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1
그것은 틀림없는 조지아 해방군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타마르 여왕 바로 그녀가 있었다. 뭐··· 뭐야!!! 대체 어떻게 그녀가 여기에 나타난거야? 해방군이 조금 전에 테마군에 궤멸되는 동안에도 나타나지도 않더니.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바실이 말했다.
“맙소사. 앙리는 우리가 그들을 속였다고 했지만, 사실은 속은 것은 우리 쪽인 모양입니다. 타마르 여왕이 우리를 기만했군요. 그녀는 앙리가 해방군을 함정에 빠뜨려 섬멸할 것을 예측하고도 그 계략에 일부러 넘어가 준 모양입니다. 승리한 이후에 대가를 지불해주는 것이 부담스러운 체첸 병사들을 아군에게 미끼로 던져줘서, 우리 손으로 그들을 섬멸하게 만들고 그 사이에 트빌리시 성이 텅 비기를 기다려서, 조지아 인으로 구성된 예하 부대를 이끌고 이곳을 함락할 생각이었던 겁니다.”
“뭐라고요? 하,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체첸 병사들을 전부 미끼로 넘겨주다뇨? 거의 병력의 7할도 넘을텐데. 그 전력을 미끼로 넘겨주고 전멸하면 아무런 전력이 남지 않게 되잖아요. 앙리가 이끄는 테마군이 체첸 병사들을 섬멸한 다음에 속은 것을 알고 트빌리시로 신속하게 복귀하면, 천여명 밖에 안남은 병력으로 그들을 대항할 수 있을리 없잖아요?”
“네, 확실히 여왕이 가진 조지아인으로 구성된 전력만으로는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이곳에는 이 전쟁을 한번에 뒤집을 역전의 수가 하나 있죠. 그녀는 그걸 노리는 겁니다. 앙리가 단 한방으로 조지아 해방군을 섬멸할 함정을 쳤듯이, 그녀도 단 한방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 한수를 둔 겁니다.”
“그··· 그게 뭔데요?”
나의 질문에 바실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로 저요.”
“······!!!”
나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맙소사. 이제야 전부 이해가 되었다. 타마르는 정말로 단 한수로 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도박을 한 것이다. 조지아를 해방한 이후 불편한 존재가 될 체첸 병사들을 우리 쪽에 미끼로 던져주고 죄다 전멸당하는 사이, 자신이 이끄는 조지아 출신 병사들을 데리고 트빌리시를 기습해서, 수도를 탈환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제국의 공동 황제 바실을 인질로 확보하려는 것이다. 지금 트빌리시에서는 앙리가 전병력을 남김없이 데리고 출동하여 방어할 병력이 전무했다. 그녀는 그 순간을 노렸던 것이다. 나는 기겁하여 바실에게 소리쳤다.
“태자님. 지금 당장 트빌리시를 탈출하셔야 합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해방군이 이미 트빌리시 시가지에 진입하고 왕궁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거리가 이미 너무 가까워요. 여기서 도주하면 곧바로 시선을 끌고 놈들에게 따라잡힐 것입니다.”
“하,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 계셨다가는 적들에게 붙잡히십니다. 그래서는 절대 안됩니다. 당신은 제국의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이며, 위대한 제국의 군신입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적들의 손에 넘어가면 제국은 끝장입니다.”
나의 말에 바실은 무거운 표정으로 왕궁 너머에서 밀려드는 해방군을 바라보았다. 병력은 대략 1,500명 정도. 체첸인들보다는 약하다는 조지아 병사들이지만, 나름 귀족출신 지원병이 많은지 장비와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앙리가 최소한의 병력조차 남기지 않고 모든 병력을 싹 긁어 모아 가서 전력이 전무한 상태다. 한마디로 곱게 포로가 되던가, 도망치다 포로가 되던가 두가지 선택지 밖에 없는 상황에서 바실은 세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싸우겠습니다.”
“네··· 네엣?!!!”
“공녀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후계자이자 공동 황제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저는, 황제는 수의를 더럽히지 않는다는 테오도라 황후의 교훈처럼, 도망치기 보다는 여기서 놈들을 맞아 싸우도록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판단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나신 두분이 보시기에 한심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는 이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싸우도록 하겠습니다. 할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놈들과 싸워서 시간을 벌어서, 급보를 듣고 테마군이 귀환할때까지 트빌리시 성과···”
그렇게 말하던 바실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여기 계신 사람들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바실의 예상치 못한 선택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뭐, 뭐야 이 녀석··· 지금 네가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설마하니, 적들의 손에 신변이 넘어가기라도 하면 그 결과는 누가 감당하라고? 하지만,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싸움에 임하겠다고 선언하는 바실의 모습은 내가 아는 우리집 막둥이가 아니라 정말로 제국의 공동 황제였다. 그래서, 내가 뭐라 할말을 잃고 있는데, 되려 요하네스 의원이 명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이게 왜 정치적으로 한심한 판단인가요? 이것이야 말로 진정 궁극의 정치적인 퍼포먼스 아닙니까? 위기에 빠진 성에, 고립된 황제가 도망치는 대신 남은 전력을 끌어모아, 사람들을 지키고 적을 막아낸다. 오오!!! 우리 황제의 위대한 헌신과 희생을 보라! 전설 속에나 나올 에피소드 아닙니까? 정치, 그거 별거 아닙니다.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질질 싸게 만들면 그것이 바로 정치죠. 저는 공동 황제의 결정이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대견하십니다. 어렵지만 고결한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요하네스가 저렇게 말하니, 나도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요하네스 의원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그 의견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저항하도록 하시죠. 부디, 태자께서 여기 있는 제국 측의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움직이도록 하죠. 사람들을 모아주세요. 원칙적으로는 위배되지만, 현장 지휘관이 부재인 관계로 제가 이곳 트빌리시 왕궁 방어전을 직접 지휘하겠습니다. 자, 시작하도록 하죠!!!”
그렇게 갑작스럽게 바실의 지휘하에 트빌리시 왕궁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바실은 해방군이 트빌리시 시가지로 진입하여 성벽과 관문을 장악하는 긴박한 시간 속에서 신속하게 왕궁의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트빌리시 시가지에서 쿠라강에 접한 언덕 위에 위치한 트빌리시 왕궁은 그 자체로도 방어 요새였다. 바실은 테마군이 귀환할때까지 왕궁에서 농성하며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집결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많이 회복한 부상병들과 성의 하인들과 그 외에 남겨진 장정들을 모아보니 300명 정도로군요. 좋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제 지휘하에 트빌리시 왕궁을 방어하도록 하겠습니다. 왕궁은 현재 외궁과 내궁으로 이뤄져 있죠. 우리 300명은 이제부터 외궁에서 건물의 지형을 이용하여 진입하려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상이 심각한 환자들과 노약자와 여자들은 내궁으로 피신하여 주십시오. 마리아 부인,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한밤 중에 갑자기 호출되어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등장한 마리아 앙겔로스는 갑작스러운 바실의 요청에 의외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곳의 안주인으로서, 피신해야 할 사람들은 제가 책임지고 외국으로 피신시키고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공동 황제께서는 적을 상대하는 것에 전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알리 집사님! 지금 당장 사람들을 내궁의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세요.”
그러자, 전에 내가 소개받은 적이 있는 강건한 체격의 흑인 남자, 알리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을 안내하여 내궁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하였다. 우와, 전에 봤을때는 거하게 한판 하시고 흐트러진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한밤중에 기습을 당했는데도 의외로 침착하네. 그리고 저 집사라는 흑인 양반도 생각보다 침착하게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나는, 여전히 귓가에 생생한 그녀가 내지른 야릇한 신음을 억지로 기억속에서 지우려 노력했다. 그리고 바실의 지시가 이어졌다.
“공녀님도 같이 내궁으로 피신하세요. 가서 마리아 부인을 도와드리도록 하십시오. 이곳의 안주인이시간 하지만, 이런 전쟁 같은 일에 익숙하지 않으실 부인을 공녀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저는 내궁에 적들의 공격이 들어가지 않도록 외궁에서 필사적으로 방어할 테니, 공녀님께서는 내궁을 마리아 부인과 같이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내궁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반드시 그곳을 지지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이 든든하군요. 그리고 요하네스 의원도 같이 피신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무슨, 그런 농담을··· 몸 멀쩡한 사내 자식이, 고작 의원이라는 흔해터진 직위 덕에 이런 일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죠. 저도 부족하나마 무기를 들고 공동 황제 폐하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못말리시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공녀님은 어서 피하세요.”
나는 바실의 필사적인 요청을 만류할 수 없었다. 남아 봤자 내가 도움이 될 것도 없는 것이 사실이니. 그래서, 나는 바실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부디, 무운을···”
나의 말에 바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리아 부인과 함께 부상자들과 여자들과 노약자들을 내궁으로 데리고 움직였다. 그리고 바실은 그 사이 사람들을 이끌고 외궁에 요소요소에 배치를 시작하였고, 그 때를 맞춰서 성벽과 성문을 장악한 해방군이 왕궁을 향해 진입을 시도했다. 그렇게, 이후 전설로 기록될 트빌리시 왕궁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크아아아악!!! 화살에 맞았다. 위야! 위에서 사격이 날아오고 있어. 저 난간에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거였어?”
“문을 부숴!!! 하나! 둘! 셋!!! 부숴졌다!!! 어? 어어어!!! 다들, 피해!!! 돌이 굴러내려온다!!! 대들보가 부숴져 있어.”
“밀지마!!! 앞으로 움직일 틈도 없다고!!! 어? 으아악!!! 안돼!!! 끓는 물이 쏟아져!!! 상단 배수구가 이런 용도로 사용되다니!!!”
내궁으로 사람들을 피신시킨 나는 한숨 돌린 다음 바깥의 형세가 궁금해서 내궁의 첨탑으로 올라갔다. 내궁을 감싸고 있는 외궁에서 벌어지는 방어전을 멀리 첨탑에서는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300 대 1,500이라는 절망적인 병력 차이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방어전을 현장에서 가까이 목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멀리서도 왠지 치열한 교전 현장의 상황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처절한 소리가 내궁에서도 생생하게 들릴만큼 크게 울려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통해 판단한 현장의 상황은 내가 전혀 생각치도 못한 것이었다. 지금 저 너머에서 아무도 생각치 못한 전설이 탄생하고 있었다.
“좋아요. 난간 위에 보낸 궁수 다섯명은 첨탑으로 철수하세요. 철수하면서 입구의 침목은 빼놓으시고요.”
“3명!!! 3명 예배당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에 굴뚝 후방에서 사격을 가하세요. 정확하게 20발만 사격하고 뒤로 빠지고요.”
“부상병 출신들 중에 부상이 많이 회복된 스무명은 근접병기를 들고 저를 따라오세요. 연회장에 고립된 공병과 궁병들을 공격합니다.”
절망적인 병력 차이에다가, 성벽과 시가지도 장악당해서 방어진지가 없는, 사실상 외궁에서 벌어진 건물 내 교전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순식간에 아군이 몰살당하고도 남았을 병력 차이였는데, 놀랍게도 정규군도 아닌 하인들과 부상병으로 급조된 병력이 되려 적군을 유린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이 벌어진 중심에 바실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집 막둥이나 카르브나 시골 소년이 아닌, 제국의 군신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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