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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행군을 지시하셨다고요?”
“네, 그러셨죠. 틀림없이 태자께서 그러셨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거의 열걸음마다 한번씩 지도를 확인하면서 행군을 지휘하셨습니다. 안드로니쿠스 근위대장이 과하다고 지적하셨지만, 공녀께서 출발하기 전당부하신 내역이라고 철저하게 경로를 확인하면서 가셨었죠. 근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이 자식아!!! 제대로 맘 먹으면 할 수 있었잖아!!! 지금까지 일부러 길을 지 멋대로 가고 있었던 거였냐? 그리고 그랬던거면, 일관성을 좀 가지라고!!! 왜 갑자기 이런 때만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건데? 나는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영문을 몰라하는 전령과 크림의 귀족들에게 차마 그 이야기를 소리칠 수는 없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이고, 이 멍청한 바실아!!! 내가 너 살려주려고 한 짓이란 말이야. 그걸 평소랑 다른 짓을 해서 제 발로 더 깊숙히 사지로 들어가다니.
바실이 이끄는 지원부대의 소식을 전해온 것은 서로 다른 두개의 경로였다. 하나는 바실의 부대에 동행한 크림 측에서 붙여준 행군 안내인이 멀찌감치 뒤를 따르다가 적과 조우하자 뒤도 안돌아보고 줄행랑을 쳐서 돌아와서 알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드네프르 강에 정박하고 적들의 동향을 감시하던 크림 해군 분견대에서 다급하게 보낸 전령이었다. 그 중에 나는 먼저 도착한 행군 안내인이 전한 소식을 듣고 뒷목을 잡아 버린 것이었다.
아오, 가능한한 목적지인 바실리카에 늦게 도착시키려고 그 녀석에게 대외비라는 명목을 걸고 행군을 직접 맡기고 당부했는데, 그걸 되려 차분하게 길을 찾으라는 식으로 이해해서 신속하게 이동해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정말이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 할말을 잃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잠깐만··· 좋아, 예상치 못하게 바실이 제대로 길을 찾아갔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을 납득할 수는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바실이 정상적인 크림 측이 의도한 경로로 이동할 경우, 바실은 드네프르강의 연안에 위치한 바실리카 요새에 도달해야 하고, 그 뒤에 폭이 넓은 드네프르강을 우회하여 우측 여울로 도하를 한 유목민들의 진입으로, 바실리카 요새에서 고립되는 것이 시나리오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실이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들과 평원에서 조우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그 상황은 조금 늦게 도착한 크림 해군 분견대에서 보낸 전령이 전한 소식으로 인해 겨우 파악이 되었다.
“뭐,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들 유목민족들 수십만명이··· 예상했던 얕은 여울목으로 우회하지 않고 폭이 넓은 정면의 하류 쪽으로 무리해서 도하를 감행했다고요?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강폭이 넓어서 거의 호수처럼 보인다는 드네프르 강이라면서요? 거길 한두명도 아니고 수십만명이 도하를 감행했다고요?”
“그게 저희도 의문입니다. 보고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고요. 당연히 우회하면 나오는 좁은 여울목으로 이동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이곳 지리를 모르는 자들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들은 안전한 길을 택하지 않고 굳이 강폭이 넓은 곳을 도하하여 이동 시간을 단축하였습니다. 강에서 노략한 목재 운반용 바지 뗏목을 줄로 연결해서 부교를 만들고, 작은 배들은 직접 강을 오가면서 상당한 혼란을 겪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이 도하에 성공했습니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이 머저리들아. 그런 상황이면 강 위에서 떠있던 너희 해군 분견대가 견제 공격이라도 했어야 정상이잖아. 그걸 아무것도 안하고 멀뚱히 감탄해서 바라만 보고 있다가, 본부에 전령을 보내서 감동 먹은 사실을 보고하고 앉아 있냐? 정말이지 제대로 된 놈이 하나도 없어!!! 지들 상관들 닮아서 한심하기 짝이 없잖아!!! 저 유목민 놈들의 생각치도 못한 돌발행동에 더불어 네놈들의 직무 태만 덕분에 전황이 예상과 완전히 달라졌잖아?
드네프르강을 우회하느라 상당한 시간이 걸릴거라 생각했던 놈들은 예상 경로를 벗어나 정면 도하를 통해 곧바로 텅빈 바실리카를 점거하고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남진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들이 번 시간 덕분에 영문도 모르고 바실리카 요새에 보급을 하러가던 바실은 아무것도 없는 초원 한복판에서 녀석들 수십만명과 정면에서 조우해 버린 것이고. 상황은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크림의 귀족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치명적인 대형사고였다.
적당히 바실을 바실리카 요새에 고립시켜서 살짝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들자는 수준의 것을 아득히 초월해 버렸다. 아악!!! 이 미친 놈들아 이걸 대체 어떻게 할꺼야? 나는 경악해서 고개를 돌려 크림의 귀족들을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갑자기 자기들끼리 당황하고 있다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 자식들아···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이 없는 거냐? 지금 우리들 다 죽게 생겼단 말이야!!! 어서, 원군을 보내든 아니면 도망을 치던 결정을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런데, 그런 나의 경악과 그들의 혼선은 연이은 전령의 보고에 더 상황이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갑자기, 그들 유목민들의 이동이 멈췄다고요? 바실리카 쪽에 태자님과 조우한 위치에서 정지했다고요? 아니,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상황? 그럼 태자님의 상황은요? 지금 태자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그··· 그게,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 유목민들이 너무 많아서 근접해서 동향을 정찰하는 것이 도저히 무리입니다.”
“그런 말이 어딨어요? 그럼, 지금 대체 바실 태자님은 어디에?”
그리고 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 우리에게 들려온 것은 상당히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우리는 한참 후에야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그 경과는 우리를 더욱더 큰 혼란으로 빠뜨렸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전부 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아닌, 그 현장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이다.
“이게 대체 무슨···”
안드로니쿠스 근위대장은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상황에 말을 다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드네프르 강과 크림 사이에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평원위에서, 그 평원을 가득 채우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무리였다. 수십만의 기마민족들, 행군을 할 때 나라 하나가 이동한다는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듯 그들의 무리는 어마어마한 숫자였고 초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물론,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봐도 피로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가진 소지품과 장비들은 다들 숙청과 도하에 손상을 입었는지 제대로 된 것이 거의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거지꼴이 된 수십만의 난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안드로니쿠스가 데리고 온 바랑기안 근위대 1천과 보급부대인 예니체리 보조군 6천은 거대한 바다에 던져진 각설탕 수준으로 보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거기다, 그들은 초라한 행색에 반비례하듯이 대단히 신경질적인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어디라도 좋으니 당장 폭발할 것 같은 분노의 감정이 넘실대고 있었다. 아마도 마마이의 숙청과 드네프르강을 도하하면서 입은 피해와 고통이 그들을 순수한 증오와 분노에 몰아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경악하는 사이, 그들의 대열에 움직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수십만 군중들이 뒤섞인 중에 그들 중에 나름 싸울 수 있어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 서서히 앞으로 밀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합지졸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순식간에 대열의 전면에 모인 그들의 수는 거의 십만에 다다랐고, 다들 뒤따라오는 군중들보다 조금 속도를 높여서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병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안드로니쿠스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자각했다. 그래서, 그는 지체없이 그것을 실행했다. 그가 바실에게 소리쳤다.
“태자 마마!!! 지금 즉시 이곳을 이탈하셔야 합니다. 공녀가 가져온 크림 귀족들과의 협상안 대로, 그들이 요청한 작전대로 움직였던 우리가, 대체 어째서 이런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적들과 조우하였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알고 있고 해야만 하는 건, 당장 폐하를 후방으로 도피시켜야 한다는 것 뿐입니다. 어서, 움직이십시오. 우리 바랑기안 근위대와 예니체리 보조군이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러나, 바실은 그런 안드로니쿠스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보면서 바실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어. 그리고, 시간을 버는 것도 불가능해. 전부 다 경기병대야. 그리고 일생을 말에서 내리지 않는 자들이고. 설령 도망친다고 해도 금방 따라잡히고 말거야. 그리고 시간을 벌 보병들은 우회하면 그만이야. 도주는 불가능해.”
바실의 말에 안드로니쿠스는 경악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가온 무라트와 고문으로 동행했던 요하네스 의원의 모습도 창백하게 변했다. 요하네스 의원은 바실을 보고 말했다.
“그렇다면, 태자께서는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지난번 트빌리시 방어전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순식간에 적들에 손에 병력이 녹아내릴 것입니다. 무의미한 결론입니다. 차라리, 확률이 낮더라도 이번에는 도피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지금, 저들에게 당신이 잡히거나 살해당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니케포루스 1세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든 크롬의 사례가 반복되었다가는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큰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의원님. 말씀하신 대로 적들과의 교전이 무의미하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제 두개골이 술잔이 되서도 안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지금의 상황은 교전도 도주도 무의미한 절제절명의 상황이 아니라면, 저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군요.”
“그럼 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흔치 않게 요하네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요하네스의 질문에 바실은 고개를 돌려 다시 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조금 생각을 가다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네? 폐하라면··· 황제 폐하 말씀이십니까?”
“네, 황제 폐하, 저의 아버지···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중흥의 군주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요? 그리고 그때는 어떻게 하셨나요? 황좌에 선황들의 피가 말라붙지도 않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분은 어떻게 하셨나요?”
바실의 혼잣말 같은 말에 대답한 것은 안드로니쿠스였다.
“그··· 그야···. 여기저기 몸을 낮추시면서 힘을 기르시고선 기회가 오시기를 기다리셨죠. 하지만, 태자 마마,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저들은 황제가 몸을 낮춘다고 통할 상대가 아닙니다. 저들은 지금 그저 악에 받친 흉폭한 맹수 같은 놈들이란 말입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황제 폐하께서 하셨던 것이 통할리가···”
“물론, 통하지 않겠죠. 그렇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들은 아버지가 상대하셨던 황도의 귀족들이 아닌, 상처입고 굶주린 악에 받친 야수들··· 그런 자들에게 몸을 숙였다가는 목덜미를 물리는 것 밖에 얻을 결과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접근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그 방향은 같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도망치지도 못하고 싸울 의미도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정면에서 그들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고 다가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바실의 말에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리고 당황한 안드로니쿠스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는요? 그렇게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주시하고 다가간 다음에는요? 그 이후에는 대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리고 그의 말에 바실은 조금 김빠지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 하지 싶은데요?”
“태자 마마!!!!!!”
안드로니쿠스의 경악에 찬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바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바실은 조용히 근위대장과 보급대장에게 명령했다.
“저를 포함해서 총 10명만 따라오십시오. 나머지는 전원 여기서 대기 하세요. 그 어떤 돌발 대응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가만히 대기하고 있으십시오.”
그리고 바실은 열명 정도의 장교들과 요하네스 의원과 함께 대기하고 있는 부대를 뒤로 하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빠르지 않은 차분한 속도였다. 그러나, 근위대장을 비롯한 동행자들은 한걸음한걸음이 피가 마르는 행군처럼 느껴졌다. 눈앞에서 다가오는 거의 10만에 달하는 병력들을 향해서 그들은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지옥을 향해 걸어가는 망자들처럼. 어지간하다는 바랑기안 근위대도 두려움에 휩쌓였고, 예니체리들은 마음 속으로 알라의 이름을 외쳤다.
그렇게 바실이 대열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자, 잠시 후 적들의 반응이 조금 달라졌다. 앞으로 나서는 열명의 기마를 본 유목민족들의 선발대들은 서로 뭔가 신호를 하며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대열에 큰 동요가 발생했다. 선두로 다가오던 대규모의 부대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 가운데, 중앙에 있던 수백여명의 부대는 되려 속도를 높여서 바실을 향해 달려왔다. 유목민족 특유의 무장을 갖춘 수백명의 부대의 질주에 사람들은 긴장했다.
그리고 바실도 조금 굳은 표정으로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한걸음, 한걸음··· 점점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어느새 서로 30보도 안남은 거리로 가까워지자 그들은 일제히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급하게 멈춰 세웠다. 그러자, 말들이 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로 보이던 한 청년이 사나운 표정으로 활을 들고 화살을 시위에 올리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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