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2
야심한 밤, 나는 라구사의 입구인 필레 게이트를 통해 이어진 라구사 성벽을 따라 밤 산책을 나섰다. 전체적인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성벽 곳곳에는 탑과 요새들이 중간중간에 이어져 라구사의 방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라면 경계가 삼엄했을 곳이지만, 평화 시기에는 한적한 산책길로 활용되어 군데군데 취객과 행인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성벽으로 연결된 탑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북서쪽의 민체타 탑에 도달했다.
깊은 밤이지만 달이 밝아 시야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성벽 위에서 보아도 압도적인 규모의 민체타 탑은 마치 어둠 속에 거인과도 같아 보였다. 그런 탑을 바라보며 내가 조금 일찍 왔나 생각하던 찰라, 탑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그곳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민체타탑의 발코니 같은 난간에 서서 머리에는 베일을 뒤집어쓴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창관에서 봤던 요염한 모습과도 다른 달빛을 등진 신비로운 모습에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휴, 지금 저 황녀로 짐작되는 여자는 여신 느낌이 나는 모습으로 도도하게 나를 내려다 보는데, 나는 지금 남장하고 무슨 광대 노름이냐? 뭔가 그런 생각을 하니 허탈한 기분과 동시에 지금의 어색한 상황에서 달리 할것도 없다는 생각이 같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한 이 상황에서 가능하면 가볍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기존에 잡아 둔 한량질을 계속 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어흠. 나왔군요, 쥴리아. 오오오··· 쥴리아. 그대의 이름은 왜 쥴리아인가요? 그대가 쥴리아가 아니라면···”
뭔가 잉글랜드 출신 창잡이들이나 할법한 헛소리 담은 한량의 말투로 대화를 시작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헛소리 집어치워. 그리고, 그 어설픈 남장도 집어치우고. 너 누구야? 정체를 밝혀!”
순간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남장이 들통났어? 의욕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목소리나 행동거지를 의심사지 않게 주의했는데? 특히나 여자들의 눈으로 봤을 때 남자로서 위화감을 느낄 짓을 하지 않도록 주의했는데? 그리고, 창관에서 봤을 때 보여주었던 요염하고 나긋나긋한 태도와 사뭇 다른 차가운 태도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여간내기가 아니다. 그렇게 한방 먹은 나는 순순히 가발을 벗고, 목소리를 정상적으로 내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신분을 속인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은 사실입니다. 저희는 팔라이올로구스의 마지막 후예를 찾는 사람입니다.”
나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그 후예를 찾는 건데? 공황위 시대에 추태만 거듭하다, 지옥으로 사라진 저주받은 그 가문을 지금 찾아서 뭘 하려고? 의미없는 짓은 그만두고 돌아가. 네가 제국의 적이든, 황제의 개든 상관없어. 그건 그냥 이제 썩어 문드러지고 더럽혀진 다음에 죽어 없어졌어. 그러니··· 괜히 변장하고 엄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돌아가.”
그녀의 말 속에서 여러가지 의미가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겪었을 가혹한 삶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녀가 보이는 태도가 충분히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경계심, 분노, 증오··· 여러가지가 뒤섞인 감정으로 나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그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궁금해 하던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초조함도 동시에 밀려왔다. 뭔가 회피하려는 그녀를 설득해서 증거를 찾아야 한다. 대체 어떻게? 그때 나의 지원군이 등장했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건이 단순히 팔라이올로구스 황가의 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율리아 팔라이올로구스라면, 당신은 카르브나 황실에서도 무관하다 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실이었다. 거리를 두고 상황을 숨어서 보라고 했는데, 그냥 자기 맘대로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서 모습을 드러내 버린 것이다. 아이고, 벌써 네가 등장하면 좀 상황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고. 그러나 바실은 내가 버벅거리는 상황이 답답했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런 바실의 모습에 쥴리아는 묘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너는··· 그때 저 사기꾼 여자의 뒤에 서있던 하인이로군. 역시, 네가 의사결정권자였구나. 그래,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서 혹시나 했는데 내 추측이 사실이었군. 좋아, 대화는 너와 하겠어. 근데, 그게 무슨 말이지? 카르브나 황실에서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당신이 율리아 팔라이올로구스라면, 어쩌면 당신은 팔라이올로구스의 마지막 혈통이자, 동시에 카르브나의 혈통일수도 있다고 우리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바실의 말에 그녀의 눈빛이 가늘게 변했다. 그리고 그녀가 바실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그 사실이 맞다면, 현재 카르브나의 후계자에게 해가 될수도 있는 존재를 찾아 여기까지 온 너는 누구냐? 그 후계자가 보낸 청소부더냐? 불화의 싹을 미리 제거하라고 보낸 황실의 단검이더냐?”
“아뇨. 저는 그저··· 잃어버린 누이를 찾아온 동생일 뿐입니다. 저는 바실레이오스 카르브나입니다.”
아악! 이 녀석이 저질러 버렸어. 자기 신분을 그렇게 간단히 발설하면 어떻게 해!!! 나는 경악하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런 바실의 말에 그녀가 휘청거렸다. 마치, 활에 맞은 사슴처럼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네··· 네가 바실레이오스라고? 네가 카르브나 황실의 정통 후계자이자, 제국의 군신으로 불리는 그 혈태자 바실레이오스라고?”
“쥬··· 쥴리아? 지금 위험합니다. 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면 그대로 추락할지도··· 어어어? 으아악!!!”
바실이 비명을 질렀다. 왜냐하면 쥴리아는 그의 말대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난간 밑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쥴리아를 보며 경악한 바실이 달려가 난간에서 떨어진 그녀를 받아냈다. 다행스럽게도 바닥에 충돌하기 전에 바실에게 구조된 그녀는 그대로 바실에게 안긴 모습이 되었고,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자 그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보··· 보지마!!! 내 얼굴을 보지마!!! 놔줘! 날 놓아줘!!!”
“쥬···쥴리아?”
그렇게 버둥거린 그녀는 바실의 품에서 벗어나서 성탑의 벽으로 몸을 기대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웅크렸다. 그것이 뭔가 모습을 감추려는 의도였다면 큰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리려고 몸부림쳤고, 그런 그녀를 바실이 다가가서 말했다.
“진정하세요. 대체 왜 갑자기···?”
“보지마. 제발 보지마. 다른 사람도 아닌··· 바실, 너만은 나를 보지 말아줘. 보여주고 싶지 않아. 이 추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필사적으로 구석으로 몸을 숨키며 울부짖었다. 내가 보았던 요염하고 신비롭고 오만한 모습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를 바실은 강압하지 않으려 신경쓰며 거리를 두고 다가가 그녀를 달래었다.
“제발 진정하세요.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혼란스러우신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디 지금은 정신을 차려주세요. 그리고, 말씀해 주세요. 당신은 정말로 율리아 팔라이올로구스인가요? 그리고··· 당신의 그런 반응을 보면··· 당신은 알고 있는 건가요? 당신과 카르브나 황실의 관계에 대해서? 대답해 주세요.”
한참을 설득하여야 했다. 그녀는 거의 울부짖으며 흐느꼈고 바실의 말에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뭔가 대단히 서럽고 원통한 흐느낌이 잦아들고, 바실의 끈기어린 설득이 조금은 들리기 시작하였는지 그녀는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도 그녀는 한참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뭔가 생각을 하는 듯이 보이던 그녀는 마침내 진정한 모습으로 바실에게 뭔가를 건내주었다. 그것은 흔한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였다.
“이···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이곳에 끌려와 노예로 팔리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와중에, 유일하게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 허락되었던 물건. 그 십자가의 끝을 돌리면 그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처럼 바실이 십자가의 끝을 돌리자, 그 십자가 안에 돌돌 말린 작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바실은 그것을 꺼내어 펼쳤고 나도 그것을 바실의 어께 넘어 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로서 나의 친애하는 율리아···
From 니키’
위의 문장은 종이가 불에 탔는지 문장의 앞뒤가 그을려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단어와 율리아라는 단어는 정확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니키라는 서명도. 틀림없는 황제의 필체였고, 아직까지도 사용하는 그의 비공식 서명이었다. 맙소사··· 이걸로 빼도 박도 못하게 확정이다. 우리는 마침내 율리아 황녀는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녀는 확고부동한 미친 황제의 장녀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나와 바실이 확인한 사실에 놀라는 사이에 그녀가 다시 흐느꼈다.
“차라리··· 차라리 오지 않았다면 좋았으련만··· 지금 이렇게··· 라구사의 시궁창에 떨어져서 더럽혀진 그대로 살아가게 내버려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늦어 버렸어. 너무 늦어 버렸다고··· 차라리 희망마저 주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왜 지금에서야? 이제 더는 돌아갈수도 없을 만큼 나락에 떨어진 다음에 와서 뭘 어쩌라고!!! 흑흑흑···”
“누··· 누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할 수 없었다면 저라도 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그런 사실이 존재하는 것조차 모르고 이제서야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실은 흐느끼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바실의 품에 안겨서 더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마치, 상처입은 짐승처럼.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고통에 공감하듯 바실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서로 엇갈린 운명으로 살아가다 다시 마주한 두 남매의 모습에 부외자로서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환한 달빛이 라구사의 민체타탑의 그림자도 어느새 사라지게 만든 밤에, 우리는 여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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