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2
“미안. 조금 늦었지?”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어? 근데, 쥴리아, 오늘 그 차림···”
“응? 뭐가 좀 이상한 가?”
순간 당황하는 율리아의 반응에, 마르탱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니, 너무··· 너무 예뻐서.”
“······!!!!!!”
순간, 광장에서 만난 두 남녀··· 아니, 남남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걸 조금 거리를 두고 숨어서 보며, 나는 혀를 찼다.
그래, 확실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 오늘 율리아의 모습은 제대로 힘준 차림이다.
청순의 여신이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수수한듯 하면서도 묘하게 청순함과 화사함이 빛나는 그런 요조 숙녀 분위기로 차려 입고 있었다.
그걸 멀리서 숨어서 보면서, 나는 절로 어이가 없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뭐?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그 사람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아? 에라이, 그럼 그런 식으로 말도 안되는 사기를 치는 건 괜찮고?
내가 살짝 짜증이 몰려오는 와중에, 두 사람은 자리를 근처의 카페로 옮겼다.
나는 은밀히 몸을 숨기고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훔쳐들었다.
“어떻게 무사했던 거야? 내가 선물해준 로사리오를 불탄 수용소에서 찾았어. 그리고 너희 어머니 시신도 확인했고.
당연히 나는 네가 거기서 죽었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대체 어떻게 무사했던 거야?”
“그건, 전부 엄마의 희생 덕분이었어. 기억하지? 엄마는 수용소에 실려오는 폐병이나 성병에 걸린 여자들을 동정했다는 걸.
하지만, 엄마도 조직에 협박에 뭘 도와줄 수는 없었지. 하지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어.
그래서, 그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조직이 무고한 여자들을 처분하는 날이 올 것을 걱정하셔서, 오랜 시간 몰래 수용실 밑에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셨어.”
“뭐, 뭐라고? 비밀 통로? 조직을 탈출할 생각을 하셨던 거야?”
“나도 몰랐어.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하지만 엄마 예상보다 너무 빨리 밀수 파벌의 사람들이 수용소에 들이닥쳤지.
엄마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가치가 없어진 여자들을 해칠 걸 알았지. 그래서, 그날 나와 여자들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주고, 그곳으로 도망치게 하셨어.
하지만, 누군가가 그곳에서 추격하는 걸 막아야만 했지. 그걸, 엄마가 하셨어.
모두를 탈주하게 하고, 혼자 통로가 있던 방문을 걸어잠그고 버티셨던 거야. 다급해진 밀수 파벌의 주먹들은 수용소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고.
그래서, 엄마의 희생 덕분에 나와 거기 남겨진 누나들은 겨우 목숨을 건지고 달아날 수 있었어.”
“맙소사··· 흐윽, 아주머니가···”
잠시, 율리아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살짝 머쓱해졌다.
나름 놀려먹을 생각도 좀 겸해서 따라나왔는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너무 무겁잖아? 그리고 이름도 모를 그 어머니의 희생이 너무 숭고하다.
자식과 같은 처지의 여자들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시다니. 나, 이런거 너무 흥미로 엿들어도 되나? 마르탱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복수할 마음이 가득했었지. 하지만, 일단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 당부도 그랬고, 너와의 약속도 있었고. 그리고 거동도 힘겨운 같이 탈출한 누나들도 내가 돌봐야 할 상황이어서, 정신이 없었지.
그래서, 겨우겨우 우스타샤의 눈을 피해서, 그들의 세력의 손이 안닿는 수녀원에 의탁했지.
몇몇 누나들이 숨을 거두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겨우 살아서, 일부는 수녀원에 들어가고, 일부는 농가에 자리잡게 되었지.
겨우, 상황이 괜찮아져서 나는 너를 찾으러 라구사에 몰래 찾아갔어. 그리고 놀라운 소식을 들었어.
창관 파벌과 밀수 파벌이 둘다 우스타샤의 정보 파벌 출신의 새로운 보스 손에 몰살당하고, 조직이 더 악랄해졌다고 하더라.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시신 확인도 못할 끔찍한 형상으로 살해당했다고 들었어.
그리고, 그 중에 다수는 창관 파벌의 창부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들었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수소문했는데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어.
우스타샤에 쥴리아라는 창부는 오직 보스의 애첩인 La dolce vita의 쥴리아 밖에 없다고.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네가 그 내분의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 속에 있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었어.”
“에? 잠깐만. 근데 왜 La dolce vita의 쥴리아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야?”
“응? 그야··· 보스의 애첩인 쥴리아는 엄청 요염하고 가슴이 풍만한 여자라고 들어서 그랬는데? 응? 설마 그거 너였어?”
순간,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아, 저 년. 거기 뭔가 잔뜩 채워놓고 다녔었냐? 그리고 그것 때문에 첫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그 시기에 우스타샤를 쓸어버린 정보 파벌 보스라면··· 너잖아. 사연치고는 되게 웃픈 사연일세. 그녀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마르탱에게 말했다.
“아하하. 그럴리가. 내가 그런 무시무시한 사람일리가 없잖아?
나는 창관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건강이 안좋았고, 그래서 개자식들은 나를 다른 곳에 팔았어. 그래서, 그후로는 창부가 아니라 하녀로 여기저기를 전전하게 됐지.
다행히도 운이 좋았는지, 지금은 좋은 주인 만나서 그럭저럭 살만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네 소식을 듣고도 라구사에는 돌아가지 못했어.”
“그랬구나. 그래, 차라리 오지 않았던 것이 현명했어. 라구사는 그 후로도 난리가 아니었으니깐.
특히나, 최근에 라구사는 아까 말한 그 우스타샤의 새로운 보스가 머저리 같은 짓을 해서 완전히 박살이 났어. 그리고 우스타샤도 산산조각이 났지.
그 정신나간 보스도 제국에 끌려가 토막이 났다고 하더라. 그 미친 자에게 휘말리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야.”
마르탱, 쟤 혹시 저 년이 그 토막난 보스인 거 아는 거 아냐?
뭔가 합리적 의심이 드는 당사자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율리아는 잠시 삐질거리다 말했다.
“그랬구나. 그렇다면 정말로 다행이네. 그리고, 너도 그런 소동에 휘말리지 않고, 이렇게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럼,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설마, 계속 라구사에서 맴돌기만 하진 않았을 것 같고.”
“아, 맞아.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너무 슬퍼서 한동안 아무것도 못했지.
하지만 그렇게 좌절하고만 있으면 하늘에 계신 엄마와 네가 가슴 아파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마음을 추스리고 일어섰지.
운이 좋게, 수녀원의 주선으로 제노바 쪽 상회의 경리 보조로 일하게 되었어.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베니스가 몰락하고, 라구사가 휘청거리면서 일거리가 많아지고, 내 실적도 잘 나와서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어.
그래서, 이번에 헝가리에 처리하러 온 일만 잘 마무리되면, 아마 런던 지사에 간부급으로 승진해서 가게 될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하늘에서 너희 어머니가 널 보시면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실까? 진심으로 축하해.”
마르탱은 율리아의 말에 좀 멋쩍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하하하. 뭐 아직은 아니야. 부다페스트에서 좀 까다로운 일을 잘 처리해야 본사에서도 인정해 줄테니깐.
그리고, 사실 이 모든 것은 다 따지고 보면 네 덕분이지 뭐.”
“응? 내 덕분이라니?”
“잊어버린 거야? 그때 나에게 네가 가르쳐 줬잖아? 글쓰기와 수학을 쿨럭거리면서도 가르쳐 줬었잖아?
그리고, 우스타샤의 똘마니로 살고 싶지 않다면, 꾸준히 공부하라고 충고해줬고. 그 조언을 잊지 않고, 그 후로도 열심히 공부했어.
그래서, 지금 내가 이룬 것들은 다 네가 가르쳐주고, 독려해준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쥴리아.”
“아니, 내가 뭘 그렇게까지 했다고. 그냥, 앓고 있는 나를 돌봐주고 살 의지를 준 너의 행동에 최소한의 보답도 안되었을텐데.”
“아니야. 너였기에 가능했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오직 너만이 내 삶에 버팀목이 되어주었어.
그래서, 이렇게 살아서 다시 재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치 꿈만 같아. 주님께서 나에게 흔치 않게 축복을 내려주셨나봐.”
마르탱은 정말로 눈앞에 율리아가 마치 주님이 내려준 기적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마르탱의 반응이 좀 머쓱했는지, 율리아는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내가 너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어. 하지만, 그랬다면 정말 기뻐.
나 역시도 너의 의미가 내 삶을 이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니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인생을 지탱하는 지지대로 연결되어 있었구나.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고. 건배할까? 여기 주문이요.”
원동력은 원동력이었겠지. 복수심이나 증오만한 원동력도 없으니깐.
하지만, 숨어서 훔쳐 듣는 내가 더 이상 비아냥거리기 뭐할 정도로, 두 사람은 정말로 역경을 이겨내고 만난 연인처럼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보니 왠지 모르게, 더 이상 훔쳐들을 의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저 녀석이라면 내가 여기 숨어서 훔쳐듣고 있는 거 알고도 남을텐데, 굳이 의식도 하지 않고 화사하게 웃으며 대화에 빠져있다.
그리고 분위기는 뭐, 모략이나, 음모나, 정치 같은 우리 일상과 무관한 청춘남녀의 훈훈한 분위기고.
그걸 보니, 왠지 모르게 현명해지는 기분 같은 것이 드는 것이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지들끼리 좋아서 난리인 걸 훔쳐보고 앉았냐?
살짝 장난질을 칠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의 데이트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들키지 않게 살그머니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그래, 즐거운 시간 보내라. 이 웬수야.
율리아가 대사관 숙소에 돌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
나는 왠지 늦어지는 것을 보고, 와씨, 이 기집애 만난지 두번째 만에 선 씨게 넘네, 라고 생각하면서 놀려먹을 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쯤에 녀석이 돌아온 것이다. 호오, 그래도 아주 성을 쌓지는 않으신 모양일세.
그렇다면, 원래 그런 스위트한 데이트에 다녀온 년을 국문하는 것은 여자들의 사회의 국룰이지.
낮에는 봐줬지만, 밤에는 알짤없다. 나는 기운을 잔뜩 담아서 녀석에게 말했다.
“와우! 우리의 사랑스럽고 청순한 쥴리아! 첫사랑과 즐거운 데이트 즐기고 오셨나?
그렇다면, 그 자초지종은 대화의 다이알로그 수준으로 상세히 보고하는 것이 리키스카 수장으로서의 본분이겠지? 읊어보셔.
운명으로 연결된 지지대 소년과의 스위트한 대화를 말이야. 응? 근데, 너 표정이 왜 이래?”
내가 키득거리다가 당황할 정도로 율리아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좀 과장보태서, 니케포루스가 자기 아버지 아니란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도 조금 더 참담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때는 다행인 상황이었나?
아무튼, 그녀의 표정이 결코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이야기 하기 싫어, 미리 선수치나 했는데, 그런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녀석이 말했다.
“나 완전히 망했어.”
“엥? 망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마르탱에게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설마··· 다른 연인이 있는 거야? 맙소사.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제노바 무역 상회의 인정받는 젊은 경리라면 괜찮은 신랑감이니.
아니, 아예 유부남인거야? 설마, 처자식이 있는 거였어? 안나 황녀님을 황후 마마 핑계로 방치한 황제처럼?”
나의 말에 율리아는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어디다가 그 븅신을 마르탱에 엮어!!! 그런 말같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마! 오히려 그 반대야.”
“어휴. 깜짝 놀랐네. 난 또 유부남이 개수작 부렸을까봐 식겁했었네. 그럼, 그건 아니라는 거지?
응? 근데··· 반대라니? 그건 무슨 뜻이야?”
나의 말에 율리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늘 아침 최고로 청순하게 손본 머리칼을 헝크러트렸다.
그리고 대단히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르탱이 그랬어. 자기와 같이 가지 않겠냐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같이 가자니?”
그러자 율리아가 소리쳤다.
“이 멍청아!!! 프로포즈 받았다고!!! 결혼해달라고 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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