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2
“이번 여정에 대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죽이자는 이야기인가요? 그런 이야기라면 그냥 숙면을 하셔서 피로를 푸시는 쪽을 권해드리고 싶은데요.”
“아뇨,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그 비밀의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자님에 대한 것입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요? 하하하··· 평소라면 공녀님에 저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겠지만, 지금은 좀 무섭네요. 대체 저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시는 걸까요?”
나는 너스레를 떠는 바실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그 비밀의 후계자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가장 분노하여야 하는 사람은 태자님이십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봐도 그 존재는 결코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말살하는 것이 상식이고요. 하지만, 지금 태자께서 보여주시는 그 존재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모호합니다. 아니, 모호하다는 말은 그냥 에둘러 하는 이야기겠네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 태자께서 그 비밀의 후계자를 보호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추측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태자 마마. 그는 당신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아니, 필연적으로 경쟁자가 될 존재입니다. 당신이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가 당신을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 피로 엮인 존재입니다.”
“네, 그 말이 맞네요. 피로 엮인 존재. 가족이라면 당연한 일이죠. 그리고 가족이라면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는 것도 당연하고요.”
“저는··· 그 이상론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태자님. 당신의 그런 상냥하고 고결한 부분이 차기 제국의 후계자로서 칭송받을 덕목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상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특히나 황위에 대해서는 더 그렇구요. 당신은 이미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정된 후계자, 아니 사실상 황제이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정통성에 흠을 낼 수 있는 경쟁자를 보호하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아직 안늦었습니다. 제고하여 주십시오. 손을 쓰는 것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최소한 그 일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덮어두고 아무도 모르게 하십시오. 직접 찾아내려 하지 마시고요.”
그런 나의 말에 바실은 그저 희미하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시선을 먼 하늘을 향하며 대답했다.
“예전에 저와 같은 이름의 황제가 있었죠. 어린 나이에 정적들의 위협 속에서 황위에 올라, 위기의 제국을 다시 한번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위대한 황제였죠.”
“바실레이오스 2세를 말씀하시는군요. 네, 따로 설명하지 않으셔도 불가르톡스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네, 그는 일생을 제국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와 외교의 성공, 내부 기강을 다잡아 내적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까지··· 그 무엇도 빠짐없이 이뤄낸 독보적인 존재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국 시민들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후세에 그의 사후 제국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평가받았죠. 그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는··· 후계자가 없었어요. 오로지 제국의 중흥만을 위해 살아온 그는 일생 독신이었고, 그래서 그의 의지를 이어갈 후계자가 없었죠.
제위는 그의 동생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검증된 후계자가 아니었고, 그저 대안이 없기에 선택된 사람이었죠. 그래서,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그 이후 복잡해진 황위 계보 덕분에 몇 명의 여제가 들어서고 그와 관련된 황위를 둘러싼 내전으로 혼란을 거듭하였죠. 이 이야기의 교훈은 아무리 자신이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제국을 위해 헌신한다고 하여도, 그 의지를 이어갈 후계자가 없다면 그것은 그저 일시적인 허상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평소에 내가 알고 있던 바실답지 않은 진지한 숙고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지금 제국에는 후계자의 후보와 대안이 너무 열악합니다. 물론, 후계자는 존재하죠. 바로 저요. 그리고, 나름 그럭저럭 그 자리에 앉는 것에 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아마 큰 문제가 없다면 제가 황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제국의 후계자가 오로지 저 하나 뿐이라는 사실이죠. 세상 일이 다 무난하게 흘러간다면 좋겠지만, 항상 세상은 예기치 못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죠.
그래서, 제국은 물론이고, 아버지에게는 그런 상황을 대비한 대체 가능한 후계자의 여분이 필요합니다. 설령, 그것이 저에게 위협이 된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미래의 안정을 위해서는 그런 대안을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은 저의 눈치를 보느라 감히 진행할 수 없는 일이니··· 바로 제가 직접 마련하는 수 밖에 없어요. 제국의 후계자이자, 황가의 장자로서 그러한 미래를 대비한 대안을 찾는 것은 제가 해야 할 책무입니다.”
나는 바실의 말에 경악해서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리쳤다.
“지나친 사고 확대입니다. 태자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다니요? 이 세상에 감히 누가 태자님을 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설령, 그런 흉측한 생각을 하는 자가 있다면, 저를 비롯한 제국의 모든 신료들이 그것을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제일 먼저 태자님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우려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날 일도 없는 일을 대비하시는 건 미래에 대한 과잉 우려십니다.”
“후흣. 공녀님이 저를 지켜준다고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든든하기 그지 없군요. 저에게 보여주시는 그런 호의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녀님 뿐만 아니라 제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다 저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요. 하지만, 공녀님··· 그래도 예측하지 못할 일은 항상 갑작스럽게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건, 저처럼 전장에서 군을 지휘하는 자에게는 더 큰 확률로 닥쳐오기 마련이죠.
역사적으로도 적지 않은 희대의 명장들이 전장에서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생을 마감하는 일은 빈번하게 발생하였습니다. 저라고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가 있죠? 거기다, 그런 사고가 없더라도··· 전장에서는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할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비일비재합니다. 저 하나의 희생으로 위대한 승리와 수많은 장병의 생존을 보장하는 선택지의 앞에서··· 저는 저의 보신을 답으로 내놓을 만큼 비열한 성격은 못됩니다.
아마도, 저는 거기서 저 자신을 내던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충분히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재가 없어서 비겁하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그러한 상황을 대비해두지 않으면 안되겠죠.”
나는 가슴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무슨 눈이 부실 정도의 고결함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내가 들어보고 직접 본 그 누구와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선택받은 후계자였다. 우리 헝가리나 신성동맹에 이 정도의 후계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평소에는 우리 집 막둥이 취급하던 바실의 사려깊은 생각에 그를 다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졌고. 바실은 정말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자기 자신을 내던질 생각을 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것은 최고의 후계자인 동시에 최악의 후계자다.
후계자란 말 그대로 후계를 이어나가는 존재인데··· 저렇게 자기 자신을 쉽게 여겨서는 누가 그에게 후계와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가 말한대로 대체재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바실의 측근으로서 깊은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실의 눈에는 미약한 동의로 보였는지, 나를 보며 바실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제가 정치에 무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을 혼란으로 만들 일을 벌일 생각은 없으니깐요. 제가 찾은 사람이 자격이 없거나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는 저의 대안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저와 마찬가지로 제국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포함된 자격일 겁니다. 그러니, 자격이 되는 자라면 그런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크게 우려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 항상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번만은 저의 억지에 조금은 어울려 주시길 바래요. 그리고 좋게 생각하세요.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냥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형제 찾아 3만리일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제국이나 황위 같은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보면,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가족을 찾는다는 나름 훈훈한 이야기일지도요. 제가 외동이라서 그런지, 뭔가 그런 것이 나쁘지 않게 들리는 모양입니다.”
나도 외동이지만, 내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를 숨겨진 형제를 찾아 나서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것도, 어쩌면 자신의 부친이 젊은 시절 저지른 과오일지도 모르는 존재에 그런 감정을? 하지만, 이렇게 말하니 더 설득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바실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태자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이 도와주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죠. 그리고, 좀 속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행이 즐거워 질 것 같지 않으세요? 대외에 기밀로 하고 저희들의 정체도 숨기고 하는 여행이다 보니, 뭔가 평소에 따라다니는 태자라는 신분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만끽하는 기분이에요. 거기에 공녀님까지 동행해주시니 더 말할 나위가 없구요. 여기서는 제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보니 이보다 자유로울수가 없네요. 그래서, 결과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는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야, 너는 콘스탄틴노플에서 총사령관 복장하고 호위병들하고 다녀도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보잖아. 황제로서의 존재감은 한없이 부재한 네가 그렇게 말하면 설득력이 없지! 하지만,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즐거워 보이는 바실에게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그렇게 그날 밤의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사건이 시작된 두라초에 팔라이올루구스의 옛 저택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쿠타이가 말했다.
“완전히 폐허네요.”
그 말대로였다. 과거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의 근거지가 되었다던 두라초의 성은 가문이 용병대의 약탈에 몰락하던 날 잔혹하게 유린당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제국이 안정을 되찾고, 과거 내전을 벌였던 가문들도 대다수 용서를 받아서,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의 분가들이 제국 곳곳에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도 그들의 본가의 수습에는 손을 내밀지 않고 외면한 모양이다. 아니, 안한 것이 아니고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유력한 정통성을 가진 그들의 흔적을 추모하는 것만으로도 오해를 사기 충분하니깐.
그래서 방치된 을씨년스러운 흔적은, 우리로 하여금 해야 할 일이 간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와 동시에 어쩌면 그 고민의 대상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들게 해 주었다. 그래서 바실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그런 바실에게 안드로니쿠스가 말했다.
“일지를 발견한 곳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의 여관이었습니다. 지금은 이 모습이지만, 과거 가문이 이곳에서 기거하던 시기에는 주변에 몇몇 마을이 성에 물자를 공급하고, 부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성과 사람은 이렇게 사라졌고, 주변의 마을들만이 여기 그들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죠. 자,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곳에는 그저 폐허와 망령 밖에 없습니다. 찾으시는 존재의 행방을 알려주는 단서는 너무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안드로니쿠스의 부정적인 말에 바실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왠지 시선을 물끄러미 나를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나는 부담감을 느꼈다. 어휴, 그날 밤에 얘기를 하지 말걸 그랬어. 그랬으면 지금 저 시선을 받아도 그냥 근위대장과 마찬가지로 외면해버리면 그만인데. 하지만, 바실은 뭔가 심정적으로 공감하지 않았냐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고, 나는 그런 바실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환장하게도 왠지 이런 상황에서 내 머리 속에서 희미한 해법 같은 것이 떠올라 버렸다. 망할··· 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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