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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희대의 사건인 라구사 사태는 사건이 종료된 이후에도 다양한 후일담이 전해졌다.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난무하고, 모두가 다 혼란스러워 하느라 진실 여부가 불명확하고, 당사자들이 자세한 사항에 대해 함구한 것이 많아 사건 자체가 모호한 상황에 속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뒷목 잡는 상황을 직면해야 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다름 아닌 라구사의 렉터인 가에타니일 것이다. 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이게 뭡니까? 갑자기 카탈루냐 전우회와 베니스 저항군이 왜 우리 라구사를 유린한 겁니까? 근데 그게 사실 훈련 상황이라고요? 네? 근데 거기에 우스타샤도 개입이 되어 있다고요? 그럼 우스타샤 측을 만나서 진위 확인을··· 네? 우스타샤가 이미 궤멸되었다고요? 그럼 우스타샤의 두목은? 네? 제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고요? 우스타샤의 진짜 두목은 La dolce vita의 쥴리아라고요? 아니, 대체 이게 무슨··· 그런데 이 와중에 시칠리아 테마군은 또 왜? 그리고 황제 폐하랑 근위대장도 지금 우리 라구사에 있으시다고요? 네에에??? 누가 와요? 베니스의 학살공이 오다가 돌아갔다고요?”
가에타니는 뭔가 자다 깨서 일어나 봤더니, 난생 처음 보는 이세계라도 떨어진 것 같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이 양반, 직접적으로 이번 일에 개입하진 않았지만, 평소에 제국에 앙심을 품고 소심한 반항을 해왔지. 그래서, 그런 소심한 반항이 불러온 생각치도 못한 결과에 그는 정황을 전해듣고 사색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라구사 행정부는 절대 그런 불충한 마음을 품은 적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일단은 자치령에서 불손한 의도를 가진 자들을 끌어들이고, 우스타샤와 같은 범죄조직과 연루된 혐의로 콘라드 사법관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상당히 곡소리 나는 심문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적당히 여론몰이를 해서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고, 한몫 챙기려 하긴 했지만, 정말로 제국을 전복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을 위인인데, 저런 꼴을 당하는 것을 보니 조금 안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시칠리아 테마군에 죄다 생포된 카탈루냐 전우회와 베니스 저항군 라구사 지부 사람들은 생각보다는 험한 꼴은 면했다. 사실 저지른 짓을 생각해 보면 가에나티 보다도 죄질이 나쁘지만, 어찌되었건 우리가 생포되었을 때 살려둔 것을 바실은 참작해준 모양이다. 하지만 험한 꼴을 안당한거지 잘풀린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생포된 그들이 보내진 곳이 다름 아닌 베니스였으니깐.
그들에게는 두개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공포공과 학살공 둘 중에 한곳에서 대체복무로 속죄. 우와, 이 무슨 어디를 가도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의 선택지. 누굴 골라야 할지 모를 최악의 선택지였지만 의외로 대부분 학살공을 선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뭐라고? 저들이 베니스인들이라고? 히이이익!!! 무서워!!! 아직 남은 베니스인들이 있었어. 거봐 내가 말했잖아. 틀림없이 복수할거라고. 그리고 카탈루냐 전우회? 으아아악!!! 로저 드 폴로의 부하들이라고? 복수할거야. 틀림없이 우리한테 복수할거야.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공포공의 반응이 너무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포로들은 죄다 학살공을 선택했고, 덕분에 긴급하게 달려오던 쥬노에게는 오던 것을 멈추고, 여기 포로들을 인수받고선 다시 베니스로 돌아가라는 긴급 지시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쥬노는 이렇게 반응했다.
“후에에엥!!! 파티가 벌써 끝나버렸다고요? 쥬노 실망. 쥬노가 직접 언니를 멋지게 구하고, 라구사를 잘근잘근 씹어먹으려고 했는데. 그냥 돌아가야만 하다니. 바리의 뚱땡이 오빠 미워. 먼저 선수를 치다니. 재미는 혼자 다 보고. 확 한판 붙어 버릴까나? 에효. 하는 수 없죠. 그럼 그냥 돌아가는 대신에, 가는 길에 인수받은 이 포로들 잘라서 조각 맞추기 하면서 가야겠다. 네? 그러면 안된다고요? 데려가서 노비로 삼아야 한다고요? 곱게 살려둬야 한다고요? 히잉··· 싫은데. 그냥 죽여버리고 싶은데. 그치만,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언니가 봐주지 않는걸?”
사고는 쥬노가 치는데, 악명은 왜 제 몫인가요? 덕분에 포로 인계를 하러 갔던 장교들이 되려 식겁해서, 포로들과 같이 벌벌 떨었고, 울고불고 하는 카탈루냐 전우회와 베니스 저항군 라구사 지부 사람들을 두고 차마 안떨어지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나도 뒷목을 제대로 잡았다. 하지만 딱히 뭘 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 뭐라고? 쥬노가 알베르토랑 한판 붙겠다고? 그것도 나를 이유로? 상상만 해도 끔찍해지는 시나리오가 벌어지는 일은 조용히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쥬노와 알베르토는 라구사에서 얌전히 돌아갔다. 하지만 쿠타이가 저지른 삽질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급보!!! 라구사 외곽에 수만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선봉에 선 부대는 방패에 람다 문양이 새겨진 라케다이몬 민병대, 저들은 남세르비아 테마군입니다!!!”
바실의 입이 딱 벌어져 버렸다. 쿠타이 이 자식··· 쓸데없이 부지런하잖아!!! 결전병기 둘을 부른 것으로 직성이 안풀리냐!!! 베니스에 가서 쥬노를 급파한 쿠타이는 그대로 베니스에 머무르지 않고선, 육로로 말을 달려서 원래 라구사의 소요를 진압할 책임이 있는 남세르비아 테마군까지 지원 요청을 성공리에 해낸 것이다. 덕분에, 결전병기들에 비하면 다소 행동이 둔하고, 가장 마지막에 연락을 받은 레오 두카스는 부랴부랴 뒤늦게 출동했고, 이 자식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한 주변 부대와의 업무 협조 덕분에 발칸 방면군의 절반에 가까운 부대가 라구사로 몰려오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만들었다.
가에타니 렉터는 공포공에 이어 나타난 학살공으로도 충분히 질려 있었는데, 연이어 나타난 라구사 서쪽의 지평선을 가득 채운 대군의 이동에 발광을 하면서 렉터 자리 때려치고 도망치겠다고 난리를 쳤다. 그리고, 라구사 시민들은 죄다 바실에게 엎드려 엉엉 울면서 목숨만 붙여달라고 비는 대환장 파티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 사상 초유의 상황을 만든 꼴통 새끼는 우리 앞에 그제서야 얼굴을 내밀고선 해맑게 보고했다.
“누나!!! 나 누나가 시킨 대로 성공리에 임무를 해냈어!!! 아욱실리아 예니체리랑 아나톨리아 방면군이랑 코삭 기동군까지는 못불렀지만, 이 정도면 시킨 것 제대로 해낸 거지? 나 잘한 거 맞지?”
애한테 칼, 불 그리고 인감도장 쥐어주면, 틀림없이 사고 난다는 것은 동서양 만고불변의 진리인 모양이다. 덕분에 우리는 라구사 시가지를 몇겹으로 포위하고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의 진위를 물어보는 레오 두카스에게 네가 훈련 성적 3등이라는 사실을 설득시키느라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그렇게 내가 쿠타이를 쥐어박는 사이 바실이 겨우겨우 남세르비아 테마군에 동메달 쥐어주고 돌려보내고 나서야, 겨우 라구사에서 벌어진 소요는 1차로 수습이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일의 시발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안드로니쿠스는 근위대 일부를 급하게 라구사로 소환해서 황도로 가는 인편을 꾸렸다.
우리와 떨어져서 렉터궁으로 달려갔던 안드로니쿠스는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그곳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렉터궁에 진입하는 반군을 저지하는 것에 일조하고, 바리에서 도착한 제국군이 반군을 제압하자 고마워하던 가에타니를 곧바로 체포하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마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포박된 율리아를 넘겨받은 다음 그를 제대로 구속해서 황도로 압송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황궁에도 대략적인 사항을 보고하는 보고서를 발송하였다. 이제, 더 이상 소수 인원으로 기밀리에 수색을 할 수준은 아득히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라구사로 올때는 4명이었지만, 돌아갈 때는 우리 일행과 황궁에서 심문을 할 사람들을 포함해서 수백명의 인원이 귀환길에 올랐다. 한번 율리아에게 당한 적이 있었던 안드로니쿠스는 절대로 간사한 속임수나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율리아를 포박하였다. 당연히 무장은 해제되고, 암기를 어딘가 숨겼을지도 몰라 옷가지도 빼앗고, 재갈이 물리고 눈까지 가려진 그의 모습은 비참했다. 바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뭔가 자비를 베풀어 주려는 듯 보였지만 안드로니쿠스의 강경한 표정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왠지 출발할 때 보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황궁으로 귀환하는 길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콘스탄틴노플에 도착했고, 도착하자 마자 주변의 시선을 피해, 부콜레온 황궁 지하의 은밀한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압송해온 다른 죄수들은 대부분 콘라드 사법관이나 다른 수사기관, 감옥으로 보내고 그곳에는 오로지 단 한 사람, 율리아만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율리아는 그곳에서 재갈과 눈가리개가 풀리고 포박도 풀렸다. 그리고 대신에 팔목과 발목에 사슬이 연결된 족쇄를 채우고, 팔다리를 움직일 여유도 없이 사방으로 활짝 펼쳐진 자세로 구속하였다. 아무것도 몸을 가릴 것도 없는 알몸으로 그렇게 결박된 율리아의 모습은 지독하게 비참하고 동시에 퇴폐적이며 관능적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가리지 못하고 드러난 사타구니에 시선이 갔다. 민망함 보다는 지독한 고통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가 왜 그토록 분노하여야 했고, 얼마나 깊은 구덩이에서 죽을 힘을 다해 기어올라왔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그리고 나는 시선을 돌려 그의 전신을 바라보았다. 여성적인 굴곡은 없었지만, 나 정도로 가는 팔다리와 몸의 라인, 그리고 긴 머리와 아름다운 얼굴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 자체가 환상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확실히, 우스타샤의 두목을 홀렸을 매력과 그의 목을 벨 독기를 같이 품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머리 속에서는 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그 어떤 것도 말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의 결박을 마친 근위대장이 황제에게 보고를 하러 올라간 사이, 그 어두운 공간에서는 얼마 전 라구사의 옥상에 있었던 세 사람만이 다시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율리아의 영역이었던 하늘과 맞닿은 라구사의 옥상은 바실의 세상이었고, 바실의 영역인 황궁의 어두운 지하는 율리아의 공간처럼 보였다. 항상, 그가 이야기하던 라구사 지하 수도와 닮은 어두운 시궁창으로 다시 돌아온 그의 표정에 남은 것은 오로지 증오 밖에 없었다.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고의 영광을 누리면서도, 지옥에 떨어진 자신을 외면한 자신의 부친. 그래서 복수를 통해서라도 만나기를 고대한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실은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바실은 보틀에 채워진 물을 율리아의 입가에 대며 마시기를 권했다. 그러자 율리아가 말했다.
“치워라.”
“하지만···”
“나를 동정하고 싶다면 차라리 머리에 부어다오. 차가운 머리로 그를 만나고 싶으니깐.”
율리아의 말에 바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망설이던 그는 결국 율리아가 원하는 대로 그의 머리에 물을 부워주었다. 그러자 머리에 부어진 물이 그의 머리칼과 몸에 흘러내렸다. 뭔가, 본인으로서는 나름 결의를 다지는 모양인데··· 뭐냐? 왜 저러니깐 이 상황에 쓸데없이 더 요염해? 어휴, 그냥 이런 소동 벌이지 말고 서로 모르고 살면서, 창관의 마담이나 했어도 크게 고생하면서 살지 않았을텐데. 왠지 나나 바실과는 다른 생물처럼 보이는 그의 요사스러움을 보면서 나는 그런 쓸데없는 현실적인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바실이 카밀라와 같이 어딜 다녀온다고 하길래, 둘이서 잘 지내는구나 하고 따로 찾지 않고 놔뒀는데. 갑자기 라구사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그리고 황실에 비밀의 후계자가 있다니? 좀 알아듣게 설명을 해야 할 것 아니냐.”
황제였다. 그는 사전에 보내진 보고서를 보고서도 상황이 제대로 납득이 안되었는지, 근위대장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며 그곳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내려오던 찰라 그의 시선이 율리아를 향하더니 그가 경직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둠 속에서 혼자 빛나는 나신의 미인을 보고선 멈칫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리아도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러자, 황제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맙소사··· 살아 있었구나. 네가 살아 있었어. 틀림없이 네가 맞구나. 젊은 시절 안나 황녀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것이 틀림없이 너로구나. 살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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