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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차도 감쪽같이 속았다. 그 고상하고 청순하던 엠마 커루가··· 화려하고 드쎈 루시 해리스였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니··· 갑자기 왜 그녀의 소재가 그토록 파악하기 어려웠는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왜 당황했는지, 그리고 간단한 변장만으로 왜 그녀를 혼동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녀는 전형적인 거리의 창부의 이미지를 연출했던 것이다. 하지만 왜?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문에 빠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말을 통해 겨우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헨리 지킬. 나도 네 녀석은 지긋지긋해.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기만 하고 여자를 확 끌어잡는 매력도 없는 샌님. 그래서, 그 약혼을 원치 않은 것은 도리어 내 쪽이었어.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남자가 나타났지. 허영과 허세만 가득찬 이곳 아드리아노플에 광기와 야성미를 가지고 휘젓고 다니면서 숨막히는 사회를 조롱하는 짐승남. 그는 바로 에드워드 하이드였어. 너의 집 근처에서 그를 만나고 나는 한눈에 매료되어 버렸지. 헨리 지킬 같은 샌님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 빠져버렸어.
그래서, 어떻게든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 하지만, 그는 오로지 거리의 여인들만을 상대할 때만 나타나더군. 그래서, 위험해도 상관이 없으니, 그를 만나기 위해 거리의 여인으로 변장하고 그의 행적을 쫓았지.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처음에 한번 스치듯 만난 이후 다시 만날 수가 없었어. 그리고 당국도 수사를 시작해서 들키지 않고 돌아다니느라 더 만날 기회가 줄어들어 초조해졌지. 그러다, 결국 그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리키스카의 체포에 응해서 여기까지 온 것인데···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던 남자다운 남자, 에드워드 하이드가··· 설마, 헨리 지킬 너였던 거야? 이건, 말도 안돼!!!”
어, 음··· 그러니깐 정리해 보자. 그러니깐··· 원래 헨리 지킬과 엠마 커루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약혼자였다. 그래서 그 약혼 관계에 염증을 내고 그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우연히 서로의 변장한 모습인 에드워드 하이드와 루시 해리스를 보고서는··· 서로 동시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래서, 둘은 서로 만나고 싶어서 변장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다닌 거였고.
아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이제야 모든 의문이 명쾌하게 풀리··· 기는 개뿔이!!! 야, 이 정신나간 민폐 커플아. 지금 니들 뭐하는 짓이야? 니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고나 있는 거냐? 하지만, 그런 나의 절규와 무관하게 두 사람은 갑자기 서로의 세계에서만 따로 놀기 시작했다.
“난 엠마 커루가 싫어. 끔찍해. 하지만, 루시 해리스를 사랑해.”
“나도 마찬가지야. 헨리 지킬은 꼴도 보기 싫어. 하지만 에드워드 하이드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좋아,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서로 에드워드 하이드와 루시 해리스로 만나면 되는 거겠군.”
“오오!!! 그렇군. 나도 동의해. 그렇게 하면 모두가 만족할만한 결론이 나겠군.”
“그래, 큭큭큭··· 헨리 지킬은 잊어. 나는 에드워드 하이드. 너는 내 가련한 사냥감에 불과하지.”
“우후후··· 멋진 남자. 그래, 고상하고 얌전떠는 엠마는 잊어. 나는 루시 해리스. 우훗, 이 더럽고 거친 짐승 같으니. 우리 같이 놀아볼까?”
갑자기 벗긴 코스프레 복장 다시 뒤집어 쓴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 서로가 서로에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모든 관계자들은 다들 갑자기 두통에 시달릴 것 같은 기분에 휩쌓였다. 이게 뭐야.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지금, 우리는 그럼··· 이 정신나간 코스프레 커플의 막장 연애 행각에 죄다 놀아난 거야? 그리고 그런 하찮은 진실은 다수의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 분노는 곧바로 폭력으로 이어졌다. 율리아가 뒷목을 쥐고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리키스카의 요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두 커플을 밟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신나게 얻어터지면서도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이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소리쳤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네?!!!”
그렇게, 아드리아노플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에드워드 하이드 사건은 진상을 밝히는 것조차 민망한 결과로 사건 종결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여전히 뒷목이 땡기는 것을 느끼며 저택의 압수 수색에 입회하였다. 압수 수색 대상은 지킬 박사의 저택이었다. 율리아의 조사로 실종 사건이 길거리 여성들의 먹튀 사건으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정확한 진상 조사를 위해 저택의 수색은 필수적이었다. 헨리 지킬도 누명을 벗고 싶다고, 마음대로 찾아보라고 말하고 저택의 모든 열쇠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편하게 조사하라고 자신은 집을 비우고 나가기 까지 한 것이다. 물론, 나간 이유는···
“우후후후··· 거기 나의 아름다운 사냥감. 우리 같이 오늘 밤 조금 위험한 장난을 해보지 않겠나?”
“유후··· 나는 좀 비싼데, 괜찮겠어? 화대는 충분하신가? 짐승남?”
“나의 전재산을 주지. 너라면 그 정도는 아깝지 않으니, 베이비. 가자, 우리 애기. 오늘 어른의 장난을 하는 거야.”
“맙소사. 나 오늘 밤에 조금 천박하고 더럽게 놀고 싶어지는 걸? 핡아, 수캐!”
뭔가, 아드리아노플의 기인커플로 나름 장안의 화제인 모양이다. 뭐, 듣자하니 전에 루시로 착각하고 길바닥에 내팽겨친 여자한테도 찾아가서 제대로 사과하고 치료비 보상해 줬다나? 그리고 나서, 이제 정체 다 들켰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대낮에도 저렇게 코스프레하고 연애질하도 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엠마의 부친 커루 경은 뒷목잡고 쓰러지셨다는 후일담이 들리고. 그리고, 내심 상류층들의 사교계가 질식할 것 같은 건 그들만이 아니었는지, 그런 그들의 행각을 따라하는 카피캣 커플도 많이 생긴 모양이다. 이젠 나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역시 제국은 황도도 그렇고 제 2도시도 그렇고 다 같이 마굴이야.
아무튼, 그렇게 사건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민폐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개를 치는 와중에, 다 끝난 사건의 마무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심한 이 사건에 대해서 당장 자리를 뜨지 않고, 저택 수색에 참관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신나게 밟힌 두 커플에 대해서 진지하게 훈방조치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사건 관계자는 물론 불려온 아드리아노플의 고위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헨리 지킬에게 호된 질타를 날렸다. 그리고 그들은 별 생각이 없던 나에게도 한마디 해주기를 권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이 이미 험한 소리 많이 하셔서 저는 달리 더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몹시 실망스럽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정신의학의 권위자로 황실이 설립한 아포세카리 연대의 의료자문까지 역임한 지킬 가문의 수준이 겨우 이 정도라니. 황도로 돌아가면, 교수님의 자문역 해임을 건의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부친의 과장된 평가를 받은 연구도 다시 재검토하라고 청원할 것이고요. 그렇게 아십시오.”
그런데, 그때였다. 이전까지는 크게 혼이 나도 실실거리며 수긍하던 헨리 지킬이 갑자기 나의 말에 대해서는 정색하며 반박했다.
“공녀님, 제가 아버님의 명예를 먹칠한 한심한 놈인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은 멈춰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한심한 놈이지만, 제 아버지 토마스 지킬은 틀림없는 천재였습니다. 사실, 저는 못나서 아버지의 못다한 연구를 이어나가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더 살아계셨다면 틀림없이 하시던 연구를 완성하셨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는 그걸 완성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임종을 앞두고 워낙에 건강이 악화되셔서 저에게 그것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요. 그런 아버지의 연구를 제대로 해석할 엄두도 못내서, 그냥 역활 놀이의 소재로 쓴 제 잘못은 입이 두개라도 할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와 같이 싸잡아서 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연구를 폄하하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뭐라고요? 아버님이 그 연구를 거의 완성하셨다고요? 그 말로만 들었던, 약물 투여를 통한 ,인간의 겉표면에 드러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내면의 모습을 끌어낸다는 그 연구요?”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생전에 그것이 거의 완성을 앞두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 연구 기록과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어째서인지 저에게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아버지가 자기 손으로 임종 전에 소각해 버리셨더군요. 그래서, 그 연구를 이어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틀림없이 아버지는 그 연구를 거의 완성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그 증거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요.”
헨리 지킬의 말을 들으니 조금 호기심 같은 것이 생겨버린 것이다. 헨리 지킬의 증언과 갈레노스가 전해준 토마스 지킬의 임종 전의 모습. 하이드 소동을 보고선 나는 토마스 지킬도 어쩌면 비슷하게 역할 놀이 같은 것을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가 바보 같은 자기 자식이 저지른 일이 아닌, 정말로 실험 중에 보인 모습이 그거라면··· 그 정체 불명의 약물도 실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택을 수색하는 리키스카 요원들과 같이 내부를 돌아다니며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그의 유산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토마스 지킬이 연구실로 사용하였다던 지하실과 연결된 주방이었다. 연구실은 고용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헨리는 그곳을 열심히 뒤졌지만 그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연구실과 연결된 주방. 종종 고용인들을 불러 연구 중에 야식을 준비시키거나, 고용인이 퇴근하며 본인이 간식을 챙겨먹으로 나왔다는 그곳. 거기서 나는 기묘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건, 티타임에 내놓을 법한 사탕이었다. 거기까지는 큰 위화감이 없었다. 문제는 그곳이 놓인 위치였다.
그것은 왠지 모르게 키가 작은 여자 고용인들의 손에 닿지 않을 가장 높은 천장 깊숙한 곳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식재료는 고용인들이 구매하고, 티타임을 준비하는 것도 아마 고용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손에 닿기 쉬운 위치에 놔두는 것이 정상인데 왜 여기에? 설마, 이 사탕은 고용인들이 사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토마스 지킬이 만들어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닐까? 판매한 곳을 짐작할 수 없는 상자와 묘하게 투박한 완성도가 그런 의심을 거 강하게 만들어 줬다. 물론, 증거는 없다. 하지만, 묘한 의심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리키스카 지부장이 나에게 말을 걸 때 이미 그 사탕을 슬그머니 내 뒤로 숨기고 있었다.
“저택 수색은 거의 마쳤습니다. 예상대로 범죄의 흔적이나 기묘한 약물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거리의 여자들한테 호구잡힌 흔적은 다수 확인되더군요. 헨리 지킬은 그 여자들을 상대로 소송할 생각은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모르니 증거 자료로 보관해 둘까요?”
“아뇨. 괜찮을 것 같습니다. 범죄 증거가 없다면 그걸로 충분하죠. 이만, 사건의 마무리를 하도록 하시죠. 저도, 이만 황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도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부장님.”
“별 말씀을. 율리아 수장님은 기왕에 오신 김에 아드리아노플의 지부를 좀더 둘러보고 복귀하신다고 하시더군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공녀님.”
그렇게 우리는 작별하고, 나는 왠지 엮이면 엮일수록 한심한 기분만 늘어가는 아드리아노플에서 벗어나 황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느긋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품에 숨긴 것이 어쩌면 상당히 위험한 것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내 품에 든 상자에 사탕 12개. 정말로 이것이 토마스 지킬 교수가 완성한 인간의 표면에 드러난 모습과 다른 내면의 모습을 불러내는 물건이라면··· 이건 보통 중대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수많은 열강들의 정치 방향성을 뒤바꿀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약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꼭 간직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황궁에 내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황제 부부와 바실, 쿠타이에게 귀환 인사를 대충한 다음에 곧바로 그 약물을 들고 황실 주택의 창고로 들어갔다. 평소에는 들어오는 사람의 거의 없어서, 나만의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다. 거기서 나는 편한 의자를 펼치고 모래 시계를 준비했다. 지금부터 나는 이 약물이 정말로 그 토마스 지킬이 만든 약물이 맞는지 시험해볼 생각이다. 행여나 부작용이 끔찍하거나, 혹은 가짜 약물이라면 그걸 본국에 보고하고선 심하게 경을 칠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조금 위험하지만 내가 직접 시험해보는 수 밖에.
나는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크기가 제법 커서 하루 단위를 재는 시계였다. 그리고 의자에 안락하게 몸을 기대고 손에 넣은 사탕 하나를 들었다. 잠시, 심호흡과 마음의 준비. 그리고 나서···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했다. 그러나, 눈을 뜨고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실패작이었던 거야? 그럼 그렇지. 그 멍청이의 아버지가 아무리 천재라도 그런 말도 안되는 약물이 이 세상에 있을리가 없잖아.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쓸데없는 생각에 시간낭비를 한 것을 혀를 차며 일어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응? 히이이이익!!! 이, 이게 뭐야? 모래시계가··· 거의 다 떨어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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