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
항상 평화로운 나의 일상을 방해하는 웬수가 오랜만에 나를 방문하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요하네스 의원님. 지난번 크림 사태 이후 한동안 바쁘시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갑자기 어인 일이신지요?”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공녀. 네, 공녀 덕분에 제대로 한방 먹은 거 만회하느라 정신없었죠. 공녀가 의회에서 얼마나 많은 잠정적인 황실파 의원으로 활약할 카자크 원로들의 의석을 확보했는지는 잘 알고 계시겠죠? 덕분에 의회파와 황실파 어느 쪽도 아닌, 중도 성향을 취하고 있던 의원들을 우리 측으로 영입하느라 엄청나게 애를 먹었습니다. 큭큭큭··· 이 요하네스의 정치 이력에 흔치 않게 진땀을 빼며 허둥댄 이력을 만들다니.”
여전히 헛다리 짚고 앉아 있지만 굳이 말하지는 말자. 그리고 요하네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공녀도 그 사이에 뭔가 또 한건 하신 모양이더군요. 의회의 외교위와 법사위 의원들에게 소식은 전해들었습니다. 의약품의 내부 관리 강화와 대외 교섭 수단으로의 활용이라. 흥미로운 한수더군요. 내부적인 사안이야 뭐 그렇다 쳐도, 대외 교섭용으로 인도적인 명분을 간판에 내세워 약품 수출을 중간 관세조차 매기지 않고 적성국에 공급하다니. 사실, 반신반의했습니다. 그 정도의 조건이 신성동맹 측에 얼마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낼까 싶었거든요. 근데, 효과가 대단하더군요.”
“네? 효과가 대단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공표되지 않은 신성동맹과의 외교 채널의 물밑 접촉에서, 그들이 생각치도 못한 우호적인 태도로 교섭에 응하였다고 하더라구요. 복잡한 외교 문제들에 대해서 제국측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에 대해서도 순순히 납득하고 말입니다. 의외더군요. 통상적으로 서로 죽일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것이 비공식 물밑 협상의 모습이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저쪽 전권대사로 나온 사람들이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실실 웃으면서 제국 측 교섭에 긍정적이었다고 합니다. 공녀, 대체 뭘 어떻게 한겁니까? 너무 우호적인 반응이니 되려 겁이 날 지경입니다. 좀 신호 좀 주고 치고 들어오시죠.”
나는 요하네스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에휴, 일단은 저번 공작이 뭔가 성공적인 건 사실인 모양이다. 외교 협상에 나온 실무자가 저렇게 뭔가에 홀린듯이 실실 웃으면서 정신줄을 놓고 제국 측의 행보를 수용하다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한 의약품을 확보하신 신성동맹의 윗분들이 대단히 만족해하신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제국 측에도 유리한 영향을 미쳤고. 살다보니 내가 하는 일이 양쪽에 다 도움이 되는 일도 있구나. 나는 흔치 않은 양측 모두가 행복한 결과에 안도하며 요하네스 의원에게 말했다.
“뭐, 제가 무슨 의지가 있겠습니까? 다 저 위에 계신 분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쩐 일로 저를 보러 오셨는지요? 설마 그 소식을 전하러 오신 것은 아니실 것이고. 요즘 중도파 의원 포섭으로 바쁘시다 들었습니다만.”
“아, 그렇죠. 마침 이야기 잘해주셨습니다. 오늘 제가 공녀를 만나러 온 것은 사실 그런 활동과도 관련하여 공녀에게 한가지 부탁을 드릴 것이 있어서 입니다.”
“네? 저한테 부탁할 것이 있으시다고요? 그것도 중도파 의원들의 영입과 관련해서요?”
나는 뜻밖의 요하네스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러자 요하네스가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저와 공녀 사이 아닙니까? 서로 세련된 관계의 정적이라 생각했는데 아닙니까? 저번 일로 저를 한방 먹이셨으니, 이번에는 좀 도와주시죠. 그 정도야 뭐 여가 삼아서 해주실만한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의 챔피언인 공녀 아니십니까? 거기다, 저번에 세리포스에서 제게 지신 빚도 있으시고 말이죠.”
“대체,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다른 분도 아닌 정계의 실력자이신 요하네스 의원께서 제게 도움을 청하실 일이 뭐가 있으신지? 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시다면 들어보고 가능한 부분이라면 도와드리도록 하죠.”
그러자, 요하네스 의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노플의 올코트 가문과 스미르나의 로레이우스 가문을 아십니까?”
“아뇨. 처음 들어보는데요.”
“올코트 가문은 원래 잉글랜드 용병 출신인 선대가 제국에 귀순해서 세운 가문입니다. 과거 황제의 내전 종식 시기에 발빠르게 의회와 황제를 지지하여 외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주류 귀족 사회에 편입한 신흥 귀족이죠. 지금 가문을 이끌고 있는 올코트 의원은 아드리아노플의 유지로 현지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레이우스 가문은 과거 번성했던 아나톨리아 군사 귀족의 후예로, 가문을 이끌고 있는 로레이우스 의원도 역시 스미르나의 실력자입니다.
두 사람 다 저보다 연배도 높은 원로급 의원들이고, 의회에서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정계의 거목들이죠. 저 역시도 정계 진출 초기에는 그분들의 조언과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나 올코트 가문은 모계로 저와도 먼 친척뻘이 되는 사이라서 그 집안 식구들과 저 개인적으로 친분도 깊은 편입니다. 그런데, 그 올코트 가문에서 최근에 로레이우스 가문과 관련하여 한가지 이슈가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혼담입니다.”
“혼담이라고요? 뭐, 귀족들 사이에서는 흔한 이야기네요. 그런데, 거기에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이게 조금 저 개인적인 인연과 관련해서 좀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원래 올코트 의원은 로레이우스 의원의 아들과 친분이 깊어, 젊은 시절 나중에 서로의 자식들이 크면 혼인을 시키자는 약속을 하였다고 하더군요. 로레이우스 의원의 아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지만, 그 약속은 손자인 테오 군으로 이어진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로레이우스 의원은 이번에 자신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테오군을 아드리아노플로 보냈다고 합니다.
일단, 명목 상으로는 동방 출신이라 제국 중앙에서는 입지가 약한 테오군을 사교계에 데뷔시킨다는 이유이지만, 실제로는 이번에 테오군을 보내서 올코트가와 맺은 혼담을 성사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설이 파다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중도 계열의 거물인 로레이우스 의원과 올코트 의원이 혼담으로 결속이 더 강해지면 그 두 사람의 정치적 영향도도 더 커질 것이란 분석이죠. 그래서, 그 혼담에 대해 정계에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문제는 올코트 가문에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올코트 의원에게는 아들이 없이 딸이 4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이 작은 아씨들이라 부르는 올코트가의 4자매가 바로 이번 혼담의 당사자가 된 겁니다. ”
“네? 딸만 4명이나? 확실히 그러면 좀 상황이 복잡하겠네요? 누가 혼담의 대상이 되냐에 대해 의원께서 고민이 많으시겠군요.”
“뭐, 그렇죠.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결혼 적령기가 아닌 막내 따님을 제외하고 3명이 후보인데, 올코트 의원은 이번 테오 군의 아드리아노플 사교계 방문과 관련하여 그 혼담의 결정을 당사자들인 딸들의 본인의 의사에 맡긴다는 입장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묘한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그 따님들이 테오군을 두고선 자매간에 복잡한 신경전이 벌어진 겁니다. 들어보니 테오군은 그 나이대의 처녀들이 보면 한눈에 반할만큼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라고 하더군요.
거기다 외모 뿐만 아니라 로레이우스가의 후계자이자 정계 진출이 확실한 혈통을 가지고 있고, 스미르나에서 젊은 나이에 인권 변호사로 일하면서 취약한 무슬림 이민자들의 권익을 지주들로부터 보호한 일로 평판이 자자한 청년입니다. 한마디로 당대 최고의 신랑감이라 할만한 청년인거죠. 그런 테오군에게 관심을 가지는 처녀들은 넘쳐났고, 그것은 혼담의 대상이던 올코트가의 자매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아항, 그러니깐 서로 자신이 테오군의 신부가 되겠다고 자매끼리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인거죠?”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대해서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개인적으로 좀 개입될 사정이 생긴 것이··· 그 자매들 중에 셋째인 베스양과 제가 좀 친분이 있습니다. 올코트 의원은 여러 번 사별하고 그때마다 재혼을 하였는데, 그래서 자매들의 모친이 다 다르죠. 그 중에 그녀의 모친이 바로 저와도 먼 친척 뻘이라서 어린 시절에 그 아이와도 조금 친분을 가지고 지냈죠. 그런데, 이번 일이 생기면서, 그녀가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부디, 이번 일에 대해서 자신을 도와달라면서 말입니다.
다른 문제라면 제가 발벗고 나서야 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상황이 좀 미묘합니다. 다른 일도 아닌 사교계에서 벌어지는 아가씨들의 혼담을 둔 신경전이란 말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저 같은 정객이 개입하는 것은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림도 좋지 않습니다. 자칫, 의회의 중진인 올코트 의원과 로레이우스 의원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는 일이죠. 그래서, 저보다는 대신에 같은 여성으로서 아가씨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공녀님이라면 이런 상황에 딱 맞는 적임자가 아닐까 싶은데요? 황제 폐하의 심중을 구현하는 무시무시한 흑막이시긴 하셔도, 일단은 사교계에서 활약하실 한창 나이의 숙녀시니깐 말입니다. 그러니 저보다는 그 아이에게 더 큰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드립니다.”
아니, 내가 무슨 무시무시한 흑막이야. 말은 좀 바로 하라고. 하지만, 그런 표현에도 불구하고 왠지 나는 요하네스가 부탁한 것에 대해서 외면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어찌되었건 복잡한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본국에서 내린 공작이나 목숨 내걸고 하는 일이 아닌 사교계의 일이니 나름 기분전환이 될 것 같다. 그래, 생각해보니 나도 하도 괴상한 짓에 휘말려서 그렇지, 한창때의 처녀라고. 다른 애들 같았으면 저렇게 사교계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나 하하호호 거렸어야 정상인데 지금 뭐하고 있는거람.
그래서인지 뭔가 하녀 시절에 막연하게 동경하던 사교계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조금은 두근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아··· 파티와 드레스와 로맨스··· 난 왜 저런 것들하고는 당췌 인연이 없는겨. 아무래도 내 인생의 장르가 잘못 설정된 기분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여기 오게 된 이유고 사실··· 카밀라 공녀님과 칼 공자님 사랑을 이뤄 드리려고 대리를 맡아서 온거잖아? 그래, 사실은 나 이런 일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어.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요하네스 의원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나름 흥미로운 외유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번 그녀를 만나보고 제가 도움줄 수 있는 것이 뭔지 알아보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덕분에 그 아이를 외면했다는 죄책감이 없이 진행하던 중도파의 회유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겠군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공녀님만 믿겠습니다.”
그렇게 그와의 알현을 마쳤다. 그리고, 나는 황실의 허락을 얻은 다음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아드리아노플로 향했다.
황도 콘스탄틴노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드리아노플에 도착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시에 도착해서 나는 조금 화려한 아드리아노플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흥분되는 기분을 느꼈다. 콘스탄틴노플이 종교인들과 관료들과 군인들이 많아, 도시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다소 엄숙한 느낌이 없지 않다면, 아드리아노플은 규모가 좀 작기는 해도 훨씬 활기차고 명랑한 느낌의 젊은 도시였다. 그리고 규모도 황도보다 작을 뿐이지, 니케아와 함께 제국의 제 2 도시를 다투는 도시답게 번화하였고.
엄숙한 콘스탄틴노플과 대비되게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유흥과 자유분방함이 있는 도시답게, 도시 곳곳에는 귀족들의 사교 모임 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로맨스와 염문을 나누는 모습이 쉽게 관찰되었다. 뭔가 사랑의 도시라는 기분이랄까? 왠지 이곳에 오니 한동안 나를 시달리게 만들었던 삭막한 전쟁이니 모략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에서 해방되어서 그것만으로도 기분은 한결 좋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기분을 안고 곧바로 올코트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올코트 가문에 도착하니 그곳에서는 마침 사교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조금 혼잡스러운 와중에 내 신분을 밝히니, 잠시 후 저택에서 두 소녀가 나왔고 그 중에 한명이 황급하게 나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오오오··· 카밀라 공녀님이시죠? 요하네스 당숙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엘리자베베스 올코트입니다.”
“아하하··· 요하네스 의원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을지 짐작이 안가네요. 일단, 만나서 반가워요. 카밀라 아르파드입니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저는 올코트 가의 막내 에이미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네, 반가워요. 에이미양. 카밀라입니다.”
두 아가씨의 인상이 대조적이었다. 베스의 첫인상은 조금 통통한 아가씨라는 것이었다. 아니, 솔직히 뚱뚱함에 건너가기 직전이었다. 얼굴은 대체적으로 귀여운 인상. 하지만, 아주 빼어난 외모라고 하기는 좀. 그리고, 꾸민 모습도 왠지 화려한 느낌이라기 보다는 조금 소극적이고 소심한 아가씨라는 생각이 드는 차림이었다. 그리고 에이미는 정말로 막 소녀티가 나는 어린 여자 아이였다. 요하네스 의원의 말처럼 혼담의 대상이 되기에는 아직 한참 남은 소녀였다. 그런 에이미에게 베스가 말했다.
“에이미, 언니가 잠시 공녀님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좀 피해줄 수 있겠니?”
“칫, 맨날 언니들만 따로 놀고. 하지만 오늘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했으니 양보해줄게. 대신 나중에 같이 놀아줘야 해.”
그렇게 에이미는 조금 귀여운 토라짐을 보임도 잠시 나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리고 베스는 나를 보고 무슨 구세주라도 만난 모습으로 반기며 나를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저택에서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안내했다. 그녀의 거처에서 그녀가 내온 다과를 들면서 나는 물었다.
“일단 대략적인 이야기는 요하네스 의원님에게 들었습니다. 이번에 아드리아노플에 방문한 로레이우스 가문의 테오군과의 혼담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갑자기 베스는 뭔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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