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1
부다페스트 왕궁의 홀에는 긴장감이 가득 차 있었다.
제국의 부콜레온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홀을 가득 채운 헝가리 고위 귀족들과 왕족들로 그 긴장감은 배가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공간에서 모습을 가능한한 드러내지 않게 한쪽 구석에서 베일을 쓰고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홀의 끝에 문이 열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빛과 함께 사람들이 홀에 들어왔다.
북방에서 온 일행들. 그들의 등장에 긴장감은 더 고조되었다. 그리고 슬로슈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북부 대공, 슬로슈 어버께서 오셨습니다.”
전령의 말과 함께 홀에 등장한 그의 모습을 나는 내 눈으로 처음 제대로 목격하였다.
확실히, 거기 북방의 야수라는 이름에 걸맞는 강인해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다부진 체구에 장신이었고, 과시하듯 두른 짐승 가죽으로 된 외투가 위압적이었다.
그리고 적당히 기른 수염과 장발의 머리가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라는 별명을 입증하는 듯 보였다.
확실히 그의 모습은 홀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자르 귀족들과는 차별되는 모습이었고, 그 모습에 마자르 귀족들은 지레 겁이 질린 모습이었다.
뭐,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게 미리 쫄아 있을 이유는 없지 않나?
나를 대신해서, 우리 측의 표면적인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마티 경도 그를 보고 움찔하며 겁을 먹는 것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슬로슈는 그런 반응을 즐기듯이 여유롭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왕좌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이슈트반 국왕의 왕좌 앞에 다가가자 그들의 일행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슬로슈는 그들보다 몇걸음 더 걸은 후 멈춰섰다.
긴장감이 흐르는 시간이 잠시 흐르고, 슬로슈는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북부의 슬로슈 어버가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주여 우리 왕에게 축복이 내리시길.”
“정말 오랜만에 그대를 보는 군. 그 사이 제법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시 모든 것이 다 해결된 다음 그대, 북부 대공을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감회가 새롭군.
부다페스트에 온 것을 환영하네. 슬로슈 대공. 일어나게.”
살짝, 뼈있는 말일세. 결국 저 말은 제국에게 다 털리고 쪽팔린 꼴을 당하는 동안은 못보다가, 겨우 형식적이나마 그게 끝나고서 본다는 말이잖아.
어디가서 쪽팔리는 얘기는 그렇게 근엄하게 해봤자 의미가 없지 않나요?
내가 그런 푸념을 하는 사이에, 슬로슈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런 그에게 이슈트반 국왕이 말했다.
“세자와 공주들도 인사를 나누거라.”
“어서 오시오. 북부 대공. 이렇게 다시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오.”
“이슈트반 왕세자를 뵙습니다. 근래에 군의 중추에 서서 여러모로 고생하시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세자와 같이 강건한 후계가 왕실을 이끄시는 것을 보니, 아르파드 왕실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신 듯 합니다. 부디 정진하시길.”
이슈트반 왕자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딱 봐도 세자는 노골적으로 그에게 경쟁 의식을 불태우고 있는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세자의 반응에 북방의 야수는 딱히 신경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수사도 되게 무난한 수준으로 하고.
그가 반응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모두가 보란 듯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슬로바키아인들의 그 짐승 냄새는 어지간해서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지? 오랜만에 봐도 악취가 풍기니 말이야.”
“프랑스 마론 인형의 분칠 쩐내도 딱히 달라진 건 아닌 모양입니다. 뭐, 악취는 아니라고 해드리죠.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고 공주.”
분위기가 싸해졌다. 슬로슈 대공은 예법대로 손등에 키스하기 위해 레이디가 손을 내밀길 기다렸지만,
마고는 머리가 솟구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분노한 모습을 부채로 가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뭐여, 이거? 둘이 무슨 일 있었나?
그래서, 슬로슈가 한숨을 쉬며 기다리던 손을 물리자, 이슈트반 국왕이 상황을 수습하듯 말했다.
“서로 예의를 가지고 대했으면 좋겠구나. 일단, 둘의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도록 하고,
일단 인사를 마쳤으니 여기까지 오느라 심신이 피로할 대공을 위해 연회를 마련했소. 일단 가벼운 만찬으로 그대의 환영을···”
“국왕 폐하. 제안해주신 것은 감사드리오나, 우선 저는 저를 초대하신 중요한 일을 먼저 진행하시고, 객에 대한 접대를 나중에 하시길 권유드립니다.
오늘 저를 초대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근위대와 신생 헝가리군의 공개 합동 훈련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의 말에, 다시 한번 왕궁에 긴장감이 감돌고, 자리한 왕족과 귀족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표정이 굳은 사람은 바로 내 앞에서 잔뜩 움츠러든 마티였다. 나는 손을 잡아줘야 하나 싶을 정도로 떠는 그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랬다. 오늘 우리가 슬로슈의 방문에 맞춰서 부다페스트에 오게 된 것은 바로 그가 말한 공개 합동 훈련 때문이었다.
나는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번에 지시한 일은 제법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콘스탄틴노플의 우리 측 대사관에서, 제국군 측이 중대 편성 개편 관련으로 현지에서 시끌하다는 소식을 확인했다.”
“아, 네··· 큰 기대는 안했는데, 그래도 제국군 측이 조금은 저희 의견을 경청한 모양입니다.”
바실아··· 너, 대체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그리고, 의회는 또 뭘 잘못 생각했는지, 공포공이나 10군단의 사례를 확대하는 것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성명을 내고. 10군단은 또 뭔데?
뭔가 사고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시녀장님은 만족하시는 듯 하니 별 상관은 없겠지.
그리고, 그녀는 그런 나에게 연이어 지난번에 얘기하다 말았던 용건을 꺼냈다.
“슬로슈의 방문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네가 해야 할 일도 정해졌고.”
“아, 그런가요? 그럼 저희가 뭘 하면 될까요? 말씀해 주시죠.”
나는 대충 뭘 시킬지에 대해서 마음의 각오는 하고 왔다. 어차피 전력으로 쓰기에는 무리수인 농노들.
하지만, 왕실에서도 잡역에서는 쓸만하다는 인정을 했으니, 시킬 일들은 뻔했다.
슬로슈에게 과시할 무력은 아르파드 근위대가 맡고, 우리는 그 들러리를 시키겠지. 그게 뭘까? 훈련장 공사라도 시키는 걸까?
아니면, 말에 타는 거 받쳐드리는 종자 노릇이라도 하라는 걸까?
뭐든, 사람 대접해주고, 모양 보기 좋은 것은 아닐 것이 틀림없을 테니, 무슨 소리를 하던 흔들리지 않게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항상 내 마음의 준비는 그 이상이 더 필요했다.
“뭐, 뭐라고요? 저희 측 병사들에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근위대가 자기들을 두들겨 패는 걸 그대로 참고만 있으라고 하라고요?”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느냐?
세게드의 병사들을, 부다페스트에서 슬로슈의 앞에서 거행할 근위대와의 합동 훈련에서 모의 교전에 참여시키라고 했지.”
“한가지 덧붙이셨잖아요? 그 모의 교전에서 근위대 측에 그 어떤 공세도 가하지 말라고요.
그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패는 것을 그대로 참고만 있으라는 말이랑 뭐가 달라요?”
“······”
나의 말에 시녀장님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셨다. 그리고 이번만은 나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소리쳤다.
“시녀장님!!! 그건 말도 안됩니다. 대체 그런 어이없는 명령이 어딨습니까?
아무리 허접하고, 근본이 농노 출신이기는 하여도, 그들은 엄연한 헝가리군입니다. 사병도 아닌 정규군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드시겠다고요?
대체, 그러는 이유가 뭡니까?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요!!!”
“의미는 있다. 그래야만 왕실이 살고, 슬로슈가 길들여지니깐.”
눈빛으로 욕하면서, 설명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시녀장님의 말이 이어졌다.
“알다시피, 현재 우리 헝가리에 군사력은 총 4개 그룹으로 정리될 수 있다.
아르파드 왕실의 근위대 1군과 2군.
세게드의 제국의 입김이 닿아 만들어진 헝가리 상비군.
마자르 계열의 아르파드 왕실 방계나 혹은 측근들로 이루어진 지방 영주들의 사병.
그리고 마지막으로 슬로슈의 슬로바키아군이다.
현재, 위의 3 그룹이 왕실의 영향력 아래에서 슬로슈의 슬로바키아군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지.
그래서,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는 슬로슈에게 더 이상의 반항은 완전히 의미가 없다는 쐐기를 박기 위해서는,
단순히 압박하는 것을 넘어 그 격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녀석의 눈에 똑똑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 3개의 그룹 중에서 가장 녀석이 성가셔 할 최정예 그룹.
바로 근위대가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는 사실을 보여줘야한다.”
“아, 뭐 그건 그렇다고 쳐요. 근데, 거기에 우리 상비군이 가서 그런 말도 안되는 바보 연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뭔데요?
그건 전혀 무관한 이야기잖아요? 그냥 근위대의 힘을 과시하고 싶으시면, 근위대 혼자 멋진 열병식을 하시던가 위력 훈련을 보여주시면 되잖아요?
거기에, 왜 누구나가 다 아는 소문난 오합지졸인 우리 병력까지 데려나와 굳이 확인을 하시려는 건데요?”
“그야 당연하지 않느냐? 그 군대는 제국과 연결된 부대니깐 그렇지!!!”
시녀장님의 일갈에 나는 순간 할말을 잃었다. 뭐? 지금 겨우 그런 이유로?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들이 오합지졸인 것은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제국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군대라는 것이지.
그래서, 근위대는 어떻게든 그들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제국을 등에 업은 그 주제도 모르는 농노들이 결코 넘볼 수 없는 상전이 우리라는 것을, 슬로슈는 물론 왕실과 귀족들에게도 보여주어야 한단 말이다.
그래야만,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비로소 왕실에 힘을 납득하고, 제국의 두려움을 잊고, 비로소 순종할 생각이 들겠지.
아직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느냐? 더 설명이 필요하느냐?”
아뇨. 이해했습니다. 뼈저릴 정도로요. 정치 공학적으로는 맞는 말이죠. 나라도 그 상황이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요.
하지만, 참 실망했습니다. 그들도 당신의 백성이고, 당신의 군대입니다.
내키지 않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그렇게 하찮은 광대로 조롱해야만 속이 풀리십니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입밖에 낼수는 없었다.
그리고, 시녀장님은, 아니 어쩌면 저 너머의 마고는 그것을 침묵의 수긍으로 알아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우리들의 광대짓은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결정이 되었다.
회상을 마치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슬로슈의 발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마티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에 마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를 보고 있었고.
베일을 두른 나는 마티에게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어쩔 수 없으니 진행을 하라는 동의를 보냈고, 마티는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앞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헝가리군은··· 이미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훈련장으로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부다페스트 왕궁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진 곳에 마련된, 근위대 훈련장에 도착하였다.
왕실 토지에 거대한 관람석과 경기장의 형태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관전할 수 있게 만들어진 훈련장은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연상케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왕족과 귀족은 물론 상당히 많은 부다페스트 시민들도 몰려와 구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백하게 노골적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소였고 연출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광대 역할을 떠맡아야 할 병사들을 그 무대 위로 내보내야 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고. 심지어는 그 무대도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는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훈련장의 아래에 대기장소로 내려갔다.
그곳에 세게드에서 온 병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 공녀님이시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님. 다들 오신 모양이군요.”
“바깥이 소란스러운 거 보니, 이제 시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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