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2
보고 겸 알현을 마치고 왕궁을 나왔다. 한참 동안 격분한 마고 공주가 날뛰는 것을 시녀들이 만류하느라 난장판이 벌어졌다.
에고. 정말로 나 공주님한테 무슨 악의는 없는데, 본의 아니게 이렇게 되서 유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거지로 받아온 예산 서류와 수리비 청구서 서명은 봉투에 고이 잘 담아서 밖으로 나왔다. 겨우, 왕궁에서의 용건을 마쳤다.
나와보니 시간은 이미 오후 느즈막한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차피 세게드로 귀환은 오늘은 무리였고
오늘은 부다페스트 제국 대사관에서 투숙하고, 내일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묘하게 시간도 남아서 나는 마차를 먼저 보내고, 부다페스트의 거리를 걸었다.
콘스탄틴노플만큼 거대한 도시는 아니지만, 그래도 봄기운을 담은 풍경이 아기자기하게 좋았다.
그래서, 그 분홍빛으로 물든 도시에서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든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골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 녀석을 데려가야 하기에 나는 어느 도시에나 존재하는 어두운 뒷골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제발, 좀 조용히 있었기를.
그런데, 의외로 본격적으로 홍등가에 들어서기 전에 녀석과 만났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셔서, 이만 실례를···”
“저, 저기! 이름이라도 좀···”
“나중에 인연이 되면 그때 가르쳐 드릴게요. 어머나?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죄송해요,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홍등가를 접어들기 전, 시장 골목에서 녀석은 나에게 화사하게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손에는 여기저기서 받은 것으로 보이는 꽃과 선물 같은 것을 잔뜩 들고.
그리고 달려와 내게 팔짱을 끼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극혐했고 주변을 의식해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나지막하게 녀석에게 말했다.
“이건 또 뭐하는 개수작이냐? 충분히 뿌리칠 수 있으면서 괜히 나한테 들러붙지 마.”
“거참 까칠하네. 뭐, 네 면상으로는 거리에서 따라오는 남자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의외로 이것도 떨궈내기 힘든 고역이라고. 좀 돕고 살자.”
“애초에 네가 이런 말같지도 않은 사기 변장을 안했으면 되는 거잖아? 당장 화장 지우고 복장 갈아입어!”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 녀석을 바라보고, 원망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는 어떤 머저리를 쏘아보고 물리친 다음에 녀석에게 말했다.
하지만, 녀석은 왠지 그런 나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뭐, 그러고 싶어도 말이지. 왠지 나라면 중성적인 모습으로 있어도, 따라오는 남자들이 없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오히려 더 위험한 취향인 녀석들이 달라붙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어? 오늘 하루 잠깐 거리만 걸어도 이 몸을 가만히 두지를 않으니 말이야.
헝가리 남자들도 생각보다 쉽더라. 쩌는 지도 한번 시험해 볼까 봐.”
“어후, 짜증나. 이 가식과 거짓으로 가득찬 인생아. 그렇게 살고 싶으냐 정말? 네 인생에 진실이나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을지 참 의문이다.
“훗! 그딴 뜨뜨미지근한 것을 내가 남겨 뒀을리가 없잖아? 라구사의 그 시궁창에서 말이야.”
녀석의 말에 나는 살짝 멈칫했다. 라구사의 지하 하수도에 그 시궁창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냥 잠시 뛰어다녔는데도, 그곳의 풍경은 살벌했지. 확실히 거기서 녀석이 겪은 경험이라면 사람이 삐뚫어지는 것도 수긍할 수 밖에 없으려나?
그래서 대놓고 짜증을 부리지 못하자, 녀석은 오히려 나를 도발하듯이 키득거렸다.
“어이쿠, 갑자기 또 왜 이러실까? 누군가의 싸구려 불행담을 떠올리니 좀 동정심이 사무치시나?
그딴 거 때려치워라. 그 인생 파탄에 일조한 공범년아. 괜히 방해만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너한테 동정까지 살 이유는 없거든.
아, 물론 내 매력에 빠져 헤롱거리는 녀석들을 보며 내가 부러워서 그러는 거면 할 수 없지만.”
찰라의 연민 취소. 역시나 이 자식은 구제할 수 없는 정신나간 녀석이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이 상황을 빨리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고 녀석은 나를 놀리듯이 따라오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녀석에게 홀려서 수작을 부리려는 놈들에, 우리 아가씨를 모셔야 해서 지금은 안된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아우! 이 지긋지긋한 자식. 빨리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 대사관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설마, 쥴리아?”
순간, 녀석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나도 당황하여 멈춰섰다. 쥴리아?
녀석이 라구사에서 창부로 일하면서 썼고 지금도 가명으로 애용하는 그 예명? 갑자기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있는 것은, 평범한 인상의 우리 또래의 얌전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큰 특징은 없는 청년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흔한 인상. 자세히 보니 약간 바실을 닮았나?
아무튼, 쥴리아라는 이름을 아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어두운 세상과는 무관해 보이는 선량한 인상의 젊은이였다. 뭐지? 나는 당황하여 율리아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놀랬다. 율리아가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엥? 이 자식 왜 이래?
녀석은 명백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녀석이라면, 사탄이 천년왕국을 세워 인류를 노예로 만들어도 사탄 꼬셔서 첩자리 하나 얻고도 남을 놈인데.
그 내가 인정하는 맛이 간 사고와 미친 정신력을 가졌던 녀석이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뭐야?
너 이러는 거 되게 어색해. 그런데, 그때였다. 율리아는 뭔가 기억을 더듬는 듯 고뇌하다가, 청년과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마르탱? 설마 마르탱이야?”
“그래. 나야. 마르탱.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살아있었구나. 쥴리아. 오오··· 주여, 감사합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정말로 그녀가 무사히 살아있었어요.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흐으윽···”
청년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율리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더니,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무릎 꿇고 주님께 감사하며 흐느꼈다.
그리고, 그런 청년을 율리아도 흐느끼며 머리를 감싸안고 말했다.
“나도, 나도 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나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하는 것 밖에 없었다.
대사관에 돌아온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기 숙소에 들어가서 침대 위에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뿐.
나는 문가에 기대고 서서, 문을 노크하며 녀석에게 말했다.
“이제 설명을 들을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신경 꺼. 개인적인 일이야.”
“아항! 그렇게 나오시겠다?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내일 그 총각 만나기로 했지? 거기 따라가서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히이이익!!!”
난 순식간에 내 목 사이로 파고든 녀석의 세검의 칼날에 식겁했다.
이 자식, 작정하고 칼 뽑으면 정말 무시무시한 속검이구나. 마취침을 던지는 것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
나는 죽을 것 같은 살기를 느끼고 녀석에게 소리쳤다.
“얌마! 협정 위반이야. 칼은 안쓰겠다며. 네 입으로 한 약속을 어길 생각이냐?
“마르탱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된다. 그러니, 그에게는 손가락 하나 건들 생각하지마. 원하는 대로 내가 설명해 줄테니깐.”
그렇세 말한 녀석은 검을 거두고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걸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오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만난 율리아와 마르탱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조금 진정이 된 마르탱은 율리아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때 율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 핑계를 댔다.
“아, 오늘은 좀··· 오늘은 내가 카밀라 아가씨를 모시고 나온 길이라, 지금은 곤란해. 아가씨에게 허락을 구하고 내일 여기서 다시 만나자.
카밀라 아가씨. 내일 잠시 자유 시간을 허락받을 수 있을까요?”
녀석의 행동에 입이 딱 벌어졌다. 녀석은 마치, 정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청순하기 그지없는 메이드처럼 나에게 간절하게 청원을 한 것이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지가 언제부터 나한테 눈치보고 허락받고 다녔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태클을 확 걸어버릴까 생각했는데, 녀석은 왠지 모르게 내 손을 붙들고 정말로 간절하게 부탁했다. 리액션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알겠다고 말하고, 그 마르탱이라는 청년에게 내일 보내줄 테니 다시 만나라고 말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돌아왔고, 나는 궁금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납도한 검을 내팽개치고 침대에 누워 손으로 이마를 짚은 녀석에게 커피를 한잔 내려 내밀면서 설명을 종용했다.
그리도 다행히 녀석은 순순히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거세당하고, 창관에 팔려서, 라구사의 시궁창에서 허우적거리던 그 지옥과도 같았던 시절,
아마도 유일하게 나를 위해서 순수하게 울어준 사람이다.
그때의 나에게는 오로지 아득한 절망 뿐이었다. 황실에 위협이 된다고 해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행복하게 살다 맛본 끔찍한 비극이었지.
하지만, 우스타샤의 사람장사꾼들은 그런 사정을 봐줄 놈들이 아니었지.
거세당한 고통이 아물기도 전에, 나는 역겹기 그지없는 창부로서의 역할을 강요당해야 했었지.
처음에는 반항했었다. 하지만, 거기서 자존심이나 존엄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몇일을 굶기고, 쉬지 않고 폭행을 가하면, 나중에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역겨운 자들의 생식기를 빨게 해달라고 사정하게 되지.
그렇게, 율리아노스 팔라이올로구스는 사라졌고, 쥴리아만이 남겨져서 비루한 생을 붙들고 있었지.
그렇게 내 정체성에 대한 체념을 하던 쯤에, 그나마 부여쥐고 있던 몸뚱이도 가치가 없어지는 사건이 생겼다.
폐결핵에 걸렸던 것이다.”
인상이 찡그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폐결핵은 그리 호락호락한 병은 아니다.
감기와 비슷해도, 전염이 너무 잘되서 발병한 사람은 반드시 고립된 장소에 격리해야 한다. 그리고 전염의 위험 속에 누군가가 간호를 해줘야 하고.
정상적인 사람도 폐결핵이 걸리면 전염에 격리에 간병으로 집안이 휘청이는데, 녀석이 처한 상황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지네.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것들을 꼽자면, 아마도 그 중에 하나로 틀림없이 폐결핵에 걸린 창부가 있을 것이다.
창관의 소유물로 매춘 밖에 못하는 비루함 몸뚱이가, 그 매춘을 못하게 되는 순간 창관은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대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철창이 달린 수레에 짐짝처럼 실려서, 보내지 말아달라고 사정하는 손길을 채찍으로 후려쳐서, 도시 외곽의 수용소로 보내지지.
그곳에는 철창이 달인 우리와 그 안에 감금된 폐병쟁이들 외에 아무것도 없다. 아! 종종 빨리 처리하지 않아 썪어가는 시신도 있었지.
거기서 환자는 나오지 못하고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신세에 처해지지.
바로 얼마전까지 예쁜 드레스와 고운 화장을 하고, 손님들에게 아양을 부리던 여자들이 거기서는 시체처럼 절규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다.
그곳에 나는 내던져졌다. 말은 거기서 요양을 하고, 몸이 나으면 다시 복귀하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복귀하는 창부는 거의 없었다.
라구사 도심지에 들어와 폐병을 손님들에게 전염시키지 말고, 그냥 거기서 죽으라는 의미였다.
너무 절망스러워 웃음이 다 나더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생만 연명하자는 의지로 역겨운 것들을 다 감내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폐병 수용소였지.
나는, 왜 이다지도 무가치한 생을 미리 포기하지 않았는지 후회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곳에서 그냥 누워 있었다. 주변에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여자들처럼 발광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지. 진통제도 없이 피 섞인 가래를 토하는 와중에 그것만이 차라리 구원이었으니깐.
그런데, 그런 나의 결심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바로, 마르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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