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
“후후후··· 이제야 좀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시는군요. 무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두 사람은 한창 때의 선남선녀죠. 그리고 한쪽은 이미 국가의 지도자이고, 다른 한쪽은 확고부동한 차기 지도자이고요.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서 제국과 조지아는 동군연합의 형태로 자연스러운 현안 해결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정황 상 제국이 상당히 우선권을 쥐는 형태이니 아마도 장기적으로는 흡수 합병의 형태로 흘러가겠죠. 현재 제국의 골치거리가 되고 있는 조지아 사태에 가장 원만한 해결이 될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하···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리가··· 양국의 정치적 입장을 더 고려할 부분도 있고, 그리고 정작 중요한 당사자들의 마음도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확실히··· 지적하신 것처럼 당사자들의 의지가 그 사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죠. 사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단순히 정치적 입장만 고려해서 밀어붙이는 정략 결혼이 잘 이뤄질리가 없죠. 하지만 그래서, 더 사람들이 그 방향에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거든요. 타마르 여왕은 어린 시절 자신의 부친을 따라 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카르브나 황실의 초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그 당시에 바실레이오스 태자와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고요.
말하자면, 두 사람은 서로 소꿉친구 같은 사이인 거죠. 그래서인지 몰라도, 타마르 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바실레이오스 태자와의 어린 시절의 친분을 이야기 하며 좋은 사이였고, 그 인연을 통해 이번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후후후, 제법 능수능란한 여왕님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과거의 인연을 부각시켜 현재 조지아에 불리하지 않은 외교적 협상 여지를 끌어내어 버렸죠. 그리고, 제법 사랑스럽다는 생각도 들고요. 왕실과 귀족가의 정략 결혼이 의무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장에 자신을 싸게 팔지 않고 어린 시절의 인연을 기다리며 미혼으로 남아있다니.”
나는 그의 말에 조금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소꿉친구? 아마도 요하네스 의원이 말한 시기라면 바실이 콘스탄틴노플에 온지 얼마 안된 시점이니깐 정말 어린 시점이었겠지. 이미 그때부터 바실과 연이 있었던 존재라고?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요하네스 의원은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제 아무리 제국의 적들에게 피의 왕자로 두려움을 주는 바실레이오스 태자라고 해도, 저렇게 사랑스러운 소꿉친구의 도발에 병력을 이끌고 가지는 못하겠죠. 현재,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지아 전선에 바실레이오스 태자가 곧 파견될 것으로 보입니다. 타그마타 중앙군의 파견은 없이, 총사령관의 자격이 아닌, 공동 황제의 자격으로서 가능하면 외교적으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라는 책임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그 동행으로 당연히 자문역으로 공녀도 동행하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외교적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의회에서도 고문단을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동행하게 될 것이고요. 아마도, 현지 증원군은 아욱실리아 베오울프가 파견될 예정인 모양입니다. 증원에 타그마타 중앙군을 파견하는 것은 현지의 상황이 심각하는 것을 제국이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으니, 보조군을 파견하되 소수의 병력으로도 정예군의 위력을 발휘하는 북방의 늑대들을 보낸다는 형식인듯 하군요. 그리고, 그곳에는 지옥의 꼽추가 있죠. 제법 흥미로운 상황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인연과 악연이 뒤섞인 당대의 정점에 선 인물들이 한곳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뭐가 벌어져도 틀림없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죠. 거기서, 공녀는 과연 어떤 활약을 보여주시려나요? 동행하는 저로서는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리고, 공동 황제의 총애를 받는 존재로서, 어쩌면 공녀의 위치를 위협할지도 모를 캅카스의 암사자 여왕에 대해 공녀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도 궁금해지고요. 설마하니, 동군연합을 결성하는 성대한 결혼식에 들러리나 하실 생각은 아니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나는 조금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요하네스 의원에게 말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저는 의원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흑막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황실의 명을 받는 공녀일 뿐이고요. 그리고, 태자님의 인연에 대해서는 제가 뭐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분의 인사자문관일 뿐 그분께서 정하시는 마음을 제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윗분들의 의지에 의해 결정될 뿐입니다.”
“뭐, 항상 들어도 질리지 않는 공녀님의 정치적 모르쇠 발언 감사드립니다. 뭐 제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계시지만, 이미 머리 속에서는 수십수 앞의 기보를 다 그려놓으신 상태이겠죠?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긴장하시길 바랍니다. 여왕은 지금까지의 상대와는 조금 다릅니다. 캅카스의 암사자라는 이명에 부족함이 없이, 여자임에도 무예가 출중하고 책략과 군략이 뛰어난 여장부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녀가 태어났을 때, 조지아의 어느 예언자가 그녀의 미래를 보고 엄청난 사실을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네? 예언이라고요? 그게 무슨 예언이었는데요?”
나의 질문에 요하네스 의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그녀의 이름과 같은 자의 삶을 그대로 살게 되리라. 그것이··· 그 예언자의 예언이라고 하더군요.”
순간, 나는 조금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름, 타마르··· 조지아의 가장 위대한 전성기를 만든 여왕의 이름. 그리고, 새로운 타마르. 그녀 역시 그 위대한 여왕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고? 그것은 곧··· 조지아 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인가? 예언 따위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싶지만, 뭔가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말이었다. 그렇게 요하네스 의원은 나의 가슴 속에 일말의 불안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중흥을 맞이한 제국에서 큰 이변이 없는 한 확실히 다음 황제가 될 태자 바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내 입장에서는 그냥 같은 집에 사는 막둥이 동생 같은 느낌을 주는 소년. 그런 그에게 생각치도 못한 과거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누구에게나 유년기의 기억은 오랜 시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깊이 새겨지기 마련이지. 어쩌면,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어린 시절에 각인된 그 인연에게 바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왠지 모르게 그 누구보다도 더 바실에 대해서 잘알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던 나에게 그건 묘한 울림을 주는 이질감이었다. 나는, 바실에 대해 정말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 맞을까? 왠지 살짝 내가 알던 바실과 다른 느낌마저 받게 하는 기분이 내 머리 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털어내려 애쓰며 말했다.
“에이, 설마··· 걔가 그럴 깜이나 되겠어? 절세 미녀보다는 군것질이나 좋아하는 녀석인데.”
나는 그렇게 애써 마음 속의 이질감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군부에서 의회 측에 고문단 파견을 요청해서 요하네스 의원이 그 소식을 전한거라면, 이제는 슬슬 나한테도 상의를 할 시간일 것이다. 나는 군 최고사령부에 가서 그런 동향을 듣고, 겸사겸사 바실의 반응도 살펴볼 겸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군 최고 사령부에서는 역시 예상대로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지아 파견에 대한 요청을 전해왔고 나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당연히 태자 마마의 인사자문관으로서 동행을 해야죠.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관련해서, 태자 마마께서 저와 관련해서 준비할 것을 상의드리고 싶은데, 지금 집무실에 계신가요?”
“아, 네.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런데 조금 기다렸다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방금 전에 막 울프스턴 연대장께서 공녀님과 마찬가지로 파견을 명령 받으시고 준비 사항에 대해서 태자 마마에게 보고드리러 들어가셨거든요. 그리 오래 걸릴 보고는 아니시니 집무실 앞에서 잠시만 기다리셨다 들어가시면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명령을 전한 사무관을 뒤로 하고 바실의 집무실로 향했다. 엄밀히 말하면 제국군 최고사령관의 집무실이니 상당한 경비병들과 보안 점검이 따른 후에 궁전같이 화려한 실내로 들어가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얘는 본인 성격 탓인지, 아니면 얘네 엄마가 갈궈서 그런건지 사령부에서도 상당히 아담한 구석 방에 집무실을 두고 있었다. 종종, 신입 장교들이 창고로 착각하고 비품을 던져두고 간다는 농담같지 않은 농담이 들리는 방의 앞은 역시나 허술하기 그지 없었다. 문조차 반쯤 열린 것을 보고 나는 저래도 괜찮은가 싶은 생각을 하며 다가갔고,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으로 이번 파견 준비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베오울프 연대가 수고를 좀 해주시길 바랍니다. 조지아에 당근을 내밀어 보자는 의견 때문에 중앙군 파견을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보조군인 베오울프에 짐을 떠안겨드리게 되었군요.”
“우리 일인걸요. 뭐, 일이야 항상 하면 되기 마련이죠.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잘만하면 별다른 교전이 없이 순조로운 마무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여유를 가지고 임하시죠. 공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보면, 의외로 태자님 입장에서 흥미로운 일이 될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캅카스의 암사자, 타마르 여왕이 그렇게 미인이라죠? 그리고 태자님의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고. 오랜만에 만나는 소꿉친구 아닙니까? 좀더 즐거운 기분으로 가셔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연대장님. 장난스럽게 긴장을 풀어주시려는 배려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말씀하신대로 타마르 왕녀, 아니, 이제는 여왕이죠. 아무튼 그녀가 엮여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긴장하고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녀는··· 제 입장에서 절대 가볍게 볼 존재가 아니에요.”
“어이쿠야!!! 이거 슬쩍 농담한 것이 의외로 진담인 겁니까? 저는 그저 소꿉친구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더없이 진지한 태자님의 반응을 보면 이건 뭐 거의 첫사랑에 가까운 느낌인걸요? 혹시 그겁니까? 캅카스의 암사자라면 제국의 군신인 태자님과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정말로 이거 뭐가 벌어져도 벌어지는 상황이 나오는 건가요?”
울프스턴은 진지한 목소리로 반응하는 바실에게 수위는 늦췄지만 여전히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밖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는 왠지 모르게 그 가벼운 이야기를 가볍게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없이 진지한 바실의 태도도 생소하기 그지 없었다. 대체 뭐야? 쟤가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내가 알지 못했던 바실의 모습이었다. 정말로··· 타마르 여왕의 존재는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것 이상으로 바실에게 내가 모르는 어떤 긴밀한 인연이 있던 것일까? 그런데 그때 바실이 말했다.
“첫사랑이라니··· 그런 가벼운 농담은 그만두세요.”
나는, 살짝 울프스턴을 면박주는 바실의 말에 왠지 모르게 안도의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응? 뭐야, 이런 기분은? 생각해보면 그럴리가 없잖아. 얘가 그런 애가 아닌데. 그런데 그때였다. 바실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는··· 제 유년기의 가장 큰 가르침을 전해준 요람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사람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그녀만큼 저를 격정에 휩쌓이게 만든 존재도 없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는 절대 가볍게 논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그런 존재입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