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
“그··· 그거 내가 마시던 잔···”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티테이블에서 내리고, 네가 저지른 무례를 사죄···”
그때였다. 저 너머 옥상 계단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저깄다. 그 놈이 저기 있어. 다들 여기로 모여!!!”
그걸 들은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순식간에 수십명의 근위기사들이 옥상 위로 달려오고 있었고, 레이디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아직 어질어질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아!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마고를 보았다. 그리고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비틀거리며 마고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티파티를 망친 무례를 정중히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무례를 미리 사과드립니다.”
“뭐? 미리 사과라니, 그게 무슨··· 꺄아아아악!!!”
나는 당황하는 마고를 공주님 안기로 들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달려오던 근위기사의 장교가 소리쳤다.
“머, 멈춰, 다들. 이··· 이놈!!! 당장 공주님을 내려놓아라!!!”
나는 억지로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느라 힘들었다. 제발, 발광하지 마세요, 마고 공주님.
나 솔직히 당신 죽을 힘을 다해서 들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니, 발광하면 내가 되려 나자빠질지도 몰라. 다행히도 그녀는 얼어붙은 모습으로 가만히 있었다.
하! 이럴때는 좀 얌전하네, 보고받을 때는 쥐잡듯이 잡더니. 그래서, 난 미소를 드리우고 턱으로 근위대에게 지시했다.
“전원 무기를 바닥에 내려놔. 그리고 뒤로 30걸음. 즉시! 안그러면 아르파드의 백합의 순결은 내가 보장할 수 없어.”
마고도 발끈. 그리고 근위기사들도 기겁. 그러나 돌출 행동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를 갈며 무기를 내려놓고 뒤로 걸었고, 그걸 보며 나는 마고를 안은 상태로 옥상 난간 쪽으로 뒷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리고 발 뒤꿈치가 난간에 닿았을 때, 나는 마고 공주를 내려주며 말했다.
“미리 사과드렸지만,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저의 무례함을.”
‘짜아아악!!!’
대답은 싸대기였다. 어우씨. 겁나 아파.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미소지었다.
그리고 노한 얼굴로 부들거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이제 이 무례한 지골로는 물러갑니다. 평안하시길.”
옆에 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걸 본 근위기사들이 일제히 달려와 무기를 쥐고 마고 공주를 뒤로 물리며 둘러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는 마고 공주와 눈을 맞춘 나는 이유없는 광소를 날리며 옥상 위를 달렸다.
부다페스트 외곽에 위치한 작은 성당에 도착한 시점은 이제 곧 해가 지려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르파드 근위대를 겨우 따돌리고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기분으로 성당 안에 들어갔다. 마르탱과 율리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율리아는 썩은 표정이었지만 달려와서 내 땀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였고, 나는 으쓱하며 마르탱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자네가 요구한 무용에 대한 입증은 되었다고 생각한다만.
헝가리 왕실의 무력 그 자체인 아르파드 근위대를 한방 먹이고,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는 정도면 어지간한 사람도 흉내내기 어려울 걸?
자, 어떤가? 이것으로 두번째 시험도 합격이지?”
“좋아. 그것도 인정하지.”
“와하하하하!!! 그래야지. 자,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바로바로 넘어가자고. 마지막 세번째 시험은 뭔가?
내가 뭘 첫사랑 소년 자네에게 입증해주면, 쥴리아가 나의 여신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세번째 시험은··· 간단해. 결혼해줘.”
“우하하하!!! 뭐, 그 정도야 간단··· 응? 지금 뭐라고?”
“당신이 쥴리아를 생각하는 마음이 진심인지 확인하는 당신의 애정에 대한 시험이야.
그걸 증명하는 것은 간단하지. 이 자리에서 쥴리아의 평생동안 변함없는 배우자가 되어주고 그걸 나에게 보여주면 그것으로 합격이야.”
마르탱의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나와 율리아는 동시에 굳어버렸다. 뭐라고? 나보고 얘랑 결혼하라고?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르는 줄 알았다. 아니, 지금 보고만 있어도 이가 갈리는 이 기집애랑 내가 왜 그딴 짓까지 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건 율리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정색하여 마르탱에게 말했다.
“마르탱. 그건 너무 심해. 결혼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도 아니고, 이미 설명했다시피 우리는 연인이지만 부부의 연을 맺기는···”
“정말로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라는 말이 아니야. 그래줬으면 정말 좋고, 나도 더 이상 아무런 미련이나 걱정없이 떠날 수 있겠지만 그건 무리겠지.
그러니, 진짜 결혼이 아니어도 좋으니, 서로가 서로를 생을 함께 할 연인을 증명하는 의미로, 가약이라도 맺어줘.
약혼 정도도 할 수 없는 거야? 네가 사랑하는 저 남자는 너와 약혼하는 것조차도 부담스럽게 느낄 그런 남자인 거야? 그런거야?”
그렇게 까지 말하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네. 오히려 바라던 바이지. 이번 기회에 자네가 쥴리아의 등을 밀어준다면, 오히려 내가 감사할 노릇이야.
자네가 증인이 될 생각이지? 힘든 결정을 내렸군. 첫사랑의 약혼에 증인이 되겠다니.
자네는 멋진 남자야. 만약에 그녀가 쥴리아만 아니었다면, 나는 자네에게 이 인연을 양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군.”
“치잇. 맘에도 없는 칭찬하지마. 아무튼, 그럼 지금 의식을 치뤄줘. 두 사람의 언약을. 네 말처럼 내가 증인이 될테니깐.”
녀석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외면하기 힘들었다.
율리아도 어이없어 하면서도 결국은 마르탱에게 상처주지 않기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허름한 작은 성당에서 세 사람이 모인 작은 언약식이 진행되었다.
“나 카밀은 오늘부터 삶을 다하는 날까지, 나의 연인 쥴리아를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의 생을 보듬고 책임지는 믿음직한 정혼자가 될 것이며, 괴로우나 슬프나 항상 곁에 있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 쥴리아는 오늘부터 삶을 다하는 날까지, 나의 연인 카밀을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그의 생을 배려하고 감싸안는 사랑스러운 정혼녀가 될 것이며, 괴로우나 슬프나 항상 곁에 있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뭐, 언약식이래도 형식은 대충대충이었다.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는 약식으로 어차피 성당이니 십자가 앞에서 대충, 같이 입장하고, 언약 선언을 하고, 기도하고 등등
뭐, 그렇게 마르탱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였다.
녀석은 예배석에 앉아 연신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속으로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대충 언약식을 마치고 일어서며 이 정도면 됐냐고 돌아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다시 속 뒤집는 말을 하였다.
“마지막 의식이 남았잖아?”
“응? 마지막 의식?”
“그래. 약혼자와 약혼녀의 키스. 그거 해야지.”
“·········!!!!!!!!”
뭐야 씨발? 순간 울컥해서 가발 집어던지고 멱살 잡을 뻔 했네. 아니, 젠장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생리적으로 무리라고!!!
차라리 바실이라면 몰라. 내가 쟤랑 왜 키스를!!! 아, 근데 생각해보니 라구사 시궁창에서 한번 비슷하게 헛짓거리를 하긴 했었나?
아무튼, 안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래서, 내가 발끈해서 난리치려는 찰라···
“제발···”
율리아가 소매를 붙들고 울먹이며 사정했다. 첨에는 본인도 질색했지만, 아무래도 흐느끼며 그걸 요구하는 마르탱을 실망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오!!! 이 망할 년아!!! 붙어먹을 것이 따로 있지! 왜 나한테 거지같이 질척거리고 지랄이야!!!
혈압이 솓구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결국 내가 참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설정된 성격으로 보면··· 씨바, 내가 키스도 리드해야 하는 거야?
속에 열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처연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는 마르탱의 앞에서 판을 엎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율리아의 한손으로는 허리를, 한손으로는 목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얼굴을 밀착했다. 에이, 쓰바. 가까이서 봐도 예쁘긴 겁나게 예쁘네. 나는 녀석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혀 밀어넣으면 죽인다!’
‘······걍 빨리 끝내자.’
그리고, 나는 결국 체념하고 녀석과 입맞췄다. 와우. 헝가리 하녀 출세했네. 팔라이올로구스의 적통 후계자였던 년이랑 이렇게 찐하게 리드하며 키스도 하고.
짜증나. 그리고, 생각보다 녀석 반응도 그렇고 키스 느낌이 좋아서 더 짜증나.
아무튼, 뭔가 복잡한 기분이 느껴지는 키스를 마르탱이 납득할 수준으로 충분히 하고 나서야 우리는 입술을 떼었다. 으잌, 드럽게 침 늘어져.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예배석에 마르탱이 없었다. 엥? 이 녀석 어디로···
녀석은 어느새 성당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율리아가 쫓아갔다.
“마르탱. 갑자기 왜 자리를···”
“미안. 내가 억지를 부린 것이긴 하지만, 끝까지 보기는 힘들더라. 하지만, 덕분에 조금은 후련해졌어.
좀 허세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그리고, 너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고. 표정과 눈빛에서 그걸 확인했어.”
어이어이. 없는 거 봤다고 뻥치지마!!!
하지만 묘하게 아까 전에 흐느끼던 모습과는 달리 후련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마르탱은 씁쓸하지만 미소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 나를 견디게 해주었던 건 바로 너였어. 그리고, 너도 그랬다고 하니 너무나 기뻐.
가능하면 그 인연을 평생 가지고 가고 싶었는데, 떨어져 있던 사이에 더 큰 운명의 상대를 만난 걸 보니, 내가 포기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네.
이제는 멀리서 너의 행복을 빌어줄게. 행복해야 해. 하지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
“그래. 알았어. 그때는, 네가 너의 아내와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같이 의지하러 온 나를 맞이해 주기를 바래.”
“후흣. 못당하겠네. 그래. 미련하게 너를 기다리지 않고, 나도 내 삶을 온전히 살아갈 것을 약속할게.”
그렇게 말한 마르탱에게 율리아는 손을 내밀었고, 마르탱은 그 손등에 키스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형씨. 당신의 정혼녀를 끝까지 책임지기를 당부하지. 그녀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거야.”
맘 같아서는 저 년 눈물이 아니라 눈깔을 뽑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과장되게 으쓱하며 말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내가 한잔 사지. 그때는 경쟁자가 아닌 친구로 만나서 그녀를 위해 건배할 수 있기를 기대하지.”
“정말이지··· 못당하겠군. 그래. 기대하지, 멋진 친구. 잘 있게. 그리고 상회의 일 대신 처리해 준거 고마워.”
그렇게 손을 흔들고, 마르탱은 나와 율리아에게 후련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한숨을 놓은 기분을 느끼며 진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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