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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소원에 따라, 국장이 아닌 수도원에서 주관하는 사제장으로 치뤄진 그의 장례를 바실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관 후 미사로 마지막 장례 절차가 끝나자, 바실은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그의 스승에게 자신이 한 약속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안심하십시오. 반드시··· 스승님의 소망을 이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바실은 고개를 돌려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를 보면서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저는 이제부터 스승님이 저에게 당부하신 마지막 유지를 수행하러 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승님의 바램대로 철저하게 제가 가진 권력과 배경을 배제한 조건 하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불만이 있으신 분은 저와 동행하지 말고 지금 황궁으로 돌아가세요.”
그러자,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선 것은 율리아였다.
“바실. 나는 항상 너의 의견에 순종해. 하지만, 괜찮겠어? 에파미논다스경의 조건대로 유지를 수행하려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부딪치는 수준의 도움 밖에 줄 수 없을 것 같은데?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냥 금괴를 잔뜩 쥐어주는 것을 더 선호할 것 같다는 생각 밖에 안드는데.”
“형님의 조언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제가 스스로 납득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아버지라는 존재의 가치가 겨우 금괴 몇 개에 불과한가요?”
“응? 아버지의 가치? 내 기준에서 보면 금괴보다 한참 아래인데? 손녀를 덮쳐서 후손 본 개새끼한테 금괴는 과분하지.”
“아··· 생각해보니, 제 경우도 딱히 금괴보다 높진 않을 것 같네요. 아, 씨··· 그냥 금괴가 맞나?”
야, 그 인간이 금괴보다 한참 이하라는 건 동의하지만 그걸 네가 말하면 안되지!!! 그리고, 그런 나의 마음의 소리를 대신 대변한 것은 의외로 근위대장이었다.
“이 멍청이들아!!! 스승님 유언 제대로 수행해!!! 돌아가신 아부지! 왜 저 꼴통들 부친들이랑 엮여서 과로사를 해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 어휴, 내가 미쳐···”
뭔가, 총체적으로 난국이네. 아무튼 근위대장의 말에 율리아는 어께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바실은 이내 농담을 사과했다. 그리고 우리는 에파미논다스 경이 남긴 편지의 기록을 근거로, 그분의 모친과 딸이 살고 있다는 할키스로 향했다.
할키스는 에우보이아 섬과 그리스 반도가 연결된 좁은 해협에 위치한 도시다. 4차 십자군 당시, 제국이 베니스에 유린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베니스의 손에 떨어져서 이름도 네그로폰테로 바뀐 적이 있었다. 에우보니아와 그리스로 연결된 교통의 요지였기에, 베니스의 점거 이후 내전기에도 오랫동안 그곳을 손에 넣으려는 세력들의 각축전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도착한 할키스는 제법 전화를 극복하고 중흥하고 있는 제국의 상황과 맞물려 묘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시가지에서는 아직도 내전기에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의 잔해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지만 항구에서는 안정된 정세로 인해 활발해진 교역의 번영으로 호황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후의 피해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덧칠한 느낌? 그것이 할키스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할키스에서 우리는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에파미논다스 경의 유지 때문에 바실은 철저하게 우리의 신분을 함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왠지 지난번 라구사의 느낌으로 주변에 시선을 끌지 않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도달한 곳은, 항구에서 조금 외진 곳에 위치한 낡은 주점이었다.
“주··· 주점이네요. 그것도 상당히··· 너저분한.”
당황한 쿠타이의 말에 율리아가 놀랄 것도 아니라는 톤으로 말했다.
“내전기에 귀족가 자제도 아닌 평민 출신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될 수 밖에 없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타당한 결과야. 수위는 저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폭넓은 의미에서 작부라고 봐야지. 바실, 돌아가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작부가 낳은 자식이 반드시 네 스승의 딸이라는 장담을 할 수 있냐는 말이었다. 바실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결심을 굳힌 듯 보였다.
“무엇이 되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님의 유지입니다. 저는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들어가시죠.”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까맣게 모르고, 아마 알았다면 결코 들어가지 않았을 곳에 발을 디뎌버렸다. 그렇게 우리의 흑역사는 돌이킬 수 없이 시작되었다. 아오!!! 그때 나도 바실을 뜯어 말렸어야 했어.
그곳은 너저분한 주점이었다. 예전에는 제법 흥했는지 건물의 크기는 크고 오래된 내부 장식은 화려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상당히 쇠락하였는지,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었고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다. 사람보다는 귀신이 더 많을 것 같은 그 낡은 주점에 들어가자, 멀리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시간에 여길 오는 손님이 있다니··· 의외로군. 대충 아무 곳이나 앉으쇼.”
바에서 나타난 사람은, 이곳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를 보고 우리는 긴장했다. 우리보다 조금 연상의 여성. 에파미논다스 경의 편지에 나온 내용과 당시 시간을 역산해서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이 유력하다. 좀 술에 쩔고 피곤한 표정이지만, 나름 미인이고 에파미논다스경을 닮은 구석도 보이는 주점의 여주인. 그녀를 본 바실이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아, 실례합니다. 혹시··· 티모클레아 양이신가요?”
“티모클레아 양은 개뿔이. 그냥, 클레어라고 불러. 젠장할, 엄마 죽고 나서 부를 사람도 없어서, 나도 까먹은 내 이름은 갑자기 왜? 당신들 누구야?”
찾았다. 우리는 안도하였고, 곧 자리에 앉은 우리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호오. 그러니깐, 일생 동안 한번도 본적도 없는 내 아버지라는 양반이 죽었고. 그 양반의 유지로 댁들이 유품이랑 부고를 전하러 왔다는 거지?”
“아,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제국군의 민간 보훈 업무 관계자들입니다. 그래서, 보훈 대상자의 부탁으로 따님을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그분의 유지에 따라서, 에파미논다스 경의 신분은 물론 우리 신분을 그녀에게 밝힐 수 없으니, 고심 끝에 짜낸 시나리오였다. 어느 고인이 된 무명 용사의 유지를 민간 보훈 관계자들이 전해주러 왔다는 설정이었다. 실제로 제국에는 내전 이후 그런 일을 대행하는 민간 회사들이 흔한 편이었으니깐. 그리고 그런 우리의 말에 그녀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스쳐지나간 작부가 낳은 딸내미한테 무슨 그런 의리까지. 자기 자식인지 알게 뭐야. 거 되게 순진한 양반이었구만. 근데, 남긴 유품이 고작 이런 잡동사니랑 푼돈 몇푼? 어이구··· 순진한 것도 모자라서 자기 앞가림도 잘 안되는 양반이었나 보네. 이걸 무슨 유품이랍시고. 상식적이라면 거절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이미 고인이라니 그럴수도 없고···”
그녀의 반응이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유품이 정말로 초라했던 것이다. 사제였던 그의 개인 소지품은 묵주와 작은 성상, 그리고 동전 몇푼에 지극히 개인물품들이 전부였다. 마음만 먹었다면 제국에서 장성급으로 화려하게 살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일생 동안 사제로서의 청빈을 지켰다. 그리고 그것은 아는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초라함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의 반응에 바실은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분이 클레어 양에게 남기신 유산이 빈약한 것에 실망하심은 저희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님의 유지가 폄하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분이 남기신 것은 별로 없으시지만, 임종 직전까지 따님의 걱정을 하며 애뜻한 마음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진 것이 많은 분은 아니었지만 하신 일이 없는 분은 아니십니다. 지금 여기 온 저희들은 모두 그분에게 직간접적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런 고인의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클레어 양의 당면한 문제들 대해 능력 범주 안에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남겨진 유산의 빈약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그분의 유지와 저희의 조력이라면 조금은 클레어 양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혹시 저희들이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없으신지요? 그런 것이 있으시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그분을 대신하여 도와드리겠습니다.”
바실의 말에 그녀는 조금 흥미로운 표정을 보이면서도 이내 시큰둥해졌다. 그리고 말했다.
“바라는 일이라··· 뭐, 그런 것이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거 댁들이 가능할까 싶은데?”
“듣겠습니다. 말씀해주시지요. 저희가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바실의 말에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게를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 내가 크게 바라는 건 없어. 난민 출신으로 뒷골목을 떠돌던 엄마가, 고생고생해서 겨우 마련한 이 가게. 이 가게가 예전처럼 번창해서 적당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면 나에게는 넘치도록 충분해.”
“아, 그런 바램이셨나요? 그런 거라면 충분히 수용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훗··· 너무 쉽게 얘기하는 군, 샌님 친구. 여기, 주점이야. 단순하게 술과 음식을 팔고 숙박을 제공하면 가게가 흥하리라고 생각해? 절대 아니야. 뒷골목에서 사람들이 이런 가게를 찾는 이유는 유흥을 바라기 때문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가게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예전에는 제법 장사가 잘되었지. 나름 우리 엄마가 이곳 할키스에서 먹어주는 업자로 유명했을 정도니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인기는 사그라들고, 엄마가 세상을 떠나서 내가 이어받은 이후에는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지.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파리 날리는 신세야. 얼마 안가서 여긴 사업을 접어야 할 지경이지. 근데, 이걸 살릴 자신이 있어?”
그녀의 말에 바실의 표정에서는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그것은 단순한 당황스러움만이 아닌 자신이 잘 모르는 상황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래서, 바실은 그 의문을 담은 표정으로 나름 그 방면의 전문가인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실의 시선을 받은 율리아의 대답은 손으로 크게 X 표시. 그리고 대답했다.
“대충 견적 보니 그림이 나오네. 전형적인 중간에 흐름을 놓친 가게 패턴이야. 확실히 예전에는 괜찮았던 모양이야. 내부 장식이나 사람들의 흔적이 제법 고용하는 언니들 많이 쓰면서 사람 끌어 모았을 곳으로 보여. 내전이 끝난 후에 전후 복구 시기에는 확실히 장사가 잘되었을 거야. 하지만, 전후 복구가 끝나고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점차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지가 외곽이 아닌 항구로 이동하면서 손님이 줄었겠지. 그러면서 매출도 줄고, 에이스급 언니들도 빠져나가고. 그걸 만회하려면 가게 인테리어를 다시 손보고, 뉴페이스들을 멀리서 섭외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자금 부족에 경영자의 여력이 없었겠지. 그 결과가 이걸거야.”
“흐음··· 이 바닥 생리를 좀 아는 언닌가 보네. 그래, 맞아. 정확해. 예전에는 적당히 갈곳없는 애들 받아서 장사해도 먹혔는데, 점차 경기가 좋아지면서 사람들이 고급을 찾기 시작했지. 엄마는 개선을 해보려고 하였지만, 대출빚을 갚느라 여력이 없었고. 결국, 대출은 대부분 상환해서 가게는 우리 손에 들어왔지만, 그 시점에서 더는 수습을 하기 힘들 정도로 장사가 망했어. 그리고, 지금 말한 언니라면 짐작하겠지만··· 진짜 결정타가 생겼지.”
“아아··· 알 것 같군. 경쟁자가 생긴 거지? 항구를 거점으로 한 제법 괜찮은 가게가 생긴거야. 그래서, 안 그래도 수입이 줄던 가게에 치명상을 입혔겠지?”
“점집 차리셔야 하겠어? 그래, 맞아. 경쟁자가 생겼지. 그리고 하필이면 그 경쟁자 녀석은 나랑도 무관하지 않은 놈이었지.”
그런데 그때였다. 가게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가게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걸 본 클레어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빌어먹을.”
“하하하!!!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파리를 날리는··· 응? 오늘은 그래도 손님이 좀 있네? 이게 얼마만의 손님들이지, 클레어?”
“닥쳐! 파르스. 그리고 꺼져.”
나타난 남자는 조금 야비하게 생긴 클레어 또래의 우리보단 조금 연상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왠지 과장된 표정으로 이죽거리며 가게에 들어와 우리 곁의 테이블에 앉더니 비열한 미소를 드리우고 말했다.
“어이어이, 그렇게 손님을 박대하면 안되지. 나도 엄연히 손님이라고.”
“지랄하지마, 이 병신 색꺄. 손님은 무슨. 맨날 와서 모처럼 온 손님들 낚아채서 너희 가게로 데려가는 놈이 무슨 손님이야!!! 도적놈이지.”
“큭큭큭··· 뭐, 그랬나? 마침 그러고 보니 잘되었네. 어이, 거기 외지에서 온 양반들. 이곳 할키스에서 제대로 된 가게를 찾는다면 번지수를 잘못찾았소. 항구에 있는 우리 가게로 오시요. 내, 처음 오는 손님들은 무조건 와인 한병은 공짜로 내드릴 테니 말이요. 그리고 우리 가게에 오면, 제대로 된 할키스 미녀들이 그대들을 반겨줄 거라오. 기대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오. 이런, 직원이라고는 저 늙은 처녀 한명 밖에 없는 망한 가게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말이요.”
그의 비열한 말에 결국 클레어가 폭발했다. 그녀가 파르스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이 새끼야! 당장 꺼져!!! 뒈지기 싫으면 말이야.”
“어이쿠, 화난 포인트가 늙은 처녀야? 망한 가게야? 하지만, 죄다 사실 아닌가? 그러게 진작에 내 말을 들었으면 이런 수모를 당할 것도 없었잖아. 지금이라도 안늦었어. 가게를 나한테 넘겨, 클레어. 내가 소꿉친구의 정을 봐서 괜찮은 값에 매입해 줄 테니 말이야. 그러면 다 해결돼. 너도 이런 망한 가게, 엄마 추억만 붙들고 버텨봐야 도리가 없다고. 현실을 인정해야지.”
“이 자식이··· 정말!!!”
시큰둥한 여장부라고 생각했던 클레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진정으로 분노하고 비통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파르스의 말처럼 그의 말이 다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봐도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을 이 가게는 차라리 매도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바램과는 조금 배치될지도 모르지만, 에파미논다스 경의 유지를 따라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어쩌면 이 매도를 우리가 개입해서 그녀가 손해보지 않고 거래해서 새출발하게 도와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을 담아 대치하는 클레어와 파르스를 만류하려고 한걸음 나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율··· 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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