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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 그리고 내가 고개를 돌려서 렌필드 시종장에게 눈빛으로 질문. 우리가 지금 대체 뭘 보고 있는건가요? 그러거나 말거나, 옆에 있던 쿠타이는 흥분한 바실을 거들듯이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게요. 거기다 이번 편에서 꼭 등장할거라고 했던, 노스페라투 합체기 3레벨도 안나왔잖아요. 형이랑 내기했단 말이에요. 노스페라투 합체기 3레벨이면, 어둠 속성에 빛 속성 더블이니깐, 푸른 늑대의 후예, 연속기를 상쇄시킬거라고. 작품 내에 스탯 창을 보면 이미 경험치는 충분한데, 왜 안나오는 건데요!!! 꼭 나와야 한다고요. 4권에서는 다시 잠입 액션이니깐 다시 나오려면 5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나는 다시 한번 눈빛으로 시종장님에게 질문. 이거 뭔 소린지 아슈? 아뇨. 결론은 내 직업병 뒷목결림을 이번에는 사이좋게 시종장과 같이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이 글만으로도 뭔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데··· 나를 더 환장하게 만드는 것은, 그 말같지도 않은 보고서가 의외로··· 본국에서는 되게 재밌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뭐야?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 말같지도 않은 끄적거림에 가까운 글에 대해서 격분해서 내던져야 정상이 아니더냐? 그러나, 비단 바실과 쿠타이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군부 관계자들의 반응이···
“키야! 통쾌하다. 은으로 코팅된 검으로 공격한 이단 교단 사제들에게, 광소하면서 이제 나는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왔노라!!! 하면서 반격기 넣는 것 봤어?”
“대공이 멋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난 역시 뱀파이어 세자매가 끝내주더라. 섹시하면서도 공중을 날아다니며 거친 액션도 소화하고, 묘하게 백합 느낌도 나는 것이 역시 최고야. 역시 마리쉬카 X 베로나 아니냐?”
“응? 무슨 소리야? 베로나 X 마리쉬카가 정석이지. 콘스탄틴노플 코믹, 콘코에도 안나오고 온리전에도 없는 커플링을 외치다니. 전쟁이다, 이 사도야!!!”
오, 주여. 인간을 벌하시려거든 그냥 애굽에서 하신 것과 같이 장자를 멸하시지, 왜 사내 자식들에게 저런 조기 사망할 것 같은 취향을 내려서 한심하게 죽게 하나이까?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주님의 답이 들리진 않았다. 그래서 안도했다. 행여나 성스러운 음성으로 ‘크큭, 같은 클리셰 반복은 장기연재에 독이니깐.’ 이란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급격하게 신앙심을 잃을지도 모르니깐. 아아아··· 대체 남자들은 왜 저런 걸까? 뭔가, 보고서로서의 최소 요건도 갖추지 못한 쓸데없는 수식어와 과장된 말들로 가득찬 수준 이하의 소설에 열광하는 모습이라니. 이 사실은 단순하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내 의지는 없다지만, 일단은 나는 제국에 파견된 가짜 공녀이자 공작원이다. 그래서, 제국에서 벌어지는 주요 정세에 대한 본국 보고도 거부할 수 없는 의무 중에 하나였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보고에 접근할 권한도 있고, 제국의 문헌 관리 체계가 워낙에 우수해서 자료의 입수도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자식의 경우만은 예외인 것이다. 몰다우 전선의 경과는 헝가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중대 사안이다. 그래서, 본국에서 어느 정도 흘려야 하는 중요 보고인데··· 이 망할 놈의 원본이 이 지경이니, 내가 이걸 어찌 보고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기 와서 본의 아니게 늘어난 창작하는 실력으로 이 말도 안되는 보고서를 어찌저찌 정상적인 걸로 수정해보긴 했다. 근데, 그렇게 되면 문제가, 이런 경우 사실 검증을 위해 요구되는 원본 보고서와의 대조가 사실상 물건너 가버리는 것이다. 아니, 이걸 창피해서 어떻게 원본으로 본국에 보고를 해. 그래서, 결국 한없이 신빙성이 낮은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본국에서는 뭔가 원본과 대조할 수 없는 보고서에 대해서 대단한 것이 있지 않나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까지 부딪치자 나의 절망감을 극에 달했다.
그래서, 나는 자기가 키운 대공이 저 지경이 된 것에 무한히 창피함을 느끼는 렌필드 시종장과 코드를 같이 하며, 이 절망적인 상황에 뭔가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중에서 나에게 가장 만만한 바실을 보며 작금의 현실에 대한 타박을 했다.
“태자님. 정신 좀 차리세요.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공식 기록으로 남기기도 민망한 전황보고서를 보시고 되려 재밌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세요?”
“그치만, 다른 보고서에 비하면 왈라키아 테마의 보고서가 너무 재밌는 걸요. 공녀님도 한번 보세요. 아, 공녀님은 뱀파이어 세자매가 주인공인 외전이 더 나으시려나? 역시 여성향으로 입문하시는 것이···”
“그만 좀 하시라고요!!! 정신 좀 차리세요. 이 무슨 조잡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문체란 말입니까? 여기는 제국이지 않습니까? 문체가 담백한 것만으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예들이 지금 이게 무슨 작태이십니까? 선조들이 통곡하십니다.”
그러자, 나의 말을 받은 것은 바실이 아닌 쿠타이였다.
“에에엑··· 그 갈리아 전기에 나오는 건조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그 문체요? 에이··· 그렇게 재미없게 쓰면, 요새 그걸 누가 읽어? 누나, 요새는 그렇게 쓰면 안팔려. 아마 서점에 입고도 안될걸?”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보고서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문체라는 것이 있는데··· 응? 잠깐만. 너 지금 뭐랬냐? 팔려? 이게 서점에서 팔린다고? 최전방 전투 전황보고서가 지금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고?”
나의 말에 쿠타이는 말없이 책한권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는 ‘몰다우는 쇠퇴하였습니다.’ 2권이고 당당하게 제일 뒷장에 12쇄라는 기록까지 남아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벌린 나를 보며 쿠타이가 말했다.
“누나 몰랐던 거야? 지금 황도에서는 나태 경이 데리고 온 마인츠 출신 기술자가 도입한 획기적인 기술 덕분에 출판 사업이 대호황이야. 그래서, 인기있는 책들은 이렇게 여러 번 증쇄해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라고. 그리고 당연히 이것도 장안의 화제니깐, 거기서 팔리는 것도 당연하지. 누나가 추천한 사람이 추진한 사업이잖아?”
“이··· 이··· 지금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이 글이 팔린다고? 그것도 계속 증쇄하면서? 황도 사람들 죄다 수준이 어느 정도인거냐?!!! 그리고, 이 자식아!!! 지금 문제가 그게 아니잖아. 이거 극비로 취급해야 하는 군사보고서라고!!! 근데, 그걸 재밌다고 시중에 팔아버리면 어떻게 해!!! 이러면 제국의 군사 기밀이 죄다 대외로 유출되어버리잖아!!! 유출이 되도 큰일이 날 판에 지금 그걸 대놓고 베스트셀러로 팔아 먹고 있다니? 정신들이 있는 거냐?”
나의 경악에 쿠타이는 움찔했고, 대신에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 것은 바실이었다.
“뭐가··· 문제가 있나요? 뭐 대외비라고 해봤자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승전 기록이고··· 그나마도 내용을 보시면, 뭔가 분석하기도 좀 애매하게 써져서 큰 문제가 될까 싶은데요?”
“태자 마마!!! 제발 좀 통촉하세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시겠어요? 아무리 본문이 장황하고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도, 기본적인 정보들이 현장 최고 사령관급에서만 알 수 있는 수준에서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당장 병력수만 해도 적들에게 알려지면 치명적인 정보잖습니까!!!”
그러나··· 그런 나의 짜증 섞인 지적에 바실은 평온한 목소리로 무서운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래요? 우리 병력 몇 명인지 알면 자신있게 이길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나 보죠? 그게, 누구죠? 알려주세요. 1명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정말로 할 수 있나, 제가 직접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지네요.
갑자기 분위기 공포물. 야, 네가 그렇게 정색하고 말하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 다른 나라에서는 군사비밀로 취급되는 기록이, 시중 서점에 깔려 있어도 이길 자신 있으면 읽어보고 덤비라는 이 실력 차이 무엇? 왠지 인생이 되게 허망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나는 이 철딱서니 없으면서, 미치도록 강한 애한테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 보고서 황후 마마에게 그대로 상신해도 무방하시겠죠?”
“어우우우우!!! 공녀님, 엄마한테 이르는 건 반칙이잖아요!!!”
“아앗! 너무해! 누나, 소년들의 꿈과 로망이 담긴 것을···”
이 꼴통 형제들은 무슨 침대 밑에 몰래 숨겨둔 책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먹히기 시작한 일을 물러설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두 사람은 물론 당황하는 군부의 요인들에게 단호하게 일갈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제국의 모든 공문서에 대해서, 이와 같이 황후 마마에게 보여드리면 경을 칠 문체를 사용하실 경우, 그 원본을 여과없이 그대로 황후 마마에게 보고드리고 그에 대한 의견을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히이이이익!!!”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당혹스럽게 변했다. 어이구, 이 인간들아··· 당연한 걸 꼭 이렇게 엄마한테 일러서 잔소리해야 한다고 해야 말 듣는 아들놈들같이 다뤄야 하는 거냐? 그리고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의 그들을 보면서 나는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모든 보고서의 문체의 기본은, 이 제국의 가장 유서깊고 인정받는 문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문체로 최대한 담백하고 간결하게 적을 것을 통고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제국의 개조께서 굳건하게 세우진 나랏말씀으로 통일하십시오. 모든 문체는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과거의 것으로 회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문체를 쓰는 자는 황후 마마와의 불편한 접견이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렌필드 경, 지금 제가 선언한 내용을 왈라키아 대공에게도 똑똑히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공녀의 문체반정이라는 사건으로 간략하게 언급되는 나의 선언에 대해 군부의 요인들은 많이 당혹스러워 했다. 하지만, 뭔가 항변하려는 바실에게 내가 눈빛으로 째릿하고, 그러자 바실이 움찔해버리자 더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말에 반색한 것은 렌필드 경이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 말을 그대로 대공님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세!!! 더 이상 저런 유치찬란한 글을 낭독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한 사람의 안도와 한 사람의 짜증과 여러 사람의 실망을 안겨준 몰다우 전선 보고서에 대한 문체 반정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렌필드 경은 흡족한 표정으로 왈라키아로 돌아갔고, 우리 집 골통들은 인기 작품을 연중시켰다는 사실에 나를 향해 말없는 원망의 눈빛을 보냈고, 나는 그것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얼마 후 베니스에서 생각치도 못한 물건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4차 십자군 당시, 베니스에게 약탈당한 문화재들이 콘스탄틴노플로 돌아오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제국이 오랜 시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단돌로 놈에게 빼앗긴 값을 따질 수 없는 인류문화의 보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반환되는 화물보다 먼저 콘스탄틴노플에 도착하여, 황실과 군부에 사정 보고를 하고 잠시 나를 만난 베니스 스트라테고스, 크로노스 카시우스 경은 격앙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에게 들은 자초지종은 이랬다. 지난번 베니스와의 전쟁을 마치고 그곳을 제국령으로 편입한 후 오랜 시간 과거 청산 작업이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진행된 것은 당연히 베니스의 군사, 경제, 정보와 관련된 사안들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수습이 끝나가자 여유가 생긴 현지 당국에서는 후순위로 밀려있던 업무도 착수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지난 전쟁에서 베니스가 털어간 제국의 보물들을 반환하는 일이었다.
4차 십자군 당시, 콘스탄틴노플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베니스군은 상당한 약탈을 성공하고 돌아갔는데, 그렇게 약탈당한 물품들은 워낙에 많고, 연이어 벌어진 제국의 내전으로 인한 혼란으로 그 규모조차 파악이 안될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약탈당한 제국의 문화재들을 원래 위치에 돌려놓는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당연히 세월이 워낙에 많이 흘러서 값비싼 보물들은 대부분 여기저기 흩어져서 실체를 파악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런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진행을 하였는데··· 우연히, 베니스의 서류 보관소에서 생각치도 못한 물품들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제국에서 과거 오랫동안 고문서 창고에서 봉인하고 보관하고 있었던 문서들이라고요?”
“맞습니다. 자그마치 수천년 전 이집트의 고대 파피루스에서, 동방의 죽간, 페르가몬의 양피지, 켈트의 룬스톤을 포함하는 방대한 분량의 고문서들이 큰 손실이 없는 제국에서 보관하고 있던 그 상태 그대로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제국을 약탈하던 베니스인들은 제국에서 엄중히 보관하고 있던 그 문서들이 뭔가 대단한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가져간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학술적으로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지만 환금성은 없는 서류라는 것을 알고 이내 실망하고 그것을 방치한 모양입니다.
덕분에 그 서류들은 제국의 오랜 내전에도 손상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저희 베니스 당국에서는 그러한 봉인된 서류 박스 수백개를 발견하였고, 이미 그것이 제국에서 보관하다 유실된 것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황급히 알리러 오게 된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공녀님. 이는 실로 제국에게 있어서 생각치도 못한 행운입니다.”
“아니, 뭐··· 오랜 인류의 유산이 다행스럽게 소실되지 않은 건 좋은 소식이지만··· 그게 제국에 뭐 그렇게까지 좋은 소식인가요? 그래 봐야, 오래되고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졌던 서류들이 아닌가요? 그걸 가지고 제국 전체가 들썩이는 건 좀···”
“그렇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공녀님. 이번 발견이 제국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그 서류들이 우리 제국이 정통 로마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언급한 고대의 기록도 기록이지만, 그 서류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과거 제정 초기 시대의 위대한 로마의 선조들이 남기신 당대의 기록들이었습니다. 아직 인덱스 작업이 끝나 더 연구와 조사를 해봐야 하기는 하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사본으로만 전해지고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시절의 본인들이 직접 집필한 원본을 우리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황청이 아닌 바로 우리가 말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이번 사안이 생각보다 큰 일임을 깨닭았다. 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로마는 손에 넣지 못한 제국은 타국에 그 정통성에 대한 시비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 그들이 고대 로마의 선조들이 남긴 유산의 원본을 손에 넣는다면··· 적어도 제국이 그들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사라진 제국이지만, 로마 제국의 이름을 이어간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생각하자, 그의 격앙된 모습이 이해가 되고, 미묘한 우려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의문이 한가지 들었다.
“그게 그런 의미가 있다니··· 카르브나 황조는 그것을 통해 고대 로마의 정통성을 추증하고 있음을 만방에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말씀하신대로 이는 제국과 황실에 크나큰 행운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한가지 드네요. 거기 그런 중대한 의미가 담긴 서류가 있었다면··· 왜 제국은 그것을 베니스에게 약탈당할 때 까지 그것을 공표하지 않고 봉인하고 비밀로 하다가 빼앗긴 거죠? 그런 서류라면 오히려 봉인하기보다는 여기저기 공표해서 제국의 정통성을 만방에 알렸어야 하지 싶은데요?”
그런 나의 질문에 크로노스 경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뭐··· 안전한 보존 때문이었겠죠. 말씀드린대로 수천년 전의 파피루스 기록까지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걸 대외에 노출시키고 다녔다면 그리 오래지 않아 원본이 훼손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그 서류의 방대함 덕분일 겁니다. 아마 도착하면 놀라실 겁니다. 여러 척의 배에 나눠 실어야 할 정도로 그 봉인된 문서들의 양은 방대합니다. 아마도, 콘스탄틴노플의 야심있는 사학도들이 인덱스 작업과 제본 작업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쉬지 못할 정도로 방대한 양을 자랑합니다. 그 정도의 양이니 공개해서 훼손될 소지를 남기기 보다는, 연구와 조사가 가능할 때까지 봉인하고 숨겨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흐음··· 하긴, 그럴수 있겠네요. 종종 도서관에 놓인 수백권의 책을 보면 저도 그런 생각이 들곤 하니깐요.”
“맞습니다. 이미, 이 소식을 들은 황도의 문헌학자, 역사학자, 번역가들은 띌듯이 기뻐하며 그 자료의 황도 도착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제국이 역사 속에 숨겨진 그 동안 알지 못했던 비밀들을 알게 되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제국의 영광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우하하하!!! 제국 만세!!!”
카시우스 경은 정말로 사심없이 흐믓한 표정으로 제국의 영광을 외쳤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딱히 뭔가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얼마 후 베니스에서 출발한 고문서 화물은 무사히 콘스탄틴노플에 도착했고, 수많은 사제들과 학자들이 나름 장엄한 의식을 치르며 그 화물을 양도받는 것은 잠시나마 황도의 화제가 되었다. 어휴, 저 문서 봉인함에 묻은 핏자국들은 아마도 쥬노 짓이겠지? 나는 천년의 기록을 담은 고문서의 귀환에 기뻐하는 학자들과 달리, 저 문서가 입수되는 과정에서 있었을 어느 광년이의 인형놀이가 얼마나 민폐였을지를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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