 거기 있었지. 아이유브 왕조가 예루살렘 공성 시 사용했던, 동방의 기술을 도입해 만든 공성포. 그걸 주목하셨소.”
나는 예상치 못한 역사 속에 화려한 무대 위에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실마리를 찾았던 남자들의 이야기에 경탄하고 말았다.
와, 역시 남자들이란··· 뭔가 자기 인생에 큰 보탬 안되는 일에는 되게 열심이구나.
그냥 조용히 팩스에 살았으면, 존경받는 마스터로 잘먹고 잘살았을텐데, 왜 굳이 거기까지 가서 그런 꿈을 이루겠다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서로 지향점이 달랐다고 해도, 두 집안의 교분은 이어졌지.
서로가 서로의 기술을 존중하며, 어떤 식으로든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세월이 흘러 고국으로 돌아왔소.
부친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이어가 달라고 당부하고 숨을 거두셨고, 우리는 그 뜻을 받들어 일생 매진했지.
그래서, 어느 정도 우리의 연구와 기술이 목표에 다다랐을 무렵에, 우리는 그것을 세상에 선보일 생각을 했지.
마침, 그 당시에 벌어진 아르파드 내전은 우리에게 기회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더군. 의외로 무리가 굳은 영주와 방백들은 우리가 제안하는 기술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자는 것에 그들은 큰 관심이 없었어. 그래서, 인력과 예산이 많이 드는 우리의 기술에 대해서 그들은 거들떠 보지 않았지.
그리고, 어영부영 내전이 끝난 다음에 이곳에 새로운 영주가 왔었지. 그리고 그때부터 녀석은 엇나가기 시작했어.”
“네? 엇나갔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새로운 영주는 머저리였어. 하지만 야심은 과했지. 놈은 언젠가 자신이 차지할 더 큰 입지를 위해 기발한 방법을 찾아다녔지.
그러다, 녀석은 전쟁 때 우리가 제안했던 기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그것을 자기 앞에 설명해보라고 했지.
우리는 그 기술을 영주 앞에서 설명하면서도 마지못한 기분이 들었지. 왜냐하면 녀석은 백성들의 고통은 간곳없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룰 무기를 원했거든.
그래서, 나는 그가 다른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기술에 흥미를 잃으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어. 내 기술은 예상대로 무시당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올렉의 기술은 영주의 눈에 쏙 들어버린 거야.
뭐, 영주의 속셈은 이랬나봐. 병사들이나 백성들이 죽건말건, 자신은 안전하게 몸을 지킬 안전한 성이 있으면 좋겠다고.
근데, 그거 군사학적으로는 되게 악수라며? 그냥 죽지 않을 뿐 고립되서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영주는 그것을 되게 마음에 들어했고, 그것을 제안한 올렉에게 권한과 예산을 줄 테니 그것을 만들라고 명했지.
나는, 그 속보이는 짓에 무시하라고 올렉에게 말했지. 근데, 녀석의 반응은 달랐어.
녀석은,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준 영주에게 감사를 느꼈고, 그리고 그것이 얕은 수임을 알면서도, 세상에 구현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했지.
나는 경악하고 놈을 말렸어. 하지만, 녀석은 내 말을 듣지 않았지.
그래서, 녀석은 일생동안 형제와 다름없던 나와의 우정을 저버리고, 영주의 밑으로 들어가 수비대장이 되고 영주의 거성을 쌓기 시작했지.
그게 바로, 저기 세워진 저 광기의 산물이다. 녀석이 만든 물건 답게, 그 누구도 쉽게 파해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방패.
그것을 놈이 구현한 것이지. 일생의 친구와 자신의 신념마저 저버리고선 만든 아집의 거성인 것이다.”
그렇게 말한 톨먼은 창밖으로 보이는 성을 향해 침을 뱉었다. 하지만, 묘하게 그 성을 보는 눈은 슬퍼보였다.
뭔가, 자신만의 고집을 가지고 일생을 걸어온 사나이에게, 유일하게 이해해주기를 바랬던 친구의 배신과 대립은 그렇게 간단한 의미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가닥 활로를 찾은 것 같은 기분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톨먼의 말을 통해서, 올렉이 쌓은 성이 얼마나 난공불락이고 저게 왜 세워졌는지는 대략적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말에 신빙성을 기반으로, 그런 올렉의 아집이 만든 난공불락의 방패에 대응하는 필살의 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확인한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말이다. 그래, 역시 하늘 아래에는 절대라는 건 없기 마련이지.
나는 어쩌면 유일하게 저 난공불락의 거성에 카운터가 될 방법을 가진 그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협조를 구했다. 그리고···
“난 은퇴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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