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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시 동안 정적 속에 우리는 성당에서 널부러졌다. 아니, 널부러진 건 나 뿐일까?
율리아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이제는 보이지 않는 마르탱이 떠난 자리를 보고, 잠시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였다.
그걸 보며 나는 다시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분명히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계약이 완료되면 당장 저 년 머리 쥐어 뜯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지금 분위기를 보면 그러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기도를 마치고 털고 일어나자, 나는 그 모습을 보고선 말했다.
“뭔가 아쉬움이 남은 표정이네. 그럼 지금도 안 늦었으니, 달려가서 붙들지 그래?”
“아쉬움 같은 건 없어. 기도한 것은 진심으로 마르탱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했을 뿐이야. 뭐, 내 기도는 잘 안들어 처먹는 주님이시니 기대는 안되지만.
그리고 뭔가 내가 아쉬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견뎌내야 할 삶의 무게 때문일까?”
“삶의 무게? 그건 또 뭔 소리냐?”
“다들, 자기 인생이 안힘든 사람은 없지. 그럼에도 견뎌내는 것은 그걸 같이 짊어지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지. 이런 반쪽짜리 몸의 진실을 알던, 혹은 모르던, 그런 나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같이 연민해줄 사람이 더 있을까?
혐오가 더 당연할거야. 그래서 아마도, 내가 이별한 마르탱이 내 생에 그런 순수한 사랑을 했던 마지막 사람이라 생각해.
마음 속으로는 마르탱의 앞날을 축복하고 행복을 빌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삶에 대해서 조금 안타까웠는지도 몰라.
뭔가, 내게 남은 흔치 않은 순수의 시절과 작별한 기분? 그리고, 앞으로 그 누구도 나 자신을 온전한 모습으로 사랑해줄 사람은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런 것들이 좀 아쉽다면 아쉽겠지.”
“흐음. 결론은 잡아먹을 만만한 남자가 없다는 말이네.”
“말을 해도 하여간. 뭐, 오늘은 봐준다. 어찌되었건 에이전트 카밀의 하루를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일테니깐.
진심으로 고맙다. 나중에 빚으로 달아두지.”
평소답지 않은 녀석의 진솔하고, 풋풋한 느낌이 색달라서 였을까? 나는 말로는 시비를 털었지만 왠지 모르게 녀석의 반응이 싫진 않았다.
그리고, 조금은 우울한 모습으로 자신의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안스럽기도 하고.
그래서였을까? 나는 고쳐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잘 안고쳐지는 평소답지 않게 객기를 부리는 짓을 또 해버렸다.
“아직 안끝났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안끝났다니?”
“에이전트 카밀의 계약은 정확하게 하루잖아? 아직 몇시간 남았어.”
“뭐?”
“그리고, 저 순수한 총각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네 실체를 알면서도 딱히 혐오감을 가지지 않는 멋진 남자가 없는 건 아니잖아?
뭐, 대신 애증이 가득하겠지만 그건 뭐 잠시 미뤄두고.”
그렇게 말하고 나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좀 어이없어 하며 어리둥절하는 율리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자아. 오늘만 특별 서비스입니다. 나의 사랑스러운 정혼녀 레이디 쥴리아. 이 몸 카밀이 그대에게 오늘 밤 데이트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하! 뭐라고? 이게, 무슨, 미친. 킥킥킥. 젠장할. 넌 정말 지긋지긋하고 죽여버리고 싶은 년이야.”
“승낙이라는 말이군요. 감사합니다, 마이 레이디. 자아, 가실까요?”
“네, 그러죠. 나의 정혼자 카밀. 오늘 저녁 즐거운 데이트를 즐겨볼까요? 아, 옥상 위랑 담벼락은 금지.”
그리고, 우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없겠지만, 정말로 우리는 에이전트 카밀과 레이지 쥴리아로 부다페스트의 심야 데이트를 즐겼다.
뭐, 이제는 더 미쳐봐야 큰 의미도 없으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왠지 나도 이게 익숙해지고 즐거워지는 것 같아서 무섭지만,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미친 세상인데.
며칠 후, 나는 부다페스트 왕궁의 소환을 받아, 서둘러 접견실로 달려왔다.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하며, 시녀장님에게 물었는데 대답 대신에 의외의 말이 나왔다.
“네? 오늘도 공주님이 직접 저를 보시겠다고 하셨다고요?”
“그, 그래. 근데, 너 무슨 일 저질렀냐? 공주님 심기가 심상치가 않으시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아! 도착하였느냐?”
갑작스럽게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온 마고 공주의 등장에 우리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예를 차렸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마고 공주의 안색을 살폈다. 엑! 정말로 뭔가 심상치 않다. 잔뜩 흥분한 모습. 그리고 뭔가 다급한 얼굴.
뭐지? 나 사고친 거··· 너무 많을 것 같은데? 아, 씨. 그 중에 뭐지? 그런데 그때였다.
“헬레나 시녀장은 나가도록.”
“네? 공주님. 하오나···”
“당장 나가!!!”
“히이이익!!! 알겠습니다.”
시녀장님은 화들짝 놀라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방에는 나와 마고 공주만 남았다.
아오, 대체 왜 이래? 무슨 일인데? 그런데 그때였다. 마고 공주가 말했다.
“얼마 전에, 수도에서 벌어진 난동 사건을 들었느냐?”
“나, 난동 사건이요?”
순간, 나는 흠칫했다. 왕궁에서 말하는 난동 사건이라면 딱 하나 밖에 없다. 그건 바로 에이전트 카밀 추격전.
서··· 설마? 눈치챈 건가? 나는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맙소사.
역시 너무 얼굴 가까이 댔어. 그냥 뒤에서 목을 조르면 그만이지, 왜 굳이 아둥바둥 공주님 안기까지 하고.
식은땀이 절로 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들은 모양이구나. 그래, 얼마 전 에이전트 카밀이라는 자가, 온 부다페스트를 쑥밭으로 만들고 갔지.
그리고, 그는··· 나에게도 나타나서, 내 인생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만들고 사라졌다.”
몸이 떨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알아챘다. 틀림없이 알아챘다. 그리고 나는 죽었다.
저 마고 공주의 성깔이라면, 그런 지독한 모욕을 참을리가 없어. 안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그런데 그때, 그녀가 내게 고개를 들이밀고 뭔가 말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마고 공주도 말했다.
“제국의 공적이라 불리는 그 분, 에이전트 카밀에 대해서 제국에 체류하던 시기에 무슨 정보를 들은 것이 없느냐?”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공주님을 모욕할 의도는··· 네?!!!”
나는 당황하여 마고 공주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된 표정.
그리고, 내 말을 듣자마자 대단히 실망한 표정.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카밀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 아니라 정보를 물었다는 걸 깨닭았다.
어휴. 일단 한숨 놨다. 다행스럽게도 못알아챈 모양이네. 나는 서둘러 말했다.
“그, 그런 정보는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황궁의 공녀라 세간에 소문에 어두울 수 밖에 없어서···
그리고, 제국의 공적이라고 불리는 자의 정보가 제국에 있었다면, 그를 잡았지 않겠습니까?
유도키아 황후와 판데모니움 행정부가 이를 갈며 추격하는 자인데, 아직 못잡았다면 제국에도 정보가 없다고 보심이 맞을 듯 합니다.”
“쳇. 도무지 쓸모가 없군. 혹시나 해서 기대했는데.”
“아, 저 그럼 혹시 그거 외에 다른 보고나 지시는··· ‘콰아앙!’ 가버리셨네.”
마고 공주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접견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걸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마음 속에 불안감이 가득찼다. 다행스럽게도 알아차리지 못한 건 좋은데, 대체 왜 신성동맹의 라인인 그녀가 카밀을 찾지?
그날의 일이 너무 분이 안풀려서, 복수할 생각인가? 아니면, 제국의 공적이라는 소문을 듣고, 신성동맹 측에서 뭔가 오퍼가 있나?
어느 쪽이든, 나는 카밀의 정체가 드러나서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좀 자중하자. 이거 들켰다가는 왠지 모르게 시신도 못찾을 수준으로 험하게 뒈질 것 같아.
그렇게 허망하게 끝난 접견을 마치고 왕궁을 나오는데 바깥이 어수선했다. 뭐지?
“1대대는 중앙로를 따라서 탐문하고, 2대대는 시장을 수색한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 귀족가를 개별 탐문한다.”
“아니, 대장.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명예롭고 긍지높은 우리 아르파드 근위대가 여자 하나 찾느라 이렇게 대단위로 동원되어야 하는 겁니까?”
“어휴. 나보고 어쩌라고? 이슈트반 왕세자께서 반드시 그 처녀를 찾으라고 대대장들에게 난리가 아니시란 말이다.”
“아니, 찾으려고 해도 무슨 단서가 있어야 찾든지 하죠? 길거리에서 치마가 들춰진 청순한 메이드 외에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 어떻게 찾아요?”
“그래도, 반드시 찾아야 해. 왕세자께서 상사병에 걸리기 직전이시란 말이야.
그녀를 생각만 해도, 전에 그 간악한 제국의 환관장이 입힌 상처가 씻은듯이 나은 것 같은 기분마저 드신다고 하셨다.
그러니, 반드시 찾아야 해. 그리고, 정중히 모셔야 한다. 어쩌면 왕가의 후궁이 되실지도 모르는 분이니.
혹시 아느냐? 만약에 그렇게 들어온 후궁이 아들을 낳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우리 헝가리의 모후가 될지도 모르는 분이다.”
“뭐, 목격한 사람들은 다들 그 정도로 청순한 미인이긴 하데요. 하아. 알겠습니다. 까짓거 뭐 찾아보죠.”
며칠 전에 한바탕 난리를 쳤던 아르파드 근위대가 여기저기 도시를 들쑤시고 있었다.
나는 설마 못알아 보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나 몰라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착찹한 마음으로 세게드로 돌아갔다.
수백년 후. 부다페스트 외곽의 성당 발굴 현장
“오오오!!! 교수님, 이것 보십시오. 여기 믿을 수 없는 것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뭔데 그러나? 아니? 이것은?”
“실존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설이나 민담 속의 이야기로 치부되던, 에이전트 카밀이 일생을 연모하며 따라다닌 레이디 쥴리아!
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하던 그녀가 실존인물 이었습니다. 여기 증거를 찾았습니다.”
“어디, 보세. 오오오!!! 믿을 수가 없군. 이건 바로 에이전트 카밀과 레이디 쥴리아의 언약증서야.
맙소사.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녀는 실제했고, 그리고 여기서 에이전트 카밀과 약혼했었군.”
그러나, 노교수의 말에 경악하는 여자 조교들이 있었다.
“아아아아악!!! 말도 안돼! 이건 아니야. 에이전트 카밀의 진정한 연인은 카르브나 황조의 바실레이오스 공동 황제 뿐이라고요!!!”
“아니? 그건 아니지. 바실레이오스 황제의 정인은 당대 파라코이모메노스인 율리아노스잖아!!!”
“무슨 소리! 콘스탄틴노플 행정 기록에 틀림없이 남아있어. 에이전트 카밀이 그랜드바자에서 율리아노스를 울리고 떠났다는 사실이. 카밀X율리아야!!!”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런 식으로 따지면, 카밀이랑 안나 황녀도 연인이게?”
“안나 황녀는 바실레이오스 공동 황제와 하람릭으로 맺어진 사이잖아? 그럼 그쪽 커플링과는 안겹친다고.”
“잠시만요. 좀 분위기를 환기해 봅시다. 이 기록대로라면 카밀라 공녀가 생전에 그토록 에이전트 카밀을 증오했다는 사실에 원인을 찾은 거 아닐까요?
당시 대다수의 귀부인들이 다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카밀을 원망하는 대신, 그 원인인 레이디 쥴리아를 증오했다죠?
마침, 교차 검증으로 그 시기에 이 근방에서 카밀라 공녀의 동선이 이곳과 겹칩니다. 그럼, 카밀라 공녀가 카밀을 증오한 원인도 어쩌면 실존하는 그녀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나는 에이전트 카밀이 사실은 카밀라 공녀였다는 설에 더 흥미가··· 응? 다들 그 표정은 뭐야?”
“공부 좀 더하고 와라! 그냥 이름만 비슷하면 동일 인물이냐? 역사학자로서 제일 해서는 안되는 짓을 대놓고 해놓고선 뭐가 흥미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워. 그 두 사람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앙숙인데?”
“아니, 나는 그냥···”
그 후로도 발굴 현장에서 카르브나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논쟁은 밤이 깊도록 끊임이 없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사학계에서는 카르브나 중흥기에 활약했던 인물들의 복잡한 인과 관계를 해명하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논쟁을 이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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