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2
다시 한번 깊은 편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 미친 제국은 정말이지 상식이란 것이 없어.
익숙해져서 나야 편한 동네 친구처럼들 대하지만, 실제로는 제국 최고위급 거물급들을 죄다 나한테 붙여서 파견해?
그것도 죄다 위장 신분으로? 이게 대체 뭐야!!! 이래서야 귀국해도 지금이랑 상황이 달라지는 게 없잖아?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야, 이 니키 개자식아!!! 당장 나와!!! 한판 뜨자!!!”
“히이익!!! 자기야!!! 진정해. 왕년에 그 투척 도끼는 또 왜 꺼내고 그래? 진정하고 내 말 좀···”
“네가 정줄을 놨구나!!! 누구 맘대로 우리 애를 거기 보내!!! 누구 허락도 없이!!!”
“근위대!!! 황후를 막아라!!!”
황제의 절실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근위대는 전원 시선을 먼산으로 돌렸다고 한다.
어차피, 근위대장도 누군가에게 겁나게 처맞고 구속되었다가 면직당해서, 공석이 되는 바람에 명령 들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로마 역사를 통틀어 봐도 흔치 않은 도끼를 든 황후의 황궁 내 황제 추격전은 두 사람만의 일이 되었다.
아, 씁. 나 못보낸다고 난동을 부리시는 황후마마에게 감사하기는 한데,
그건 좀 어전에서 그러시지. 왜 그때는 저 주정뱅이한테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구시다가 지금 와서 저러시는 건지.
아무튼, 이틀이 넘게 이어진 그 소동은 바실의 만류로 겨우 진정되었다.
“네, 이제 엄마도 진정하세요. 어차피 아부지 맘먹고 도망치면 못잡는거 엄마가 더 잘 알잖아요. 응? 근데, 아부지 정말로 어디 계세요? 괜찮으신거죠?”
“쳇, 괜찮겠지 뭐. 겨우 두방 밖에 못맞췄으니 설마 죽기야 하겠어?.”
응? 두방? 무슨 두방? 도끼도 두방? 사람이면 대개 그럼 죽지 않나?
아무튼, 추적을 포기하고 나서도 한참을 씩씩거리시던 철혈황후에게 나 역시도 뭔가 쭈볏거리면서 만류를 해야 했다.
“고정하시지요, 황후마마. 다, 불민하신 저희 아버님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책망하시려면 차라리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그제서야 씩씩거리던 것을 멈추고 한숨을 크게 쉬고 살벌하게 도끼로 까딱까딱 나를 불렀다.
나는 왠지 날에 피묻은 것 같은 도끼를 보며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분위기만 봐서는 왠지 나도 찍어버릴 것 같다고요.
하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으셨고 황후마마는 다가간 나를 보듬어 안고 토닥이며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미안하기 그지 없구나. 내가 부족하여, 정작 위급한 상황에서 너를 지켜주지 못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원망하지 않는 너를 보니 내 마음이 아프구나.
항상, 내 너를 손님이 아닌 가족으로 여겼는데, 오늘 나를 가족을 지키지 못하였구나. 미안하다.”
와, 좀 감동. 그래, 캐릭터가 좀 희한해서 그렇지, 황후마마는 흔치 않게 내 편이셨던 분이시지.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사과하지 말아주십시오. 황후마마께는 이미 과분하게 받았습니다. 그 은혜만으로도 평생 다 갚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너무 그렇게 저를 멀리 보내는 것처럼 여기지도 말아 주십시오.
어디를 가든, 저는 부콜레온 황궁에 속한 황후마마의 사람입니다. 몸은 잠시 거처를 옮겨도 항상 마음은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 오랜 출타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간다고는 해도, 어차피 제국의 연이 닿은 사람으로서 동맹의 일을 하러 가는 것.
그러니, 실제로는 빈번하게 제국을 오가며 지금과 다르지 않게 보내지 싶습니다.
그러니깐, 그렇게 너무 먼 곳으로 보내는 것처럼 저를 안타까워 하지 말아주십시오. 자주 황궁에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내 말을 들은 황후마마가 눈을 반짝이며 말씀하셨다.
“그렇지? 역시 그렇게 되겠지? 암, 그래, 그래야지.
말 잘했다, 카밀라. 그래 본국에 가는 것은 임시적인 것이고, 네 말처럼 너는 우리 아이지. 그러니 네 집은 아직 여기니라.
그래. 믿고 있으마. 지금처럼은 아니어도 네가 머물 곳은 여기니, 자주 찾아와야 하느니라.”
“아, 네. 그··· 그렇죠. 네 물론 그럴 생각입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안도하는 황후 마마를 보며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그리고, 좀 나중의 일이지만, 실제로 본국 귀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는 부임한 이후에도 지긋지긋하게 자주 제국에 돌아와야 했다.
제기랄. 이럴거면 대체 왜 보낸거냐고!!! 인질공녀는 집에 좀 있고 싶다!
아무튼 그렇게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홀가분한 기분과는 전혀 다른 중압감을 느끼며 나는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덕분에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졌는지, 좀 머리 속으로 끙끙 앓다가 이동하는 마차에서 그런 악몽까지 꾼 것이다.
나는 혈압이 오를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동이 터오르는 빛이 비치며, 수십여대의 마차가 우리 마차의 앞뒤로 전개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행렬은 소박한 편이었다. 한동안 헝가리 각지에서 제국군이 거창한 열병을 행하며 철수식을 거행해서 한동안 뒤숭숭했다던데,
그에 비해 빠진 대신 들어가는 우리 일행은 소박하다 못해 미미한 느낌마저 들었다.
뭐, 무리는 아니지. 지금 내가 돌아가는 것은, 우리 헝가리에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군을 재편성하기 위해서니깐.
말은 좋지만 사실상 맨땅에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요구사항.
그래서, 지금 내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병력 같은 것은 없고, 사실상 군사 재건을 위한 행정관과 주무관만을 데리고 가는 외교 사절 수준의 인편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상황이 매국노 짓거리하러 돌아오는 상황에서, 그나마 소수로 귀국한 덕분에, 제국 믿고 설치는 걸로는 좀 덜 보이지 싶어서 였다.
망했다고 생각한 것은, 그런데 이 소수의 병력에 누가 맘먹고 병력을 보내기라도 한다면? 아오, 생각만 해도 끔찍해지네.
나랑 같이 온 인간들, 하나하나 어딘가 빠진 것 같고, 그러면서도 쓸데없이 인간 흉기인 녀석들. 얘들 괜찮을까?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랑 비슷하게 잠이 깨서 소지품을 정리하는 바실 외에, 다른 내게 익숙한 웬수들은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흔들거리는 마차에서 참 태평들도 하네.
아니, 전부는 아닌가? 실눈을 뜨고 나를 보는 저 변태새끼는 안자네. 눈깔아! 팍씨!
뭔가 태평한듯 아닌듯한 녀석들을 보고 나니, 뭔가 고민이 다 부질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손으로 얼굴을 부비며 마른 세수를 하고 마차의 장막을 걷어 밖을 내다보니,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나는 그 낯익은 풍경을 보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소리쳤다.
“와, 템즈다. 나의 고향.”
저 멀리, 기억에 아득하게 떠오르는 템즈 성이 보였다. 이제야 겨우 돌아왔다.
“공녀님 개인 휴대품만 내려. 오늘 하루만 머물고, 내일 바로 부다페스트로 이동할 거니깐.”
“마차 바퀴 부속을 교환하고 편자를 갈아. 내일 출발 준비를 마치고 쉬어.”
동행한 사용인들이 여정을 정비하는 사이, 나는 마차에서 내려 오랜만에 돌아오는 템즈 성을 돌아보았다.
난처할 정도로 기억 속의 모습에서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높은 첨탑과 서재의 책을 훔쳐보려 타고 다니던 성벽 틈새 하나하나가 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뭔가, 그리움이 채워지기 보다는 조금 싱거운 느낌마저 들었다. 콘스탄틴노플에서 너무 오래 산 덕분일까?
이곳과 비교도 안될 만큼 거대한 도시였지만, 왠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못보던 풍경이 나타나던 곳에 살아서 그런지 익숙치가 않네.
그래서, 뭔가 조금 허망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는 가운데 성의 저택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어, 음. 어서 오너라, 나의 딸아.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
라즐로 공작님이 어색하게 나와서 나를 맞이하셨다. 그리고 나는 할말을 잃었다.
내 덕분에 목숨 부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뒤에서 되게 처맞고 돌아오신 모양이네. 아직도 여기저기 붕대와 멍자국이 선명하니.
솔직히 쌤통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헬레나 시녀장님이 나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집에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밀라 아가씨.”
아오, 좀 연기 좀 잘하라고. 그렇게 대놓고 죽일 것 같은 시선으로 보면 뒤에 제국 사람들 어쩌자는 거야?
나는 왠지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뒤에 보는 시선들이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도, 돌아왔습니다. 아버님.”
잠시, 적막이 흐르고 공작님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을 드리우고 말없이 나에게 다가와 안아주었다.
젠장할. 얼음덩이를 끌어안아도 이보다는 온기있겠다.
나는 지독하게 냉기가 흐르는 공작님의 포옹을 훈훈한 부녀의 재회로 위장하기 위해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에서의 차가운 냉대 속에서 밤이 되었다.
늦은 밤, 공작님의 집무실에 나는 시녀장님과 같이 불려갔다.
제국 측 사람들은 오랜만에 가족들만의 해후를 느긋하게 즐기라며, 배려해주듯이 내성의 밖에 공터에서 야영을 했다.
어휴, 평소에는 잘만 여기저기 끼어들면서, 이럴 때는 눈치없이 자리 피해주냐?
덕분에 나는 고향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은 간 곳이 없이, 재판장에 끌려온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어휴, 지금 막 왔는데 벌써부터 부콜레온 뒷마당 마구간 저택의 내 방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나 이상으로 열불이 나는 것은 공작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모습으로 방을 서성이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
나한테는 기세등등하던 시녀장님은 공작님 눈치를 보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와중에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그 침묵을 깬 것은 공작님이셨다.
“헝가리 군사 재건 위원회? 그 의장이 너라고? 하! 이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더냐!!!”
평소 같았으면 나는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다고 싹싹 빌었겠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오늘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오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나빠졌음에도 말이다.
아니, 조금 나도 할말은 생긴 건가? 나는 공작님에게 말했다.
“직접, 서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방의 전권대사로서 그 방침에 동의한다는 서류에.”
“뭐, 뭐라고? 이 녀석이 지금 어딜 감히!!! 네가 지금 나를 비난하는 것이냐? 그게 누구 때문인데!!!”
“저 때문이라고 하시면 좀 기분이 좋아지십니까? 공작님. 죽을 때 죽더라도 할말은 하고 죽어야겠습니다.
애초에, 제국 황궁에서 공작님께서 그런 난동을 부리시지 않으셨으면 모두가 다 행복하게 끝날 이야기였습니다.
근데, 불가항력적인 일을 제 탓을 하시면서 성질을 부리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죠.”
“뭐, 뭣이!!!”
“아그네! 이게 무슨 말버릇이냐!!! 어서 공작님에게 사죄를···”
시녀장님이 사색이 되서 만류하려는 순간, 나도 화가 끝까지 나서 소리쳤다.
“저는 두분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미친 황제가 휘두르는 검을 막아섰다고요!
왜요? 또 화가 나서, 지난번처럼 저를 구타하시려고요? 해보시죠!
차라리 여기서 죽이세요. 제가 여기서 죽으면, 더 이상 미친 황제 앞에 나서서 막아줄 사람도 없겠지만, 그토록 화가 나신다면 어쩌겠어요?
원하시는 대로 내지르고, 그 감당은 이제 직접하시는 수 밖에요.”
공작님은 정말로 한대 후려갈기려는 듯 올린 손을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이를 갈며 다시 내려놓았다. 나름 내가 생명의 은인인 걸 자각한 걸까? 아님, 저번 수감 생황이 대단히 끔찍했던 탓일까?
뭐든, 더 이상은 대놓고 나를 막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보며 조금 안도하고 있는데, 공작님이 의자에 앉아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천한 것이, 카밀라의 대역으로 보내었더니 네 본분을 망각한 듯이 구는구나.
그래,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너와 제국이 저지른 일이 대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기는 하느냐?”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마지못해 종속된 헝가리가, 앞으로는 진심으로 종속되야 하는 상황인 거죠.
그리고 카밀라 아가씨의 시댁에 칼을 겨눠야 하는 상황이고요.”
나의 말에 공작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뭐야? 그 정도도 예측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나에 대해 항상 과대 해석을 하는 요하네스가 여기서 저 반응을 본다면 참 재밌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도 나름 거기서 배운 것이 참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알면서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뒀어? 이걸 대체 어쩔 셈이냐? 누가 이걸 감당할 수 있단 말이냐?”
“지금으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이게 제 잘못만으로 벌어진 일인가요? 공작님이 실질적인 원인 제공자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미 일이 벌어진 상황에서, 누군가는 감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걸 인정하고, 되도록 우리에게 유리하게 끌어내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으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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