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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지 않으신다고 하시더라.”
“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부터 계속 중요한 의사 결정들을 해야 하는데, 만나지 않으시겠다니?”
“너 같으면 그런 일을 겪고 만나고 싶으시겠니? 세자께서는 아직도 침대 끙끙 않고 계신다.”
그 앓고 있는 것이, 아파서에요? 아니면 창피해서에요? 어느 쪽이든 엉덩이를 부여 쥐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할 것 같지만.
잠시, 빈정거림을 뒤로 하고, 나는 내게 통보하는 시녀장님의 말에 어이없음을 느꼈다.
아니, 아무리 지난 번에 겪은 일이 일반인이 일생 겪기 힘든 끔찍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국왕이야 그렇다 치고, 왕세자도 부상이라 치자. 그럼 공작님이라도 나오셔야 하는데, 그 마저도 없이 대신 나를 맞은 것은 시녀장님이었다.
점점 실망이 쌓여가는 우리 왕가였다. 그러다, 문득 나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마고 공주는?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콘스탄틴노플의 내 전용 알현실보다는 다소 조악한 느낌이 드는 부다페스트 왕궁의 회의실.
음습한 느낌을 주는 돌기둥 그림자 사이에 어디선가 그녀가 듣고 있는 걸까?
충분히 그럴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조금 긴장하며 언행을 주의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정황 상 시녀장님에게 통해서 들어가는 말은 다 그녀에게 넘어가긴 하겠지만.
결국, 나는 고국에 돌아와도 예전에 황궁에 있던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 어이없음을 느꼈고, 그런 나를 보며 시녀장님은 책망하듯 말하셨다.
“네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는 알고 있느냐? 아르파드 왕가의 역사에 이런 모욕은 처음 일 것이다.
앙주 왕조가 잠시 헝가리를 지배하던 시절에도 이런 수모는 없었거늘.”
“그럼, 애초에 저한테 좀 잘해주셨으면 아무 일이 없었잖습니까? 그리고, 제국에도 빌미를 잡힐 일은 하지 마시고요.
직접 콘스탄틴노플에서 공작님이랑 같이 죽을 뻔 하시고서도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십니까?
뭔가, 고귀하신 분들이 감당하기 힘든 수모에 분개하시는 기분은 이해합니다만, 이제는 현실을 좀 직시하세요. 제국을 감당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너를 보낸 것이 아니더냐?
너야 말로, 네가 막아야 할 일이 윗분들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자각이 없더냐?”
말을 해서 뭐해. 들어먹지를 않는데. 나는 그러고서도 한참 동안 이어진 잔소리에 넌더리를 내면서 속으로 삭혔다.
그렇게 한참을 다시 의미없는 질타를 가하신 시녀장님은 조금 분이 풀렸는지 이렇게 말하셨다.
“아무튼, 그래서 당분간 윗분들은 직접 너와 만나실 생각이 없으시다고 하셨다.
앞으로 여기서 해야 하는 일들과 상의해야 할 것들은 전부 나를 통해서 보고하고 재가를 받으라고 하셨다.
나도 내키지는 않지만, 그게 명령이다. 그러니, 일단 오늘 찾아온 용건부터 말해라. 무슨 일이냐?”
“군사령부의 거점을 둘 곳을 결정해 주십시오.”
“그런 중대한 군사 관련 이슈를 그렇게 간단히 나한테 정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시녀장님한테 말하라면서요!!!”
환장할 것 같은 상황이 다시 이어졌다. 오늘의 용건이 그랬다.
헝가리군 재건위원회의 위원장 겸 제국 측 전권대사로 부임한 내 임무는 당연히 헝가리군을 재건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마도 의문이 들 것이다. 헝가리군 재건? 우리나라에 군이 없었나?
물론 그렇지는 않다. 당연히 어느 나라가 그렇듯이 우리 헝가리에도 강하지는 않지만 기존 군대는 존재한다.
문제는, 이 군대가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그렇지.
지난번에 언젠가 언급했다시피, 제국군은 과거에는 상당히 엉망이었다가, 카르브나 황조가 들어서고 나서 바실의 주도하에 상당히 강력하게 재편되었다.
비잔티움의 전통 군대 편제인 중앙군 타그마타, 지방군 테마, 근위대 바랑기안, 그리고 해군을 상당히 완벽하게 복원하였다.
그래서, 중앙에서 임명한 스트라테고스가 지휘하는 테마가 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중앙군인 타그마타가 적에 대한 공격을 담당하는 보완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거기에 바실은 공격과 방어의 축인 타그마타와 테마에 한가지를 더했다. 바로 보조군 아욱실리아였다.
용병, 단기편성 부대, 특수목적 TF, 의용군, 민병대 등 기존 체계에 반영하기 힘든 여분의 병력을 아욱실리아라는 다소 자유로운 편제로 편성한 것이다.
그래서, 테마의 방어와 타그마타의 공격에 어느 쪽이든 능동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하여, 제국군의 전투 역량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그건 동시에 과거 빈번하게 발생했던 군사령관의 반란 통제에도 용이했다.
어느 한쪽이 반란이 나면, 과거에는 특성이 치우쳐진 한쪽이 고전하며 진압해야 했지만, 지금은 두 곳이 유기적이고 능동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3개의 축으로 완벽하게 중앙 통제가 가능한 군대 운영을 통해, 카르브나 황조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수천년간 축적된 무시무시한 제국의 행정력이 더해지면, 정말이지 무서운 저력을 가진 군대가 된다.
나 역시도, 사령부에 앉아 편안하게 방대한 제국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상황을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보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군대를 운용하는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헝가리의 군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봉건제에 기반한, 각 봉건 영주들이 소집한 병력이 전시에 집결하고, 평시에는 해산하는 징집병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딱히 뒤쳐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유럽 열강들은 다 이런 방식으로 군을 운용하는 것이 정상이니깐.
하지만, 현재의 제국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편제는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고 제국과 호흡을 맞추기 어렵다.
항상, 전시가 되어야만 구성이 가능하고, 병력 다수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병사도 아니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영주들 때문에 쉽게 모을 수도 없는 군대.
적국으로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동맹국으로서는 정상적인 합동 작전을 할 정도의 수준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래서, 제국이 헝가리에 종속국 자격을 해제하고, 동맹국으로 지위 격상을 하면서 요구한 조건이 그것이었다.
제국과 동등한 수준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최소한 유사한 교리를 가지고, 작전에 안정적인 신뢰를 줄 정도의 헝가리 상비군을 재편 및 구성하라.
그것을 위한 헝가리군 재건 위원회이고, 그 군정권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 어마어마한 과업이다.
제국도 솔직히, 카르브나 황조가 워낙에 괴상하고 유능한 놈들이 많아서 성공했지, 팔라이올로구스 황조 시절에는 태반이 용병에 지역 영주들의 사병이었다.
근데, 수천년간 행정력을 정비하고, 희대의 천재들이 나온 제국도 어렵게 해낸 걸, 이 막장 유목민의 후예인 우리 헝가리보고 해내라고?
듣고선 절대 불가능하다고 절망하는 내가 그나마 나은 사정이고, 그거 왜 해야 하냐고 하면서 지랄하는 아르파드 왕실이 더 심각했다.
그래, 뭐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지. 저 양반들이 보기에 저건 헝가리군이 아니라, 헝가리 내부에 제국군 2중대 정도로 보일테니깐.
그리고 그걸 설득해서 해내야 하는 것도··· 온전히 내 몫이었다. 아오, 눈물나.
그리고 그 생각만 해도 혈압 오르는 업무는 그 첫번째 단계부터, 난항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일단 시작을 하려면 거점부터 정하고 시작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공작님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체결되었다고는 하지만, 콘스탄틴노플 협정에 의거하면 헝가리 왕실은 관련 업무에 협조할 의무가 있다.
당연히 그 첫 시작이 되고, 기반이 되는 거점 지역에 대한 선정 및 제공의 의무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령부를 세울 장소를 물어보러 왔는데, 오자마자 보인 반응이 저런 것이었다.
어흑, 뒷목. 제국에서 사람 잡던 고질병이 왠지 모르게 고향에 돌아왔는데 더 심하게 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속에 열불이 나는 것을 감수하며 할일은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했고, 시녀장님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말하셨다.
“너도 알다시피,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잠시 기다려라. 윗분들에게 그에 대한 의사를 여쭤보고 올 테니.”
그렇게, 시녀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회의실을 나가셨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짜증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시녀장님은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오셨다.
어라? 윗선에서 그렇게 빨리 의사결정을 내리셨다고? 나는 의외의 상황에 조금 당황했다.
이게 뭐지? 왕실에서는 사실상 적국의 괴뢰부대 취급하는 군대를 편성할 중심지를 결정하는 일인데 이런 빠른 결단을 내린다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회의실 어디선가, 아니면 밖에서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나?
왠지 모르게,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제국에서는 황후께서도 내 업무 공간에 함부로 개입하거나 하진 않으셨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녀장님이 자리에 앉아서 말씀하셨다.
“윗분들에게 의사를 여쭤보고 왔다.”
“어디로 정하라고 하시던가요?”
“결정해 주지 않으셨다.”
“네. 네에? 그게 무슨 소리세요? 결정하지 않으셨다니? 이게 그렇게 안하시면 그만인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이없어 하는 나를 보며 시녀장님이 말씀하셨다.
“위에서는 도리어 네가 적절한 장소를 검토해서, 위에다 보고를 올리고 재가를 받으라고 하시더라.”
“네? 뭐, 뭐라고요?”
나는 이 개념없는 우리 윗선의 결정에 다시 한번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결정하기는 싫다. 하지만 안할 수는 없다. 그러니, 네가 정해서 나한테 보고해라. 내가 만족할 수준의 조건으로 올리면 승인해주마.
뭐, 이런 건가? 아오, 젠장할. 제국 내 최고 존엄이신 황후 마마도 이 정도로 관료들 괴롭히진 않으셨다.
이 무슨 전형적인 악덕무능상사? 무능이래도 어디처럼 허접하다고 비웃을 수도 없고.
기가 차는 가운데 시녀장님의 말씀이 이어지셨다.
“현재 헝가리와 제국의 정세를 잘 파악해서, 최대한 헝가리와 아르파드 왕실에 누가 되지 않는 곳을 올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결정은 윗분들이 내려주신 지침을 기반으로 1차로 내가 거른 다음에 보고하라고 하셨고.
그러니, 적절한 후보지들을 물색해서 보고를 올려라. 이미 말했다시피 왕가에서 납득하실 수 있는 수준의 장소여야 한다.”
속에 열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대놓고 제국의 입김이 닿은 헝가리군의 편성을 불쾌하게 여기는 아르파드 왕실이 어딘들 납득하실까?
그냥, 말이 좋아 납득이지, 사실상 무기한 질질 끄는 수준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러자,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거, 설마 내가 전에 공작님한테 대안이란답시고 내놓은 태업의 일환인가?
뭔가, 일을 질질 끄는 것에 대해서라면 확실히 저쪽이 나보다 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태업에 대해서도 마냥 느긋하게 할 상황이 아니라고요. 저쪽에서도 내 감시인이 붙었단 말이에요.
나랑 앙숙인 리키스카의 수장이 직접 내 근거리에서 날 감시해서 대놓고 티나게 태업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히 해봤자 어차피 씨알도 안먹히겠지?
나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지도 속에 나오는 헝가리 지역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후보지를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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