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
“나는 쥬르첸족 타이치긴의 아들, 바이갈이다. 네놈들이 바로 우리를 막아서기 위해 나온 제국의 개들이더냐? 당장 눈앞에서 꺼져라. 죽고 싶지 않다면, 우리의 일족들이 가는 길을 막지 말고 물러나란 말이다!!!”
그의 그런 사나운 기세에 안드로니쿠스와 무라트는 손이 무기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실이 소리쳤다.
“타이치긴의 아들, 바이갈이여. 유감스럽지만 그런 너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 이곳 드네프르강 너머 크림은 우리 제국의 영역이다. 제국의 영역에 허락받지 못한 자가 함부로 발을 들이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제국은 엄연한 자주권을 가진 국가이며, 우리는 그런 제국의 영토와 시민을 지킬 책임과 의무를 가진다. 무기를 들고 제국에 위해를 가하려는 너희들이 제국을 향해 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제국은 제국을 유린하려는 적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고작, 한줌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보아하니, 운도 없이 내밀린 변경 수비대인 모양인데, 고작 너희 정도의 병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놈들이 여기서 개죽음을 하는 동안, 네놈들의 상관과 귀족들은 저 너머 안전한 곳에서 느긋하게 상황을 관망하며 병사들을 희생시키다가, 승리의 과실만 따서 저들의 황제에게 보고하고 영광을 독차지 할 것이다. 그러니, 어설픈 객기 부리지 말고 꺼져!!! 지금, 우리는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다고.
우리 뒤에 수십만명의 아이와 노인들과 여자들이 부상당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잔뜩 굶주린 채로 목적지 조차 없는 길을 걷고 있다. 킵차크는 몇대에 걸쳐 헌신했던 우리 초원의 백성들을 박해하고 추방했단 말이다. 그 잔인한 마마이 놈이 더 이상 항거조차 못하게 위대한 전사들과 고귀한 초원의 귀족들을 모두 죽이고, 남은 것들은 자멸하도록 내몰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추방길을 걸어왔단 말이다. 이제는 식량조차 거의 바닥이 나서 정말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절망 밖에 없다.
이제는 더 돌아갈 곳도 없고, 살아갈 수단조차 없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앞으로 전진하는 것 밖에 없다. 막아서는 것은 그 무엇도 남겨두지 않고 싸우면서 나아갈 뿐이다. 설령 그 앞에 기다리는 것이 죽음일지라도. 그러니, 우리를 상대로 어설프게 막아낼 생각은 포기해라. 돌아가서 너희들의 상관과 황제에게 전해라. 우리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를 막아서는 그 어떤 것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청년의 기세는 사나웠다. 정말로 막아서는 것이 있다면 산이라도 무너뜨리고 갈 것처럼 절박하고 흉흉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기세에 동조하듯 그와 같이 따라온 수백명의 기마궁사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의 기세에 안드로니쿠스와 무라트는 더욱더 긴장된 자세로 무기를 단단히 잡았고, 요하네스 의원마저도 무기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바실은 그런 그들에게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너희들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 제국은 적의 위협에도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무기를 들고 무도한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 호락호락하게 굴복할 정도로 제국은 나약하지 않다. 제국은 결코 무례한 침입자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남은 것은 개죽음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활을 들고 화살을 시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드로니쿠스는 몸을 던져서라도 막을 생각으로 대기하라던 바실의 명령에 불복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제국은 지치고 상처입고 돌아갈 집을 잃은 약자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만약, 제국의 영내에서 제국법을 준수하고, 제국민들의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황실에 충성할 것을 약속한다면 제국은 길 잃은 어린 양을 외면하지 않고 품에 보듬을 것이다. 갈곳을 잃은 노약자들을 향해 온정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제국은 나약하지 않다. 제국은 결코 그러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에게 묻겠다. 너희들은 누구냐? 화살을 겨눈 침략자들이냐? 자비를 필요로 하는 노약자들이냐?”
“뭐··· 뭐라고?!!!”
바이갈은 심하게 당황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바실의 뒤에 있던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실의 생각치도 못한 상대를 약자로 규정하고 그렇다면 온정의 손길을 내밀수도 있다는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요하네스 의원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맙소사··· 사자의 자식은 역시 사자로군. 예전에 황제와 쏙 빼닮았어.”
그리고, 그런 바실의 말에 바이갈은 잠시 혼란스러워 하더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허튼 소리!!! 그런 사탕 발림에 누가 넘어갈 줄 아느냐? 이미 우리는 킵차크에서 같은 수법에 경험했다. 마마이는 우리들의 족장과 귀족들을 화합을 하자는 핑계로 불러들여 모조리 몰살시켰다. 연회장에서 마마이는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병사들을 보내 우리 일족의 지도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단 말이다. 감히 그런 얕은 수법으로 우리를 속이려고 하다니. 우리가 그렇게 어리석게 보이더냐? 자신의 말에 책임질 수도 없는 변경 수비대의 애송이가 늘어놓은 속임수에 우리는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바실은 조금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 되었다. 뭔가 실마리를 찾았다는 표정으로 지으며 왠지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것 같은 바이갈에게 말했다.
“과연, 그대들이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군. 하지만, 이번에는 믿어도 좋다. 지금, 그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확실하게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니깐 말이다.”
“뭐? 그게 무슨··· 네 까짓 놈이 뭐라고···”
“내 이름은 바실레이오스 카르브나.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이며, 카르브나 황실의 태자이며, 제국군 최고사령관이다. 나에게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과 의사결정권이 있다. 그리고 너희들의 의사에 따라 나는 너희들의 처우를 결정할 자격과 권리가 있노라. 이 정도면 너희들이 원하는 자격에 충분하지 않은가?”
바실의 말에 바이갈과 그들의 무리는 경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마··· 말도 안돼. 제국의 황제라면 틀림없이 콘스탄틴노플의 황궁에 있지, 이런 곳에 나타날리가··· 황제가 그럴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런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안드로니쿠스였다.
“무엄하다!!! 감히 의심을 하다니. 이분은 틀림없는 제국의 군신이신 바실레이오스 태자시다. 여기, 보라색 망토와 아퀼라 군기가 보이지 않느냐? 그리고, 그분을 호위하는 우리 바랑기안 근위대가 곧 이분이 제국에서 지고의 위치에 계신 분 바로 다음에 위치하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황제 폐하에게 예의를 갖추어라.”
그가 그렇게 소리치자, 바이갈과 그 동료들은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야,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황제라잖아? 지··· 진짜 황제가 온거야?”
“우리 어떻게 해야 해? 너 황제 본적 있어? 난 없는데. 원래 황제나 칸한테는 뭐 이것저것 예법도 많이 지키고 말도 조심해서 해야하고 뭐 그런다고 하지 않았나? 아오, 귀족 출신들이 다 죽어버려서 그걸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우야. 뭐야? 대체 왜 황제가 여기서 나와? 우리 어떻게 해야 해? 누가 좀 방법 제시해봐. 이럴때 어떻게 해야 해?”
그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그런 혼란을 보면서 안드로니쿠스는 조금 더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살짝 바실의 앞으로 나서며 더 크게 소리쳤다.
“어서 예의를 표하라!!! 유목민족들은 그 정도의 예의도 없느냐?”
“······!!!”
그의 말에 바이갈을 비롯한 그들은 일제히 당황하여 얼떨결에 예의를 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상황은 난장판이 벌어졌다. 손을 머리에 올리는 사람. 양손으로 모아쥐는 사람. 말에서 내려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 저마다 다른 부족의 사람들이 모인 오합지졸이어서 그런지 제대로 통일되지 못한 상황으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바실은 어느새 상대에게서 적대감과 긴장감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닥에 세번 머리를 조아리는 동료를 뜯어 말리는 바이갈을 보며 조금 웃어 보인 후 한손을 들어 군례를 한 다음에 말했다.
“방법은 다르지만, 그대들이 상대로 하여금 최소한 예의를 갖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기쁘군. 다시, 한번 소개하지. 제국의 공동황제인 바실레이오스다. 이 정도면, 그대들과 책임감을 가지고 대화를 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다시 한번 황제의 자격으로 묻겠다. 그대들은 제국을 침략하려는 도적들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난민들인가?”
“저··· 저희들은···”
어느새, 말은 경어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러나, 바이갈은 제대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몹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결정하지 못해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동료들의 시선은 그나마 그가 제일 나은지 모두 그에게 향해 있었고, 그는 그런 시선의 무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바실은 조금 웃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확실히,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 보아하니 그대들은 전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닌 그저 선발대인 모양이니깐. 그렇다면, 그대들의 의사를 듣기 위해서는 좀더 책임감을 가지고 대답해 줄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것이 맞겠지. 좋다. 만나도록 하겠다.그러니, 우리를 안내하도록 하라.”
“네? 안내하라고요? 누구를? 어디로? 에엑?!!! 설마, 지금 우리 난민들의 무리로 들어오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제 정신이십니까? 제국의 황제시여. 우리는 아직 우리의 거취를 결정하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는 당신의 적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마이는 그대들을 불러놓고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면서? 그렇다면, 그대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직접 내가 그대들의 품에 들어가는 것이 맞겠지. 그렇게 하면 그대들이 원하는 바와 진심을 좀더 솔직하게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가서 직접 만나도록 하겠다. 그대들의 지도자들을. 먼저 가서 그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한 곳에 모아주길 바라네. 그리고, 마침 시간도 딱 좋은 것 같으니 말이야.”
“시간? 무슨 시간이 좋다는 말입니까?”
그런 바이갈의 질문에 바실은 슬쩍 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의 시선은 저 너머에 예니체리가 가지고 있던 보급 수레와 닿아 있었다.
“점심시간. 배고프지 않나? 밥이나 같이 먹자고 전해주게. 우리가 한턱 내도록 하지.”
그리고 잠시 후, 초원에서는 거대한 흐름의 변화가 생겼다. 수십만 유목민 무리의 이동이 멈춰선 것이었다. 지평선 너머까지 가득 마차와 수레와 가축들과 사람들로 채워진 그들의 무리는 이동을 멈추고 초원에 여기저기에서 퍼질러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그나마 조금 큰 유목민족들의 천막인 게르가 세워졌다. 바실과 수행원들은 그곳으로 안내되었다. 오는 길에 바실은 대열에 속한 사람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요하네스 의원에게 말했다.
“정말로 아이들과 노인들, 여인들이 대부분이군요. 그리고 상당히 굶주리고 지치고 아픈 사람들이고요.”
“그렇군요. 크림에서 테마군만으로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한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한때 황금군단의 최정예를 담당하며,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들의 후예가 이 지경이 되다니. 킵차크의 내전이 예상 이상으로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바실은 그런 요하네스 의원의 정치적 분석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아이들의 굶주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바실은 깊은 한숨을 쉬며 무라트에게 명령했다.
“게르의 만찬은 일부 장교들만 보내서 준비하고 보급대장은 여기서 남으십시오. 가지고 온 바실리카에 보낼 보급물자를 이곳에 사람들 중에 시급히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일에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부담스러운 명령이실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부담스럽다뇨? 알라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 명령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예니체리들, 어서 물자를 하역하라. 그리고, 요리사는 국을 끓이고 악사들은 음악을 연주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라.”
그렇게 예니체리들이 보급품을 그들에게 배급하는 것을 보고 바실은 게르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조금 전에 봤던 바이갈을 비롯한 젊은 무사들이 있었고, 그들의 앞에 연배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들이 바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실은 그들을 보면서 아까와 마찬가지로 군례를 하였고,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예의를 표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 대표격으로 보이는 수염이 하얗게 샌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누추한 곳에 모셔서 송구스럽습니다. 제국의 황제 폐하. 저는 쥬르첸족의 선대 족장의 집사였던 퉁기스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장로의 자격으로 자리하였으나, 사실 그럴 자격이 있는 몸은 아니옵니다. 그저 나이가 많고, 나올 자격이 있는 고귀한 혈통의 후손들이 전부 살해당하여 대신 나온 변변치 않은 몸이옵니다. 그리고 여기 같이 나온 키타이, 훈, 나이만, 탄쿠트, 키르키즈, 위구르의 대표자들도 저와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천한 몸으로 황제 폐하를 뵙는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그대들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바실레이오스 카르브나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천하다 낮추시진 마시길 바랍니다. 그대들은 이 수십만 무리를 대표하여 나온 원로들이실 것이고, 지도자를 잃은 백성들을 이끌고 살곳을 찾아 이곳까지 인도한 공로자들이십니다. 제국은 그대들의 고국에서 논하던 신분의 차이를 가지고 비천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그저 시골 호밀밭을 가꾸던 집의 자식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과한 겸손은 그만두고 앞으로의 일에 이 수많은 백성들을 대표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바실의 그런 말에 유목민족들의 원로들 십여명은 조금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수많은 백성들의 거취를 책임지고 결정하라는 말에 그들은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는 듯 하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을 회피하지는 않고 그들은 차분하게 바실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마침, 그들의 앞에 예니체리 수석요리사들이 준비한 소박한 식사가 놓여졌고, 바실과 다르지 않은 메뉴에 그들은 조금 마음의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크게 망설이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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