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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시작은 쿠타이의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황후 마마의 배려로 황실에 기거하게 된 쿠타이에게는 예전 선생들도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거기에 많은 제국 쪽 스승들이 붙어서 그 녀석의 학업을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그 날은 쿠타이에게는 조금 생소한 제국의 황실 의례에 대한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임페리얼 퍼플(Imperial purple). 바로 황실과 제국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보라색이죠. 과거부터 보라색은 고귀함과 권위의 상징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의 색으로 여겨졌죠. 그래서 지금도 제국의 상징 색깔이자 황제와 황태자를 상징하는 색으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권위가 어느 정도냐 하면, 부콜레온 황궁에 황후의 출산실로 만들어진 보라색 방에서 태어난 왕자와 공주는 제국의 정통성을 가진다는 의미로 포르피로게니타라는 칭호를 받으며 그 계승권을 인정받는 답니다.”
“우와··· 신기하네요. 보라색이 제국에서 그런 큰 의미를 가진다니. 근데, 왜 하필 보라색이죠?”
“뭐, 그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전설과 혼재된 가설들이 존재합니다만, 현실적인 해석으로는 보라색이 추출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티레니안 퍼플이라 불리는 보라색을 추출하려면, 그 색깔을 가진 작은 조개를 수만개를 채취해서 그 조개를 으깨서 건조하는 방식으로 추출하는데, 엄청난 수고와 재료가 필요로 하죠. 그래서, 그 색을 얻으려면 현실적으로 황제 폐하 정도의 힘과 권위를 가진 분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 색으로 만든 물건을 가질 수 없답니다. 그래서, 오로지 황제만이 가능한 색이 된거죠.”
“아아··· 그렇군요.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요. 확실히 보라색을 염료로 추출하는 것에는 손이 많이 가죠. 중원의 황조들도 그래서 보라색을 상서로운 색으로 여겼다고 배운 기억이 납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데, 확실히 동방에서도 보라색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손이 많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염료의 원료가 되는 재료를 구하는 것까지 어렵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자초(紫草) 라고, 황달의 약재로 요긴해서 저희 같은 유목민족들도 항상 가지고 다니는 풀에서 보라색을 추출할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요긴한 풀이라 말린 건 물론이고 모종까지도 항상 가지고 다니며 상비약으로 목초지에 심곤 하죠. 이 자초를 심어서 활용한다면, 이곳 서방처럼 불쌍한 조개를 수십만 마리나 으깨서 죽일 필요없이 보라색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 그렇군요. 그렇게 하면 쉽게 보라색을··· 네엣?!!!”
제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쿠타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국에 귀순한 카자크인들이 상비약으로 가지고 다니던 자초에서는, 티레니안 퍼플과는 약간 다르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은 양질의 보라색 염료를 추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했다. 덕분에 제국 곳곳에서는 그 일로 인해 생각치도 못한 논란이 퍼져나갔다. 나는 그 소식을 요하네스 의원으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크로매틱 신드롬(Chromatic syndrome)이라고 하지요. 일종의 색채의 정치학이 연관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네? 그게 무슨 의미인데요? 그래봤자 그냥 색깔에 불과하잖아요? 겨우 색 때문에 황도의 관료들은 물론이고, 시민들도 왈가왈부하는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공녀. 색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정체성입니다. 위대한 명가와 영웅들은 저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복잡한 도식과 그림이 그려진 문장을 사용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더 명확하게 사람들에게 정체성으로 인지되는 것은 바로 색깔입니다. 그것에 큰 의미나 내력이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곳을 대표하는 색에 열광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자신의 의미를 정의하기 마련입니다.
과거 유스타니아누스 대제 시절에 니카의 반란의 주역이었던 청색당과 녹색당의 일화를 상기해 보십시오. 솔직히 청색과 녹색이 무슨 그런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황도 시민들의 계파를 대표하는 색이 되자, 두 색은 황실에 대해 강렬한 의미로 떠올랐습니다. 신성동맹의 잉글랜드 왕실이 사용하는 붉은 색과 프랑스 왕실이 사용하는 푸른 색도 의미심장하지요. 두 왕실은 서로 경쟁적 위치에 있는 두 색을 상징으로 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며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색은 정치적으로 사람을 끌어모으거나 선동하는 것에 강한 효과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이 바로 우리 제국 황실이죠. 오직 황실만이 전용할 수 있는 보라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황제가 가지는 절대성과 권위를 확보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그 색만 보고도 자신보다 더 높은 지고의 존재로서의 황실을 경외하게 만들었지요.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보라색 방에서 태어난 황자에 주어지는 주술적 의미의 계승권까지 가면 그 절정에 다다르지요.
이렇게 색이란 정계에서 가지는 의미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인해 이번에 카자크인들이 제국에 소개한 동방에서 도입된 자주색 염료의 추출 기술로 인해 이 제국에 주는 여파도 작지 않은 것이죠.”
왠지 그 말을 들으니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기분이 든다. 아이고, 쿠타이 이 녀석···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린거야? 그러는 사이 요하네스 의원의 말이 이어졌다.
“보라색이 고귀한 것은 그것이 정말로 지고의 존재만이 겨우 가질 수 있을만큼 값비싸고 고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황실의 색으로 대표되었고, 너나 할것없이 그 색에 대해서 가지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그 색의 가치를 더 높여줬죠. 그런데, 그 색이 생각치도 못한 방법으로 여전히 값은 비싸긴 하지만, 공급이 원활해져 버릴 것 같다는 거죠. 그러면 그 색이 가지고 있던 그 권위도 같이 색이 바래버리게 됩니다. 제국의 보수적인 인사들은 그런 제국과 황실의 자존심이던 색의 입장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군요. 조금은 이해가 갈 것도 같네요. 그래서,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이군요. 하지만, 큰 의미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알려진 보라색 염료의 추출 원료를 정치적인 이유로 매몰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만. 도리어, 판데모니움 행정부는 동방에서 전해진 새로운 염료 원료가 제국에 유입된 카자크인들의 새로운 경제적 자립 수단으로 응용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고요. 듣자하니, 자초의 생산 장려 및 염료 생산 시설을 만들어서 고부가가치 색조를 시장에 뿌려 그 산업에 종사하는 카자크 저소득층을 자립시키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려고 한다면서요.”
“그 말도 맞습니다. 확실히 이제는 보라색이 가지는 권위가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것도 중론이죠. 특히나 지금처럼 실용을 강조하는 카르브나 황조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그런 흐름은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애초에 황실부터가 크게 중요시 하지 않게 된 보라색의 의미가 예전만큼 크게 다가올리 만무하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공녀의 말처럼 투덜이 복고주의자들의 푸념만을 남기고 그 논쟁은 퇴색되어 가겠죠. 근데 저는 여기서 조금 재밌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나의 영광이 퇴색되면 새로운 영광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이죠. 황실의 보라색이 공급 과다로 의미가 퇴색되면, 그 자리는 과연 어떤 색이 차지하게 될까요?”
“응?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새로운 색이 그 자리를 차지하다니요?”
“공녀. 명심하세요. 색의 정치학입니다. 그 색이 가지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그 색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이번에 보라색의 권위가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희소성이 떨어졌다면, 또 다른 색이 엄청난 희소성을 가지고 등장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겠죠. 그리고 그런 희소성을 가진 색에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은 틀림없이 존재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색조의 유행과 변화에 따른 정계의 행보에 대해 그 추이가 궁금합니다. 공녀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새로운 색이 등장해서 기존의 보라색 권위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요? 그건 너무 앞서가는 생각이 아니신가요? 이미 상당수의 색이 발견된 상황에서 갑자기 기존의 색과 차별되는 그런 색이 존재할리가···”
“아뇨. 저는 틀림없이 그런 것이 등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공녀가 취할 입장도 궁금하고요. 과연, 공녀는 그런 색조의 정치학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기존의 색과 새로운 색의 변화를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궁금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감히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그 행보로 인해 아마도 제국과 제국의 적성국의 정치적 여파는 아마 만만치 않은 큰 영향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을 듯 하군요.”
“항상 말씀드리지만, 그런 억측은 그만두세요. 다 오해십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공녀의 모르쇠 연기는 역시 일품이십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죠.”
그렇게, 요하네스 의원은 유쾌한 표정으로 수다를 늘어놓고 알현실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높으신 분들은 별것도 아닌 색깔 가지고도 참 복잡하게 산다는 생각 정도? 그런데 얼마 후 나는 내가 그런 색의 문제에 대해서 개입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동방에서 제국을 방문한 어느 교역상의 황실 가족에 대한 알현에서 시작되었다.
“위대하신 로마 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소생들은 초원길과 사막길의 교역에 종사하고 있는 감바 상단이옵니다. 이렇게 콘스탄틴노플에서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 있음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옵니다.”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한동안 킵차크 칸국의 방해로 원활하지 않았던 초원길의 교역이 카자크인들의 협조를 통해 정상을 되찾은 보람이 있는 것 같군요. 이렇게 동방의 상단을 황도에서 만날 수 있다니 말입니다. 먼 동방에서 이곳 제국까지 교역을 위해 찾아와 준 것에 대해 제국의 황제로서 환영하오. 좋은 거래를 성사시키고 만족할만한 이문을 남겨서 가길 바라겠소. 그리고 제국의 여러 상업 시설과 유흥 거리도 충분히 만족하길 기대하겠소.”
“오오오··· 황제 폐하의 극진한 친절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곳에서 좋은 거래를 성사시키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 황제 폐하를 뵙는 자리에서 감히 저희가 황제 폐하와 제국 황실에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그것을 저희가 황제 폐하와 황실 가족분들에게 소개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감히 짐작컨데 틀림없이 대단히 만족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조금 민망하지만 황실 가족의 일원 대우로 황제 폐하와 같이 어전에서 들어와 자신을 소개하는 동방 상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국적인 모습이 인상 깊은 그들은 험한 교역로를 통과한 것을 증명하듯 거칠고 남루한 모습이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품목들은 겉보기에도 대단히 값지고 귀한 물품들이었다. 동석한 황후마마가 살짝 감탄할 정도니 자세히 알아볼 필요는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 그들이 특히나 황제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값비싼 물건에 대해 나는 살짝 궁금증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요청을 황제가 허락하자 그들이 가장 엄중하게 봉인된 상자에서 귀중하게 보관한 것으로 보이는 물품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우리 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우리는 모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이것은?”
“중원의 성도 지역에서 생산된 최고급 비단입니다. 과거, 몽골 제국이 남송을 침공하여 사천 지방을 점령했을 때, 그곳의 주민들이 몽골 황실에 항복의 의미로 만들어 받친 고귀한 보물입니다. 하지만, 한동안 몽골 제국의 내전으로 이 값진 보물을 제대로 사용한 사람이 없이 황실 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을 저희가 어렵게 입수하여 이것을 서방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보십시오··· 이 영롱한 질감과 자태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시선을 떼실 수 없는 이 세상에 다시 보기 힘든 찬란하고 고귀한 푸른 색을 말입니다.”
“오오오오··· 저, 저게 대체 뭐야? 저런 말도 안되는 물건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어전에 있던 제국인들의 입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사가 울려퍼졌다. 심지어는 황후마마마저도 당황한 표정으로 그 보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푸른색 비단이 아니었다. 그 비단은 마치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은 영롱하고 은은한 광택을 발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푸른색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푸른색은 모두 다 탁한 회색으로 보일 정도로 그 비단이 발하는 푸른색은 너무나 아름답고 말할 수 없는 위엄을 발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정말 현실에 존재하는 물건이 맞나? 나는 무슨 신화나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물건을 보면서 할말을 잃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아무런 말을 못하는 사이 상인이 말했다.
“어떠십니까? 이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품격을 가진 지극히 천상의 색에 가까운 파란색이. 그리고 이 색이 발하는 희미한 광택과 오러가 실로 지상에 군림하는 절대 군주들에게만 하늘이 허락한 물건임을 증명하는 듯 하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이 물건이 지상에서 가장 존엄하신 제국의 황실에 가장 어울리는 물건이라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물건에 대해 수많은 구매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다들 거절하고 이곳 제국의 황도까지 와서 직접 보여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마도 틀림없이 마음에 드시리라 생각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질 것 같은 권위와 위엄을 가진 신들의 물건··· 이것을 황실에서 재단하여 두르신다면 틀림없이 황제의 권위를 더없이 드높여 줄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카르브나 황실이 이 물건의 주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떠십니까? 황제 폐하? 이 물건을 저희들에게서 구매하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황제 폐하께서 이것을 구매하신다면 저희는 기꺼이 그 가치에 상응하는 가격으로 이 물건을 받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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