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
“원하시는 대로 전망 좋은 방으로 준비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라구사 전망이 최고의 경관이지? 너무 아름다워서 감동 먹고 뛰어내려도 말리진 않겠어.”
율리아의 악의적인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가 감금된 곳은 그의 말대로 버려진 수도원의 종탑이었다. 높이만 따지면 라구사의 명물인 민체타 탑의 높이에 준할 만큼 높은 그 종탑에 우리를 감금한 이유는 간단했다.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되게 오랫동안 방치된 수도원이었는지, 군데군데 파손된 곳이 많았다. 특히, 우리가 감금된 방의 문 밖은 복도가 무너져 아래로 뻥 뚫려있었다. 아래 층은 아예 내려가는 난간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오는 방법은 무너진 복도 맞은 편에서 간이 다리를 내려주는 것 밖에 없었다.
창문은 있었지만, 창 밖으로는 발 디딜 곳도 없는 까마득한 종탑 벽만이 있었다. 율리아의 말처럼 투신하고 싶은 충동이 싹 달아나는 높이였다. 나는 우리가 감금된 곳을 보면서 깊은 절망감이 들었다. 탈출이 불가능한 것도 불가능한거지만, 그래도 라구사 시내에 있는 이런 눈에 띄는 높은 탑이 라구사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우스타샤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준이라니. 대체 얼마나 관리가 부실한 거냐? 그것을 보니 저 녀석들이 거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심정도 이해가 간다. 이 정도로 쉽게 털어먹을 수 있는 놈을 눈앞에 두고 포기하는 건, 저 한치 앞도 못보는 머저리들에게 무리한 일이겠지.
그래서, 우리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시간을 벌기는 하였지만, 뭔가 대응할 방법이 없이 무기력하게 그들의 거사까지 그곳에 감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나오는 것은 한숨 밖에 없었다. 나는 이 와중에 쓸데없는 배려로 보이는 남녀 개별 감금 덕에 홀로 방에 처박혀서 문의 창살 너머 간이 다리 맞은 편에서 나를 보면서 비웃고 있는 율리아의 시선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뭔가 우리를 새장 속에 감금하고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옆방에서 깊은 한숨과 후회를 하고 있는 바실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흘렀다.
탑에서의 감금을 몇일 당하면서 느낀 것인데, 의외로 우리에 대한 대접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율리아가 카탈루냐나 베니스가 안보는 틈에 바실을 해꼬지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했는데, 의외로 우리를 지키는 감시자들이 우스타샤 출신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생각보다 좋은 식사와 갈아입을 옷가지와 씻을 물까지 제때 제공되었다. 아, 물론 처음에는 바실한테만 주고, 나한테는 곰팡이 핀 말라비틀어진 빵조각이 던져졌는데, 바실이 자신도 같은 걸 달라고 말하며 제공된 식사를 거부하자, 마지못한 듯 나에게도 좋은 것이 나왔다. 뭔가 와인에 침으로 보이는 것이 둥둥 떠다니긴 하지만.
아무튼, 당장이라도 바실을 죽일 듯이 굴던 율리아는 의외로 우리에 대한 대우를 박하게 하진 않았다. 설마, 내가 고급 식사랑 그리팅 와인 드립 쳤다고 이러는 건 아닐 것이고··· 대체 뭔 생각이냐? 뭔가 우리를 손아귀에 넣었다는 사실만으로 상당히 만족감을 느끼는 건가? 나름 거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함이 멀리서도 느껴지는 와중에, 꼬박꼬박 우리에게 식사가 제공될 때면 간이 다리 맞은 편에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우리를 주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이 복잡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녀의 예리한 시선의 끝이, 말없이 감금된 바실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이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대체, 저 망할 년은 뭘 하고 싶은 걸까? 저 어벙한 녀석에게 뭐가 그렇게 복수할 것이 사무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대한 답을 내리지는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은 흘러갔다. 그리고 며칠 후,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뭔가 감금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아침 식사마저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상황이었다. 간이 다리가 올려지면서 일상과는 다른 일이 생겼다. 항상 어둠 속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를 주시하던 율리아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게 너희들이 여기서 먹는 마지막 식사일 것이다. 오늘은 바로 우리가 라구사를 손에 넣는 날이다.”
그의 말에 우리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문창살에 얼굴을 내민 우리의 눈에,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녀는 우리에게 익숙한 드레스 차림이 아니었다. 맞춤형으로 제작되었는지 몸에 라인을 잘 드러내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요사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리우고 긴 머리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창관의 여자가 아닌 전쟁의 여신 같은 느낌을 주었다. 뭔가, 보고 있으면 있던 긴장감도 사라지는 바실에 비하면 정말로 저쪽이 제국의 황태자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자신의 모습을 과시라도 하듯이, 망토를 흩날리며 간이 다리 너머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감금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는 뭔가 우리가 그를 보고선 질리거나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본 바실이 그를 보면서 반응했다. 그리고, 그건 그가 결코 원치 않았을 반응이었다.
“형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만 두세요. 그렇게 하시면 제가 책임지고, 이번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네 위치를 망각한 모양이구나. 뭐? 책임지고 안전을 보장해? 정신 나간 소리도 어느 정도여야지.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곳에 갇혀서 내가 잃어버린 것을 이제부터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만이 네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고 내가 복수를 달성하고 모든 것을 다시 찾는 것을 보며 나를 증오하는 비명을 지르는 것이 너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일 것이다.”
그의 말에 바실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당신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련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불안하기 그지 없구요. 저는,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 당신의 손을 붙들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 말에 율리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가 바실에게 말했다.
“발칙한 놈. 감히 누가 누굴 동정해? 네가 허세를 부리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이미 거사는 시작되었거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 밖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라구사를 해방하라!!!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자!!! 시민들이여 일어나라!!!”
“가에타니 렉터를 따르라! 라구사를 제국에서 해방시킨다. 모두들 궐기하자. 다들 행정부를 점거하고 나약한 친 제국파들을 몰아내자!!!”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렉터궁을 지켜라. 폭도들이 몰려온다. 아앗!!! 그냥 폭도가 아니야! 폭도들 중에 훈련받은 병사들이 섞여 있어.”
순식간에 시내 여기저기에서 불길과 연기와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는 비명과 함성이 울려 퍼졌다. 맙소사, 정말로 시작해 버렸어. 시내 여기저기서 들리는 선동의 목소리가 도시 전체에 울려퍼지며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었다. 아마도, 라구사의 뒷골목을 깊숙이 장악했던 우스타샤의 행동 요원들이 혼란을 키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틈에 카탈루냐와 베니스의 전력들이 렉터궁으로 진입하는 경로에 일제히 돌입해서 궁전을 경비하던 라구사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라구사군은 여기저기서 들리는 선동 소리에 혼란스러워 하고, 또 공격해 들어오는 자들이 외치는 가에타니 렉터를 옹립한다는 말에 더 혼란스러워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시내의 일제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졸전을 거듭하는 모양이었다. 가에타니가 반 제국 정서를 이용해 끌어들인 자들은 라구사에서 쉽게 진입할 수 있었고, 가에타니가 의도했던 정치적 목적을 넘어서서 되려 그를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창 밖에서 들리는 도시 전체의 아비규환 속에서 우리는 당황했고, 율리아는 희열했다.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저 망할 년이 요구했던 대로 최고로 좋은 전망이지? 거기서 지켜보아라. 너와 나의 격의 차이를 말이다. 하하하하하!!!”
그렇게, 그는 광소를 지르며 우리를 조롱하고 탑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내려가고 난 다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창밖으로 보이는 라구사의 혼란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망했다. 이젠 정말 수습이 안되는 대형 사고다. 이렇게 라구사가 저들의 손에 떨어지고, 바실이 인질이 된다면, 제국과 카르브나 황조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말했다.
“아아··· 어쩌면 좋아. 이젠 망했어. 다 틀렸어. 이제 어쩌면 좋아요 태자님!!!”
나의 살짝 원망이 섞인 말에 바실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정말로 상황이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네요. 저는 형님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주시기를 바랬는데···”
“그 인간에게 기대할 걸 기대하시라구요. 제가 몇번을 말씀드려요. 그 자는 태자님의 혈육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이라고요.”
“네, 그런 모양입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기대를 해보았지만, 역시 그건 공녀님의 충고를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린 제 불찰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저도 더는 기다려 줄 수 없을 것 같네요. 상황을 수습하도록 하시죠.”
나는 바실의 어이없는 말에 기가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뭐? 수습? 지금 와서 뭘 어쩌라고? 그래서 나는 그런 마음을 담아서 바실에게 빈정대듯이 말했다.
“네, 아주 빠른 판단 감사드립니다. 근데 어쩌죠? 지금은 답이 없는데요.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서 무력하게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 밖에 없잖아요. 당장 여기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 무슨 수습을 하신다는 거에요.”
“아뇨, 나갈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로요.”
바실이 지목한 곳은 바로, 창문이었다. 창밖으로 시가지의 상황을 보던 나는 옆방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바실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뭐? 지금 얘가 뭐라는 거야? 어디로 나간다고?”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여기로 나간다니요? 이 창문으로 탈출을 한다고요? 어떻게요?”
“그건, 공녀님이 알려주셔야죠.”
“네? 저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전문가시잖아요. 공녀님, 벽 타는 거 잘하시잖아요. 마침, 거사에 참가하느라 우리를 감시하는 인력도 줄었군요. 경비가 줄어드는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지금이라면 저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여기서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나가죠. 상황을 수습해야 할 시간입니다.”
책을 훔쳐보고 싶어서 벽을 탔다. 남의 사랑 이뤄주려고 인질로 왔다. 그리고 그 두가지 사실이 조합되면 놀랍게도 맨손 등반 및 탈출 전문가란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야, 이 개자식아!!! 누가 전문가야! 누가! 메이드에 남장에 시궁창 키스에 감금까지 시켜 먹은 것으로 직성이 안풀리냐!!! 나는 그런 분노와 난이도에 대한 현실을 담아 바실에게 격하게 소리쳤다.
“절대로 무리에요!!! 제가 벽을 몇번 타봤다고 해서 전문가는 절대 아니라고요! 그리고, 전에 벽으로 이동했던 곳들은 다들 높이도 낮고, 벽에 돌출된 것도 많은 곳이었지, 이렇게 높은 곳에 요철도 거의 없는 매끈한 곳이 아니었다고요!!!”
“도저히 무리시라면 제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죠. 다만···”
“다만, 뭐요. 무슨 얘기를 하셔도 그건 동의할 수 없어요.”
“공녀님 벽 잘 타시는 거 엄마도 아는데, 계속 여기서 멍때리고 있다가, 나중에 그때 거기서 뭐했냐고 하면 변명할 이야기가 있을까 싶네요. 뭐라도 해봤다는 변명 거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둬야···”
“손 두개, 발 두개. 항상 4개로 벽돌 틈에 요철에 몸을 지탱하고 한번에 한 개씩만 움직이세요. 아무리 미풍이라도 바람이 불면 절대 이동하지 말고요. 출발!”
야, 이 자식아!!! 그 상황에 황후 마마는 반칙이잖아!!! 누굴 잡으려고 그래!!! 덕분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지금까지 내가 탔던 높이 기록을 갱신하는 맨손 등반을 시작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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