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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갑자기 황궁으로 전령을 통해 날아온 급한 소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뭐라고요? 스승님의 병환이 갑자기 깊어져서, 곧 임종하실 것 같다고요? 그리고 임종 직전에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당연히 찾아가 뵈야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공녀님, 죄송하지만 급히 가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동행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네. 물론입니다. 태자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당연히 수행해야죠. 근데, 어디로 가시나요?”
“테베입니다. 에파미논다스 스승님을 급하게 뵈러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네··· 엥? 뭐, 뭐라고요? 테베의 에파미논다스? 지금 저희 2천년 전으로 시간 여행하자는 거에요?”
그런 나의 오해는 여정을 출발하고 나서 조금 숨을 돌리고, 바실의 설명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었다.
“테베에서 에파미논다스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입니다. 아시다시피, 레욱트라 전투에서 사선진으로 스파르타를 물리친 명장 에파미논다스의 명성이 하도 유명해서, 그곳 사람들은 그 이름을 자식들에게 자랑스럽게 붙이곤 하죠. 그리고 반대로 테베를 박살낸 알렉산드로스는 금기시 되는 이름이고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저는 갑자기 수천년 전에 활약하신 그분을 만나러 가야 하는 줄 알고 심각하게 걱정했잖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제국에서는 워낙에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니··· 왠지 그 사람이 맞다고 해도 큰 위화감을 느끼지는 못했을지도? 그런 나의 핀잔에 바실은 머쓱해 하며 대답했다.
“오해를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의 스승님이셨던 에파미논다스님도 과거 레욱트라 전투의 명장인 에파미논다스님에 못지 않은 명장이시죠. 내전이 끝나고 제국군을 재건하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제국군의 통수권자가 되었지만, 그냥 시골 소년이던 저에게는 용병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신 여러 스승님들이 있으셨죠. 그 중에서 저에게 있어서 두번째로 많은 영향과 가르침을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에게 방어 전술과 용병 교리에 대한 대부분을 배웠죠. 간단히 말해 제가 구사하는 모든 용병의 기초를 만들어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뭐, 뭐라고? 서방 열강들이 식겁하고, 전쟁터를 악몽으로 만드는 혈태자 군사교리의 스승이라고?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니, 본적도 없는 그 양반의 존재감이 레욱트라의 에파미논다스보다 더 강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사람이 지금 임종을 앞두고 있다니. 이걸 우리 쪽에서는 좋은 일로 받아들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는 바실이 한 말 중에서 묘한 위화감이 드는 말을 떠올렸다. 두번째? 그럼 첫번째는? 나는 그것을 바실에게 물었다.
“대단하신 분이시군요. 그런데, 두번째라고요? 그럼··· 첫번째 스승님은 누구신가요?”
나의 질문에 바실은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시선을 흐리면서 대답했다.
“아, 첫번째요? 음··· 뭐,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 넘어가시죠.”
명백한 거짓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혈태자가 인정하는 첫번째 스승이 중요하지 않을리가 없잖아? 하지만, 바실은 그런 나의 의문을 슬며시 외면하며 흘려보내려는 모습을 보였고, 그래서 더 물어볼 수 없었다. 우와··· 미치도록 궁금하네. 대체, 누굴까? 바실이 나에게조차 정체를 숨겨야 할 정도의 신비에 둘러싸인 존재가?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고, 대신 바실은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에파미논다스 경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생겨난 의문에 대해서는 단념하고, 대신에 새롭게 생긴 의문을 그에게 물었다.
“그 정도의 거물급 군 관계자가 왜 군부에서 활약하지 않고 테베에 은거하며 살았냐고요? 아, 그건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실 군인이 아니라 성직자셨거든요.”
“성직자라고요? 정교회 사제셨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그런 분이 어쩌다가 태자님을 가르칠 정도의 용병술을? 더 의문이 생기는데요.”
“길었던 내전 덕분이었죠. 원래, 스승님은 젊은 시절 성지 예루살렘에 파견된 파견 성직자셨다더군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아크레가 맘루크에 넘어가고 나서 현지에 파견된 성직자들은 다들 오랜 전란에 시달리다 결국 귀환길에 오르게 되었죠. 성직자라고는 하지만, 당시 성지의 일대인 레반트에서 성직자들이 군인의 역할을 해야 할 상황은 비일비재했었죠. 그 과정에서 스승님은 본의 아니게 다양한 전장의 경험을 쌓으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스승님은 그 과정에서 군을 지휘하고 운용하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그 재능을 발휘하시게 되었죠. 레반트 지역과 다를바 없이 내전으로 인해 혼란으로 가득한 제국 여기저기에서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자들은 많았고, 사제 출신인 스승님은 의용병들을 지휘하셔서 힘없는 백성들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셨습니다. 그래서, 테베 일대에서는 내전 세력은 물론 베니스와 무슬림 해적들도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였죠. 그러한 이력 덕분에 내전 종식 이후, 저를 가르칠 스승들이 다들 내전 세력 출신이라 꺼려하는 와중에 흔치 않게 저의 스승이 되어주신 분이기도 하셨죠.
어쩌면, 지금의 제국의 군사적 안정에 기틀을 마련하신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십니다. 일생을 사제로서의 삶을 살며, 군인으로서 주어진 의무도 성실히 수행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무도한 자들을 막아내는 일에 전념하신 내전기의 영웅이자, 진정한 스승님이라 부를만한 분이죠. 제국이 안정을 찾은 이후 제가 여러 차례 높은 지위와 보상을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마다하고 고향의 수도원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계셨죠. 그런데 오랜만에 들어온 소식이 임종을 앞두고 계시다는 것일 줄이야. 제자로서 죄송스러움을 느낍니다.”
“흐음···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태자께서 자책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임종 전에 태자님을 뵙고 싶다는 말을 전하셨다니, 스승께서는 틀림없이 자신이 키워낸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슬픈 얼굴이 아닌 당당한 모습으로 그분에게 안심을 시켜드리세요.”
“현명한 조언 감사드립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러셔야죠. 근데··· 한가지 질문이 더 있습니다. 스승님의 임종이라 태자님이 가시는 건 잘 알겠는데···”
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근데, 이 사람들은 왜 가는거죠?”
나의 말에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근위대장과 카자크의 꼴통과 환관장은 일제히 소리쳤다.
“에파미논다스 경은 나한테도 스승님이야. 나도 바실이랑 같이 수업 들었다고.”
“아, 들어보니 서방의 전술전략에 고명하신 분이라고 해서··· 저도 형이랑 같이 동행해서 뵙고 싶어서 억지로 따라왔어요.”
“훗! 환관장의 할 일은 황제의 시중이다. 그러니, 공동황제가 가는 곳에 내가 가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사연들이야 다들 그럴 듯 했다. 지껄이는 놈들이 죄다 내 뒷목 브레이커들만 아니라면 말이다. 어쩌다 보니, 지난번 라구사 사건의 멤버에서 율리아까지 포함된 멤버가 테베로 가고 있는 상황에 나는 왠지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아아··· 왠지, 이 멤버는 멀쩡한 곳도 하루 안에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도 남을 구성들인데. 이번 방문 괜찮으려나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한숨을 쉬었고, 우리는 오래지 않아 항상 사용하던 카자크 파발을 통해 신속하게 테베에 도착했다. 에파미논다스 경의 거처는 테베 외곽에 위치한 어느 작은 수도원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군관계자들은 물론 테베의 유력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바실의 스승이 얼마나 존경받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실의 등장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길을 내어줬고, 우리는 그 길을 통해 에파미논다스 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방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의사와 수도사들은 바실에게 예를 표하고 자리를 피해주려는 듯 방에서 나갔고, 우리의 앞에는 병상과 그곳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노인만이 남았다. 그 노인이 바실을 보며 말했다.
“오오오··· 공동 황제 폐하. 와주셨군요. 다시 한번 폐하의 존안을 볼 수 있다니, 이는 주님의 은총이십니다.”
“너무 늦게 찾아 뵈어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좀더 자주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건강이 이토록 상하신 줄도 모른 불초 제자를 용서하시옵소서.”
“용서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생과 사는 오직 주님만이 결정하실 뿐···. 사제는 오직 그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곁에 가기 전에 장성하신 폐하의 존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이곳 궁벽한 테베에서도 멀리서 전해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저에게 배우신 용병술로 제국의 영광을 다시 찾아오시는 그 과정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만해지거나 잔혹해지지 않으시고 품위와 인정으로 제국에 군림하시는 것도 잘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제국의 쌍두독수리가 전장에 승리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다니··· 신, 에파미논다스는 그것만으로도 후회는 없사옵니다. 폐하, 이 제국의 오랜 혼란을 종식시키고 영광을 가져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폐하는 진정으로 저의 자랑스러운 제자십니다.”
에파미논다스의 말에 바실의 눈씨울이 촉촉해졌다. 하지만, 에파미논다스는 미소짓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자랑스러운 자식을 보는 아버지처럼 그는 바실을 대견해 하며 만족하고 있었다. 바실은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의 스승과 눈높이를 같이 하고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불초한 몸입니다. 그래서, 스승님께서 어서 건강을 회복하셔서 더 많은 가르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주님 곁에 간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고 기력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승님의 쾌유와 복귀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실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도 좀더 살아서 폐하께서 만들어가실 영광의 끝을 멀리서나마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몸은 제가 압니다. 아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미 충분히 살만큼 살았고, 내전 시기에 겪었던 절망을 보상받을 만큼, 영광스러운 결과를 말년에 목도했죠. 그러니··· 더는 여한은 없습니다. 제 삶은 이것으로 충분히 떳떳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그의 말에 바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노인은 이미 마음의 정리가 끝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바실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침울해하는 바실을 보던 에파미논다스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표정을 하고선 바실을 보면서 말하였다.
“공동 황제 폐하. 그런데, 한가지··· 제가 이렇게 폐하를 뵙기를 청한 것은 단 한가지··· 후회없는 삶이었다 생각하는 제 삶에 단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폐하에게 고해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염치없지만··· 이 늙은이의 후회를 들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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