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2
부다페스트의 날씨는 오늘도 화창했다.
봄바람이 따사롭게 부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티파티를 즐기는 레이디들이 빈번하게 보이는 날이었다.
그리고, 중무장한 아르파드 근위대의 기사들도 휴가를 받았는지 거리 곳곳에서 보였다.
그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마르탱은 초조한 얼굴로 노천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율리아였다.
“미안, 조금 늦었지?”
“아, 괜찮아. 그런데, 오늘 같이 나오기로 한 그 사람은?”
“어, 음.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조금 늦나보네. 하하하, 조금만 기다려 볼까?”
어색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마르탱은 조금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널 혼자 다니게 하는 거야?”
“응? 아, 아니. 그렇지는··· 음, 아니 좀 그렇기는 해.
아무래도 나와 달리 어디에 매인 사람이 아니고, 항상 바쁜 사람이니 서로 같이 다니기가 어렵지.
그리고 성격도 좀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람이라서 이런 편이 익숙하지.”
그 말을 들은 마르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마르탱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너무 일방적이야. 왜 정말로 그 사람이 너의 연인이라면, 항상 네 곁에 있어주지 않는 거지?
사랑한다면 항상 곁에 있어줘야 하는 것이 정상이잖아.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연인의 모습은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대체, 뭘 하느라고 네 곁에 있어주지 않는 거지? 그 사람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마르탱. 그건···”
그런데, 그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드는 존재가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이봐, 소년. 그대가 불신하는 그 쥴리아의 연인이 바로 이 몸이신가?”
“다, 당신은?”
내 모습을 본 마르탱의 얼굴에 황당함이 번져갔다. 무리도 아니다.
뭔가, 제국풍과 프랑스풍이 뒤섞인 화려한건 죄다 끌어모은 것 같은 요란한 복장의 허세 가득한 남자가 눈앞에서 광소하고 있었으니깐.
그래 나다, 씨발. 오늘은 지금까지 했던 에이전트 카밀 버전 중에서 가장 요란한 두근두근 데이트 지골로 컨셉이다.
거울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살하고 싶어지는 이 괴랄한 복장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유럽에서는 최고 인기남들이 입는 그런 옷이란다.
율리아의 정신나간 코디를 보면서 나는 그 년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하지만, 결국 눈물을 머금고 그 광대 복장에서 간을 살짝 뺀 느낌의 복장을 갖추고 더없이 과장스러운 모습으로 녀석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할말을 잃은 마르탱에게 나는 내 소개를 하였다.
“만나서 영광일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시와 바람과 로맨스를 따라 세상을 떠도는 음유시인,
그리고 뭇 세상 레이디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죄많은 지골로, 하지만 때로는 거대한 제국과 성스러운 성전의 비밀을 두고 암투를 벌이는 로그,
가끔은 도시의 촛불 아래 인생을 베팅하는 갬블러, 그리고 어떨 때는 날조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저술가,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걸어온 내 발자취의 그림자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내 이름은 카밀. 나의 레이디, 쥴리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영원히 세상을 떠도는 사랑의 나그네라고 불러주시게. 첫.사.랑.소.년!!!”
마르탱의 입이 딱 벌어졌다. 여기서 나한테 쌍욕해도 무죄. 내가 봐도 욕해야 정상이지 싶으니깐.
나는 그 경악스러운 시선을 외면하고, 마르탱을 지나쳐서 비슷하게 역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율리아의 뒤에 가서 섰고, 율리아의 뺨에 키스하며 말했다.
“내 사랑 쥴리아. 항상 나의 구애를 거부하던 그대가 오늘은 왠일로 나를 찾으셨소?”
“오! 나의 사랑하는 카밀님. 항상, 당신에게 제가 부족하다 말하며, 당신을 멀리하려 하지만 그게 잘 안되는 군요.
오늘은 특히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어요. 이쪽은 마르탱.
전에 말씀드린 어린 시절의 친구에요. 죽었다고 생각했던 제 친구에게 저는 이미 연모하는 분이 계시다는 말을 전했고, 친구는 그런 당신을 만나길 바랬어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자리에서 율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당연하다는 행동에 마르탱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한손으로 율리아의 허리를, 한손으로는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몸을 밀착시키고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이런이런. 나의 죄많은 사랑. 또 그대의 청순가련함과 아름다움으로 외로운 영혼을 매혹하였구려.
하지만, 이해하리다. 이번만은 그저그런 양아치가 아닌, 그대의 어린 시절에 새겨진 깊은 인연이라 들었으니. 그리고 은인이기도 하고.
내가 모르던 시절의 그대를 아끼고 지켜준 저 멋진 친구에게 예의를 가지고 대하리다. 약속하오.”
그런데 그때였다. 나를 보고 좀 부들거리던 마르탱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기억났어. 전에 제노바의 고위층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었어.
라구사에 의문의 에이전트가 나타나, 우스타샤를 몰락시키고, 거기다 제국까지 엿먹이고 사라졌다고.
그리고 그 이후로도 분노한 제국의 추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국 여기저기서 출몰하며 사고를 치고 다닌다고 들었어.
설마, 그 사람,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전설의 에이전트 카밀이 바로 당신인가?”
“후후훗. 이런이런. 제노바의 형제들은 입이 너무 싸군. 하지만 상관없지. 그렇소. 그게 바로 나요.
그 정도면 조금은 납득하실 수 있겠소? 나의 사랑 쥴리아의 연인으로 나를 인정할 수 있으시겠소?”
나는 마음 속으로 제발 이 정도 선에서 인정해주기를 바랬다. 그냥 대충 하고 들어가자. 못해먹겠다. 그러나, 그런 나의 기대는 허망하게 무산되었다.
“아니, 더 납득 못해!!! 당신 위험한 사람이잖아? 그리고 소문난 바람둥이고.
가는 곳마다 여자가 끊이지를 않고, 당신 때문에 상사병에 걸려 죽은 처녀들도 여러명이라지?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쥴리아를 믿고 맡겨?”
“아, 아니 그건 대다수가 헛소문···”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 그냥 평범한 성향 아니잖아?”
“응? 그건 또 무슨···”
“내가 똑똑히 봤어!!! 제노바 측 정보부에서 대외비로 요주의하며 취급하던 서류에서 나온 당신의 행적.
당신, 혈태자의 동정을 뺏어버리겠다고 당당히 선언했잖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내 기억 속에도 없어서, 흑역사로 안할래야 안할수도 없는 그 봉인된 기억 말하지마!!!
그리고, 안뺏었다고!!! 했었어도 절대 그런 의미 아니었을 거라고!!! 율리아! 너도 좀 뭐라고 변명을··· 야, 이! 너는 왜 나한테 쌍심지를 켜!!!
그때 일로 이미 머리 왕창 쥐어 뜯었잖아!!! 그리고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정신 좀 차려!!!
긴 변명과 해명이 이어져야 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내 성향 그런 거 아니고,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라고 둘러대고
여자 문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변명했다.
“훗, 확실히 나 역시도 죄 많은 몸. 이 비루한 지골로의 꿀 냄새를 맡고 날아오는 아름다운 나비들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내 죄겠지.
하지만, 나는 항상 말해 왔다오. 내가 일생을 구애하며 찾는 그녀는 오직 단 한명 뿐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바로 여기 있는 쥴리아라고. 제노바의 호사가들 말고, 귀부인들 얘기는 안들리던가? 틀림없이 그 말에 상처받은 나비들이 있었을텐데?”
“크윽. 그래, 들어봤어.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에이전트 카밀이 찾는 것은 항상 한 사람의 사랑 뿐이라고.
그런데 설마 그것이 쥴리아 너였을 줄이야···”
헐? 정말로 들어봤다고? 어, 이거 상황이 좀 심각한데? 그냥 할키스에서 율리아 놀려먹으려고 농담친 내용이 대체 어디까지 사실로 퍼져있는 거야?
나는 갑자기 소문의 무서움에 대해서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와, 씨. 나 이거 언행 좀 주의해야겠는데? 이러다 나중에 내가 뭐가 되있을지 상상이 안갔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마르탱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면 이상하잖아! 쥴리아를 사랑하고 평생 찾아다닌다면서? 근데 지금은 같이 있잖아?
근데 왜 그녀를 데리고 떠나지 않는 건데? 당신 정도의 실력자라면, 당장 그 면상이 수수해 터진 그 주인 아가씨한테서 쥴리아를 구할 수 있잖아?
왜 그러지 않는 거야? 그리고··· 왜 갑자기 화가 난 표정인데?”
표정관리. 표정관리. 하지만 면상이 수수해 터진 년이라서 그게 잘 안되었다. 나는 화를 참고 마르탱에게 말했다.
“틀렸어. 그 반대야. 내가 그녀를 데려가지 않는 것이 아니야. 그녀가 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라고.”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마르탱의 말에 대답한 것은 율리아였다. 그녀는 나중에 혹시 몰라 뒷탈이 안나게 미리 짜둔 설정을 말했다.
“마르탱. 카밀님의 말이 맞아. 카밀님은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구애하고 계셔. 하지만, 그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런 구애를 피해 도망치고, 그러면 카밀님은 또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와서 멀리서 나를 지켜보며 어려움이 생기면 도와주시지.
그걸 알게 되면, 나는 다시 카밀님을 피해 멀리 달아나지만, 그래도 항상 어느샌가 곁에 와서 나에게 구애하셔.
우리는 그렇게 남들이 조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연인 사이야.”
“아니, 왜? 정말로 사랑한다면 결혼해서 부부가 되고, 남은 여생을 인생의 동반자로 서로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잖아?
왜 그러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피하는 건데? 나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
“아니야. 마르탱,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너도 알잖아?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
마르탱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걸 본 율리아가 차분하게 달래듯이 말했다.
“과거를 모르는 남자라면, 어쩌면 그런 식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과거를 아는 남자에게 나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강요할 수 없어. 다들 괜찮다고 하지만, 의지와 현실은 달라. 평생을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야 해.
그걸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같이 감수해달라고 할만큼 나는 뻔뻔스럽지 못해.
카밀님은 예전에 내가 창관에서 사구려 폐병쟁이 창부로 팔려다니던 시절부터 나를 구해준 은인이야.
그리고, 이런 더러운 나를 자신의 생에 마지막 레이디라 여기며 계속 나에게 구해하고 계시지.
나 역시도 그런 카밀님을 사랑하지만, 카밀님에게 나 같은 여자의 배우자라는 속박을 두르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그분의 구애를 거절하고 있어.
아마도, 이런 관계는 카밀님이 먼저 나를 포기하기 전까지 평생 이어질지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이게 최선이라 생각해. 어차피 카밀님은 세상의 그 어떤 속박에도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사시는 바람 같은 분.
나는 그분을 속박하지 않고, 그저 연모되는 존재로 가끔식 보는 것이 그분을 위해 최선이라 생각해.
우리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서로 연모하고 거의 떨어져 있지만 항상 함께하는 연인이야.
마르탱. 미안하지만 네 마음을 받아주는 것은 그래서 어려워. 너는 이런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니잖아? 평범하고 정상적인 부부의 삶을 원하지 않아?
미안해, 마르탱. 나는 이미 그런 삶을 살 수 없어. 그래서,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거야. 그리고 그래서 카밀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시나리오 겁나게 아련하다. 마르탱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밍 상 나는 내키지 않지만, 마지못한 표정을 억지로 억누르며 최대한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율리아의 손등에 키스했다.
아, 씨. 자괴감 끝판왕. 그리고 분위기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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