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
잠시 후, 정적이 일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바실의 칼집에 검을 집어 넣는 소리와··· 율리아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였다.
“어째서···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왜 내 머리카락만 자르고 베지 않은 거야?”
“베었습니다. 팔라이올로구스의 마지막 계승자 율리아노스 팔라이올로구스는 이제 죽고 세상에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라구사의 창관에서 우스타샤로부터 구출한 쥴리아만 있습니다. 쥴리아로서 남은 생을 살아가십시오.”
바실의 말에 다들 경악했다. 당장, 황제부터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아. 하지만 그건···”
“아버지. 당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이에 대해서 아버진 간섭하실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율리아도 격앙됨을 넘어서서, 분노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언제 너에게 목숨을 구걸했느냐? 필요없으니 죽여! 더 이상 이 지옥 같은 나락의 생을 이어갈 자신이 없으니 그만 끝내달라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다시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내게 더 이상 삶에 의미는 없단 말이야. 너는 나를 이긴 승자잖아. 그러니, 승자의 권리를 행사해. 오직 너만이 그럴 수 있어.”
“네, 말씀하신 대로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니, 당신의 생명 또한 저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유지할 것을 명합니다. 패자인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지 마. 바실··· 잔혹한 동정이야. 왜 이러는 거야? 지금의 나에게는 삶이 더 가혹하단 말이야. 그냥 끝내줘. 먼저 가신 엄마를 보고 싶어. 그러니··· 제발 불필요한 자비로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보내줘. 제발, 나의 승자시여···”
그리고 율리아는 거의 흐느끼며 바실의 발을 붙들고 매달렸다. 그러자, 바실은 격한 목소리로 화를 냈다.
“어리광 좀 그만 부려, 형!!!”
“······!!!”
“죽음은 끝이나 해방이 아닌 침묵과 회피에 불과해. 아직 다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왜 지금 벌써 남은 생에 의미가 없다고 결정짓는 거지? 나에게 나락에서 기어올라온 것을 항상 자랑삼아 지껄일 때는 언제고? 해냈잖아. 이미 한번 성공했잖아? 내가 있는 곳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왔잖아. 그럼 두번은 왜 못해? 인생의 4분의 1도 살지 않고선 남은 생이 절망이라느니 의미가 없다느니 하는 응석은 집어 치워.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모든 생의 순간은 다 하나하나가 기적으로 이어져 온 삶이었잖아? 그러니, 그걸 함부로 내다버리는 것은 내가 용서 못해.
살아. 살아서 원하는 삶을 다시 손에 넣어. 남겨진 생에 의미를 부여해. 그리고 자신이 가진 재능과 자산을 죽음으로 묻어버리지 마. 그러면 틀림없이, 그 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 오리라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내가 도와줄게. 그 나락의 구덩이 위에서 올라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줄게. 황제로서도, 동생으로서도, 바실로서도 그것이 내가 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해. 그러니, 허락도 없이 죽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어. 내가 살린 목숨이니,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서 살아. 그런 식으로라도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면 그걸 부여해 주겠어. 살아. 명령이야.”
율리아의 눈에서 혼란스러운 빛이 번져갔다. 그리고 격한 감정의 기류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끝에서 내린 그녀의 반응은··· 통곡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흐으으윽···. 으아아앙··· 흐으윽··· 엉엉엉엉엉!!!”
율리아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격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바실의 다리를 붙들고 마치 그것이 자신의 구원이라도 되는 듯 처절하게 통곡하여 울부짖었다. 그리고 바실은 몸을 숙여 그렇게 울부짖는 율리아를 감싸듯이 안아주었다. 그렇게, 팔라이올로구스의 마지막 계승자는 먼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죽었으며, 다시 태어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율리아의 심문은 마쳤다.
그리고 몇주가 지났다. 나와 바실은 오랜만에 율리아를 방문하러 갔다. 황궁 밖에 별궁으로 사용되는 황실의 안전가옥에 보내진 그녀는 한동안 심하게 앓았다. 마치, 오랫동안 참고 있던 고통과 분노가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 쏟아진 듯 고열을 앓으며 몸져 누웠고, 설마 저라다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얼마 후 기력을 되찾았다고 전해왔다. 그래서, 바실은 나와 같이 그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방문한 우리를 맞이한 율리아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형님, 기력을 많이 회복하신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차림이 왜 아직도 여장을 하고 계시는지...”
내 눈쌀이 찌푸려짐을 느꼈다. 뭐야, 이 자식. 그냥 여장도 아니고 아주 작정하고 여장을 하고 있잖아? 바실이 잘라버린 머리 덕분에 이제는 좀 남자처럼 보일 줄 알았는데, 짧아진 머리도 나름 잘 다듬고, 옷차림도 예전에 창관의 화려한 모습 대신에 왠지 청초한 모습으로 꾸미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이 정신 나간 자식이 지금 왜 이래? 근데 그의 겉모습 뿐만 아니라 행동도 왠지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흣. 아직도 나를 형님이라고 불러주는 군요. 이제, 서로 형제가 아닌 것도 밝혀졌는데. 이제는 말을 내려 놓으세요. 당신은 이제 저의 형제가 아닌 주인입니다. 그리고 차림에 대해서는, 불편하시다면 갈아 입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제가 편한 대로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지금 와서, 거세당한 몸으로 억지 남자 행세를 해도 어색하기만 할 것 같군요. 허락하신다면 편한 모습으로 있고 싶습니다.”
“옷차림에 대해서는 허락합니다. 그건 당신의 자유죠. 하지만, 말씀은 편하게 해주세요. 지금 와서 하대를 하기는 제가 너무 어색하군요. 그리고, 연배와 선대 황조의 계승자의 입장을 존중해서 제게 예전처럼 편하게 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명을 따를게. 하지만, 가능하면 형님이란 말은 좀··· 보는 시선들이 있으니 누님이라면 또 모를까.”
바실은 당황했고, 나는 기분이 좀 나빠졌다. 뭐야? 이 똘아이 지금 무슨 개수작을 부리는 겨?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보다 다른 용건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서 말하라고 바실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바실은 고개를 끄덕이고 율리아에게 말했다.
“일단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시죠. 지금은, 저희를 따라서 좀 가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동행을 요청드립니다.”
“거절할 입장은 아니지. 그냥 명을 내리면 그걸로 족해. 근데, 무슨 일이지? 뒤늦은 사형 집행은 아니려나? 그렇다면 이번에도 바실 너였으면 좋겠네.”
그녀의 농담에 바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가 머문 별궁을 떠나 조금 황도 외곽에 있는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 수도원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근위대원들을 보고 눈빛을 보냈고, 그들은 준비가 다 끝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근위대원들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고, 어느 방의 앞에서 멈춰 섰다. 율리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실이 그에게 말했다.
“병환을 앓고 계시는 동안, 행정부는 전반적으로 과거 두라초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재수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밝혀내지 못한 증거와 목격자, 그리고 관계자들을 더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생각치도 못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당신께서 꼭 만나보셔야 할 것 같아서 이곳으로 모셔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만나 보시죠.”
그러자 율리아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보고 그는 경악하여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것을 본 바실이 말했다.
“살아 계셨더군요. 용병대에 붙잡혀 끌려가는 와중에 바다로 떨어지셨다고 목격되었는데, 다행히도 죽지 않고 해변가에 흘러와서 인근 수녀원에서 구조되신 모양입니다. 하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시고, 아직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지금까지 숨어 살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이번 조사에서 그 신원이 확인되어 이렇게 모셔올 수 있었습니다. 만나보세요. 어머님이십니다. 안나 황녀님이십니다.”
바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율리아는 달려갔다. 그리고 방에서 눈물을 이미 흘리며 장성한 자신의 아들을 보고 격하게 반응하는 엄마에게 안겼다. 진위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여장한 모습이 완전히 판박이였으니깐. 두 공황위 시대의 격통 속에서 시련을 겪고 헤어진 두 모자는 그렇게 서로 상봉하였다.
“어머니!!!!!!”
“오오오··· 나의 율리안. 네가 살아있었구나.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엄마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
서로 쏙 빼닮은 두 모자는 그렇게 한참 동안을 울부짖으며 감동의 재회를 맞이했다. 바실은 그런 두 모자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려는 듯 조용히 문을 닫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도, 라구사에서는 그 소동의 여파가 계속 이어지고, 그 후로도 이번 사건은 오랜 시간 제국에 여파를 남겼다. 하지만, 일단은 지금 이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그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처럼 한건 해결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돌아오는 길에 마차에서 바실과 귀가할 수 있었다. 바실은 남겨두고 온 율리아와 안나 황녀의 모습이 여운에 남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다가 문득 나를 보고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야 좀 끝이 났다는 기분이 드네요. 참 파란만장한 모험이었죠.”
“그러게요. 과거 안나 황녀님을 모셨던 황제 폐하와 5인방의 전설이 무색해질 것 같네요. 아마 그때 여정을 시작한 우리 4명과 율리아를 합쳐서 새로운 5인방으로 그 동네에서는 전설 같은 것이 남지 않을까 싶네요.”
“공녀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사과드립니다. 제 무리한 억지로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셨죠.”
“아니에요. 뭐, 방관할 수는 없었던 일이었으니깐요. 엄청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체 일생 동안 한번 겪어 보기 힘든 일을 몇가지나 겪은 건지.”
“감사합니다. 수고하신 것에 대해서 제가 개인적으로 보상을 드리고 싶은데요. 원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런 바실의 말에 나는 조금 장난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바실에게 말했다.
“아, 한가지 있어요.”
“그게 뭐죠?”
“황제 폐하와의 키스요.”
“아, 네··· 쿠헉!!! 쿨럭쿨럭!!! 네? 뭐라고요?”
당혹해 하는 바실의 말에 나는 조금 사악한 느낌으로 살짝 율리아를 의식한 느낌으로. 말했다.
“지하 수로에서 있었던 일, 역시나 좀 불쾌해서요. 다른 기억으로 덮어버리고 싶네요. 제국의 황제 폐하라면 어디 가서 자랑하기엔 충분하겠죠?”
“네? 네네네? 하, 하지만··· 저는 마음의 준비가!!! 흐읍!!!”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가볍게 당황하는 바실에게 입술과 입술로 터치.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바실은 치명적인 반응이었다. 살짝 넋이 나간, 바실을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를 우월감을 조금 만끽하며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을 유쾌하게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라구사에서 벌어진 일은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치도 못한 대형 사고가 한가지 더 남았으니···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동이에요? 전 행정부 관료가 다 벌집을 쑤신 것처럼 난리가 나서 감사를 진행한다뇨?”
“공녀님, 큰일이 났습니다. 우리 판데모니움 행정부가 들어선 이래 사상 초유의 사건이 터졌단 말입니다.”
7대 악마들은 격한 표정으로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뒤에서 직원들이 소리치는 함성이 들려왔다.
“이 간도 큰 새끼!!! 정신줄을 제대로 놨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유도키아 황후 마마가 수립한 판데모니움 내각에 그런 만행을 저질러?”
“미친 놈이 틀림없어. 황실 공금으로 유흥업소를 다녀와서 그 영수증을 청구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당장 찾아내!!! 라구사의 La dolce vita에서 그 영수증을 끊은 카밀이라는 놈을 반드시 찾아내. 잡아서 죽여달라고 비명을 지르게 만들어 두겠어.”
어··· 어라? 누구라고? 그리고 그때 7대 악마들이 분노해서 물었다.
“공녀님, 혹시 누군지 모르십니까? 수소문 해본 결과 대단히 뺀질거리고 건들먹거리는 양아치 새끼라는 증언이 있는데, 황실 공금을 사용한 걸 보면 아마도 관료 중에 한명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그 자식을 잡아 오라고 유도키아 황후 마마가 난리가 나셨습니다.”
“아··· 아하하하··· 글쌔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하하하? 누굴까나? 그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녀석은?”
결국 제국 역사에 전설로 남았던 판데모니움 행정부도 그 전설의 에이전트 카밀을 찾아내는 것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로도 여러 번, 전설의 에이전트 카밀은 제국 행정부를 농락하는 만행을 여러 차례 저지르고도 끝까지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 수많은 역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항상 하고 싶은 한마디. 나 정말 집에 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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