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1
황실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다른 나라였으면, 뭔가 수많은 사람들이 호화로운 침실로 들어와 장엄하게 시작하는 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놈의 제국 황실은 그냥 적당히 잘사는 농가의 아침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계란이 프라이팬에 달궈지고, 오븐에 데워진 빵이 나오고, 큰 병에 절여둔 잼이 작은 접시에 덜어지고, 스프가 덜어지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하시는 것은 제국의 존엄하신 황후 마마셨고, 나와 쿠타이는 주방 조수로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7대 악마들이 기용되고 나서, 한가해진 시간을 이런 식으로 직접 가사를 챙기시는 황후 마마는, 주변에서 우회적으로 만류해도 이것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 역시도 왠지 헝가리의 공녀라기 보다는, 본업인 하녀가 거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며, 그 일상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그런 목가적이고 소박한 아침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아침 식사 준비를 마쳐가자 황후 마마께서 말씀하셨다.
“바실은 또 늦잠을 자는 모양이구나. 카밀라, 네가 가서 깨워오렴.”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2층의 바실의 방으로 올라갔다. 최근, 라구사 사건의 후속 업무로 좀 과로가 심했던 터라, 너무 곤히 자면 적당히 황후 마마에게 내버려 두시라고 말하고, 따로 아침을 챙겨줘야 하나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태자님. 일어나세요. 황후 마마께서··· 히이이익!!!”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광경에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바실은 내 예상대로 여전히 한밤 중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바실의 침대 머리 맡에, 속이 훤히 비춰 보이는 얇은 옷만 입은 율리아가 손으로 턱을 괴고 바실을 바라보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이··· 이 요물이 갑자기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리고 왜 옷차림은 뭔가 노린듯이 대놓고 속이 다 비춰보이는 상태고? 내가 뒤늦은 복수나 암살을 생각하며, 서둘러 소리를 지르거나 혹은 무기가 될 것을 챙기려는 찰라, 율리아가 먼저 나를 보고 짜증나는 표정으로 소근거렸다.
“쉿, 조용히. 바실이 깬다고. 곤히 자는 거 방해하지 말고, 바실은 내가 챙겨 보낼 테니 내려가서 일보셔.”
“당장, 두 손 들고 뒤로 물러서.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대체 태자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지만 그런 나의 반응에 율리아는 오히려 느긋한 반응으로 즐기듯이 대답했다.
“무슨 짓? 그야, 당연히 침소의 주인님의 시중을 들려고 하는 거지. 잊었어? 그는 나의 주인이고, 나는 그의 소유물이야. 그러니 그걸 하는 것이 당연하잖아.”
“네가 했던 짓이나, 네가 생겨 먹은 걸 보면, 어딜 봐도 암살 아니면 개수작으로 밖에 안보이거든? 당장 방에서 기어나오지 못해!!! 마지막 경고야.”
사실이 그랬다. 정황을 아는 나야 지금 상황이 되게 복잡한 상황인 걸 알지. 잘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남자 방에 흑심 품고 침대로 기어들어간 어느 발정난 미녀로 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도저히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울컥해지는 기분을 담아 나는 그 카르브나 황가 최고의 위험 인물에게 경고를 했고, 그런 나의 경고를 그는 왠지 재밌다는 듯한 기분으로 받았다.
“하앙? 왜 이렇게 질척질척 거리실까? 쿨하지 못하게 시리. 내가 일하던 가게에서도 첨 이 바닥에 발들여 놓은 한참 초짜들이나 하는 수준으로 유치하게 구네. 안잡아 먹으니깐, 신경 끄고 가라고. 설마하니, 공사가 다망하신 황제의 챔피언께서 흔한 태자의 노예한테 무슨 질투라도 하는 건가? 푸하하하··· 이거 좀 웃기네. 너, 생긴 건 평균 이하인데 하는 짓은 좀 귀엽구나. 어이쿠, 소매 걷는 건 또 뭐야? 한판 하려고? 난 그런 유치한 드잡이질 할 이유 없는데?”
마지막 경고는 산뜻하게 무시당했다. 그래서, 나는 이성의 끈이 끊어졌고 도발하는 그 년을 죽이러 걸어갔다. 하지만, 그 년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실이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에엣? 고··· 공녀님, 그러시면 안되는,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에엑? 츄우우우··· 아아아~~~ 정신이 아득하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서 있을 수가 없어요. 에에엑? 고, 공녀님. 갑자기 또 뭐하시는 거에요? 왜 갑자기 옷을 벗으시는···”
얌마. 보아하니, 지난 번에 마차에서 키스한 거 꿈꾸나 본데, 너 지금 꿈에서 내 출연 수위가 어느 정도 수준인거냐? 그리고, 있지도 않은 속편은 또 뭐야? 남의 초상권 허락도 없이 맘대로 꿈속에서 각색해서 쓰지마. 나는 지독한 민망함에 경악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바실의 말에 더 경악하고, 도발하던 태도를 집어치우고 유치한 드잡이질을 해야 할 이유가 생긴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잠시 후···
“누나, 왜 이렇게 안 내려오냐고 황후 마마께서··· 에에엥? 누나, 지금 뭐하는 거야? 왜 율리아랑 머리 끄댕이를 잡고 바닥을 뒹굴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보지 말고, 좀 도와, 이 망할 자식아. 그렇게 평소와는 조금 다른 황실의 아침은 대난투극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런 내가 환장할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자아, 바실. 아앙 해봐. 내가 먹여줄게.”
“저, 저기··· 형님. 제가 혼자서 먹을 수 있는데요.”
“아잉, 누님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잖아. 그리고 포크로 줘서 싫은 거야? 그렇다면 기미를 겸해서 입에서 입으로···”
기미는 무슨 놈의 기미야!!! 여기서 독 탈 가능성이 제일 높은 사람이 자기면서!!! 나는 항상 평화로웠던 황실 가족의 아침 식사 자리에 난입한 어느 괴인의 만행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감추기 어려웠다. 대체, 이 똘아이 뭐하자는 거야? 바실의 옆에 딱 붙어··· 이익, 이제는 무릎 위에 슬그머니 앉아?!!! 나는 아침에 드잡이질 하느라 산발이 된 머리를 숨길 생각도 없이 눈을 희번뜩하게 뜨고선 황제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내 시선을 받은 황제가 화들짝 놀라더니 조금 더듬거리는 말투로 율리아에게 말했다.
“유··· 율리아노스. 조금 자제해 주지 않겠느냐? 태자가 어린애도 아니고.”
“어머나, 아버님. 제 시중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저는 카르브나 황가에서 살려주신 은혜를 성심성의로 보답하고 싶은데.”
“자, 잠깐만. 아··· 아버님? 내가 왜 네 아버님이니?”
“그야, 당연히 제 대부시니깐요. 대자인 제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스프 좀 더드릴까요? 아, 버, 님!!!”
야, 이 썅년아!!! 왜 나 보면서 뭔가 보란 듯이 황제보고 아버님이래? 증오하는 아버지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억지 며느리 행세야!!! 하지만, 내가 정말 열받는 것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저 자식의 민망한 만행에 대해서, 적절한 응징을 내리기는 커녕 시선을 회피하는 황제와 황후 마마의 태도였다. 나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얼마 전에 있었던 안나 황녀의 알현을 떠올렸다.
팔라이올로구스 황실의 마지막 황녀이자 후계자였던 안나 황녀. 라구사 사태 이후 제국 행정부가 재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성과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그녀의 존재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을 부정하였다던 그녀는 율리아의 생존을 듣자, 마음을 고쳐먹고 콘스탄틴노플의 소환에 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와 바실이 주선한 재회의 자리에서 오랜 시간 헤어진 모자의 감동의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황녀의 거취에 대해서는 황제와의 알현을 통해서 결정되게 되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될지 나 역시도 상당히 궁금증을 품었다.
율리아가 저지른 일이 워낙에 크고, 그것을 설령 바실이 용서했다고 해도 두 모자의 존재는 카르브나 황실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다, 정치적인 문제를 배제하고 보면, 황제 부부의 젊은 시절에 엮인 인연의 문제도 남아 있어서, 나는 십수년만에 재회한 그 위대한 여정의 당사자들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몰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슬그머니 입회한 자리에서 제대로 본 안나 황녀의 모습은 황녀라는 말이 부족함이 없었다. 미모는 다소 유도키아 황후 마마보다 덜했지만, 연세를 생각하면 상당한 미인이셨다. 그리고 그 품격과 자애로운 모습은 황후 마마 이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뭔가, 율리아가 조금 나이를 먹고 인상이 상당히 온화해진 것 같은 모습? 그래서, 살짝 순한 맛 율리아라는 생각을 하니 두통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아무튼 황가의 계승자라는 그녀의 모습에는 주눅이 들 정도의 기품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딜 봐도 청초하고 순수해 보이기만 하는 그녀가 수도원 밖 세상에 다시 나와 직면한 상황에 대해 우려마저 들었다. 나는 그녀와 황제 부부와의 만남에서 상황에 따라서는 다소 난처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를, 그녀를 변호해줘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내 예상은 완전히 벗어났다.
“니키, 유도··· 이렇게 다시 만나는군요. 그 사이에 황위에 오르셨더군요. 이제는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시네요. 진심으로 경하 드리옵니다. 틀림없이 그때 저는 니키라면 틀림없이 언젠가 황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고요? 아, 그때 왜 운반하던 황제 제관을 니키가 장난삼아 써보면서 지나가던 점쟁이한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라고 물어보다 게오르기우스 근위대장한테 쳐맞을 때요. 그때 말리지 말걸 그랬었나?”
“왜 제국이 안정된 이후에도 찾아오지 않고 계속 숨어 있었냐고요? 새로운 황제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냐고요? 아뇨, 들었죠. 근데 왜 안나왔냐고요? 자신들인지 몰랐냐고요? 아뇨. 알았어요. 니키와 유도라고 생각했죠. 그럼 설마 죽일까봐 안나왔냐고요? 아뇨. 그런 생각은 안했어요. 다만, 니키가 황제가 되었으니 그리 오래지 않아서 어느 주정뱅이 황제가 제국 말아먹었다는 소식을 들을 거라 생각해서 안나왔죠. 이렇게 잘나갈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네? 제가 니키를 좋아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율리아한테 그랬다고요? 아니, 왜 당사자를 앞에 두고 현실 조작에 역사 왜곡을? 저는 니키 좋아한 적이 없는데요? 좋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남자로서는 되게 불안한 스타일이라 생각했는데. 근데 왜 유도랑 티격태격하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봤냐고요? 그야, 내 친구 유도 걱정 때문이었죠. 애가 완전히 코가 꿰었는데, 절친이 망한 패를 집을 것 같아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죠. 결국··· 걱정이 현실이 됐네요. 유도야, 행복하니? 아냐, 됐다. 더는 말 안할게. 뭐 행복이라는 것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니깐. 아무튼 힘내. 그리고 세상 모든 여자들을 대표해서 감사할게.”
“그때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유감이라고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두 사람이 사과할 일은 아니죠. 지켜준다고 약속하고, 자신이 책임질 테니 애를 낳으라고 무책임하게 내뱉어 두고, 자주 오겠다고 하고선 한번도 안오긴 했지만 그걸 가지고 두 사람을 탓할 순 없죠. 다 제 운명이고 제 팔자죠. 할아버지한테 겁탈당해서 애를 가지고, 오빠한테 목숨을 위협당하고, 용병들에게 윤간당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을 뻔 해도 다 제 운명이 모진 탓이죠. 그런데, 그때 두 사람 뭐했다고요? 아, 크림에서 행복한 신혼 생활? 와··· 축하드려요. 두분이 행복하다면 예전 의뢰인 따위가 죽어나가도 무슨 상관이겠어요. 아주 행복하셨을 것 같네요.”
“우리 율리아 좀 잘 좀 부탁드려요. 대부라도 아빠잖아요. 네? 저지른 짓이 너무 중하다고요? 어휴, 우리 애가 근본은 착한데, 우스타샤에 끌려가서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애가 그렇게 되서 그렇지 원래는 착한 애에요. 그리고 사내 아이가 졸지에 여자 아이가 되었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키는 감싸줘야죠. 우리 애한테 잘 좀 해주세요. 이제는 마음 고쳐먹고 황실에 순종하겠다고 하니, 자리도 좀 마련해 주시고요. 기왕이면 애가 처지도 저렇게 되었으니 파라코이모메노스(환관장) 정도 자리면 좋지 싶은데요.
네? 안된다고요? 황실 가족의 신변을 담당하는 자리를 주기에는 저지른 일이 너무 심각하다고요? 네에···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하는 수 없죠. 저랑 저 아이가 불편하시다면 저희가 사라져 드리는 것이 좋겠네요. 율리아, 엄마랑 같이 가자. 어디 가냐고? 그야, 원래 우리가 떨어져서 죽었어야 할 두라초 앞바다. 니키와 유도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이번에는 확실하게 발에 돌 묶고 들어가자꾸나. 세상 모두가 다 외면해도 감싸줘야 하는 대부가 우리를 용납하지 못하는데 어쩌겠니. 대부님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원래 갔어야 할 곳에 가자꾸나. 이번에는 엄마랑 함께니깐 무섭지 않을 거야.”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황제 폐하가 제한 없이 와인을 병나발을 불었고, 황후 마마가 머리를 쥐어 싸매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셨다. 재미는 있었지만,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제기랄, 율리아, 순한 맛이 아니라 매운 맛이었냐? 아무튼, 예상치 못한 안나 황녀가 내뱉은 황제 부부의 죄책감을 마구 자극하는 담화 덕분에 그녀가 우회적으로 요청한 것들은 대부분 이루어졌다.
과거 팔라이올로구스 황실의 재산이 상당히 안나 황녀에게 반환되었다. 그리고, 황도에서 황궁 정도는 아니지만, 과거 팔라이올로구스 황실이 소유했던 저택이 그녀가 살 곳으로 지정되어 양도 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동네방네 떠들지는 않았지만, 조용하게 그녀의 지위를 복권해주고, 그녀가 귀환하였다는 사실을 제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팔라이올로구스 방계의 집안들에게 알리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율리아는 안나 황녀의 요청대로 환관장의 지위를 받았고, 황실의 대자이자 궁중 사용인으로서 황궁에서 일하는 것을 허락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악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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