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1
그냥 화풀이였다. 자기가 속아서 털린 것에 대해서, 그냥 만만한 나한테 쏟아붓는 화풀이.
아니, 솔직히 처음 겪는 일도 아니시잖아요? 전에 미로크슈에서 바실이한테 털렸을 때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텐데?
아아··· 그때는 대신 땜빵할 어떤 정신나간 가짜 공녀가 있어서 별 상관이 없으셨나?
차마, 그걸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기서 애꿋은 화풀이를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오면서 율리아와 나눴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얘기하기로 했다.
나는 율리아가 얘기했던, 지금 상황에 대해서 아르파드 왕실이 취할 수 있는 세가지 방침, 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예상대로였다.
“뭐, 뭐라고? 슬로슈 그 놈과 협상을 하라고?”
“상식적으로 지금의 상황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세게드와 부다페스트의 가도가 이 정도 상황이라면 사실상 전 헝가리가 쑥밭일 겁니다.
이미, 선공을 빼앗긴 시점에서 그걸 만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슬로슈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협상을 통해 당장 내전을 진정시키심이···”
“닥쳐라!!! 감히 네가 그런 망언을 잘도 어전에서 지껄이는 구나.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아르파드의 모든 피가 땅에 뿌려졌으면 뿌려졌지, 죽어도 그 슬로바키아 도적 놈과 협상하는 일은 주님에게 맹세코 없을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결과를 확인하니 암울했다. 그래, 율리아가 그랬었다.
“첫번째는 협상이다. 현실적으로는 지금 상황에 가장 현명한 결정이지. 뭐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뭘 하던 해야 하겠지.
그리고 의외로 기습당한 뒤 먼저 협상을 제안한 상황에서, 슬로슈도 영주들의 눈치를 보느라 무리한 요구를 못할 걸?
하지만, 콘스탄틴노플의 주정뱅이는 바로 받겠지만 너희 왕은 그거 안할거다. 그 망할 자존심 부리느라고.”
정답이었네. 아니, 그 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부다페스트가 포위된 상황에서 풀 엄두도 못내면서, 평화 협상은 못한데?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 기각되자, 나는 결국 두번째 방법을 제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의 도움을 청하도록 하시죠.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무립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잠시 대답을 기다리며, 율리아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두번째는 도움이다. 정치적으로 망한 상황에서 이걸 타개하려면 외교적인 역량을 동원하는 수 밖에 없겠지.
다행스럽게도 헝가리는 든든한 외부에 도움을 줄 존재가 있지. 바로 우리 제국. 근데··· 나는 너희 왕실 분위기를 보면 이것도 좀 회의적으로 본다.
거기서 우리 제국 측 도움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는 걸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까나?”
그러게. 나도 동감이야. 당장 나와 우리 군대만 해도, 무슨 제국의 괴뢰군 수준으로 혐오하는데.
그런 이슈트반 국왕이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 이 상황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그 방법만이 최선일 테니.”
“네? 아, 그러시군요. 다, 다행입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이슈트반 국왕의 긍정적인 말에 조금 놀라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뭐래? 제국이라면 치를 떨던 양반이 그래도 급하니깐 자기 편한대로 동맹이라는 입장을 이용하겠다는 건가? 조금은 다시 봐야하나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은 안도하며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바로 제국 측에 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당장, 연합사령부로 신속대응군을 지원받으면 예상 일자가···”
“아니. 제국 측에 지원을 요청하지는 않는다.”
“네. 네에?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으신다뇨? 방금 외부의 도움을 청하신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런 나의 말에 이슈트반 국왕 대신 대답한 것은 마고 공주였다.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도움은 청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제국은 아니다. 우리는 신성동맹에 도움을 청할 것이다.”
“네에?!!!!”
순간, 뭔가 마시고 있었다면 뿜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지금 내가 뭘 들은거야? 어디에 도움을 청해? 신성동맹?
아니, 미친.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나는 경악하며 소리쳤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성동맹이라뇨? 지금 헝가리는 제국의 동맹이라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하녀 따위가 그걸 굳이 자각시켜주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 지적하지마!”
“공주님! 그걸 아시면서 신성동맹에 지원을 요청하시겠다뇨?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성동맹의 병력이 헝가리에 진입하는 것을, 제국이 가만히 두고 보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뭐? 가만히 두고보지 않으면 어쩔건데? 다시 한번 혈태자가 달려와서 헝가리를 유린할 생각인가?
퍽이나 든든하신 동맹이구나. 수만 틀리면 다짜고짜 달려와 힘으로 해결하는 파트너라니. 제국에서 생각하는 동맹의 자격은 그게 일반적인 것이냐?
그리고, 설령 그렇게 하겠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하려무나. 어차피 헝가리 전역은 지금 슬로슈의 손아귀에 놓였으니.”
“지나친 주장이십니다. 제국은 헝가리를 도울 것입니다. 그걸 그냥 수용하시면 될 것을, 왜 적성국인 신성동맹을 불러들이신단 말입니까?”
“우리의 자주권은 우리가 결정한다. 그리고 적과 아군도 우리가 결정하고.
지금의 상황에서 제국이 들어와서 우리에게 힘을 과시하고, 너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것이, 슬로슈와 비교해서 더 나을 것이 무엇이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제국이 마냥 우리를 지지한다는 보장을 어떻게 믿나?”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
나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질문에 마고가 소리쳤다.
“제국이 아르파드가 아닌 어버에 양다리를 걸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
솔직히, 나는 지금 저 미친 북방의 야수가 정치적 외교적 배경없이 날뛰는 것에 대해서, 믿는 구석이 제국이 아닐까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단 말이다.
그에 대해서,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느냐?”
경악하고 싶은 수준의 현실 판단이다. 나는 마고 공주의 말에 어이가 없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동맹국인 제국을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 대신에 적성국이지만 개인적인 라인이 있는 신성동맹의 힘을 빌어 반란을 진압한다고? 어떻게 그런 미친 발상이?
그런데, 순간 나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봤다. 응? 설마··· 제국이 정말로 슬로슈를 후원한다면?
어라라? 의외로 제국 입장에서는 손해볼 것이 없겠는데?
툭하면 신성동맹에 붙어서 제국에 뒷통수 칠 기회만 노리는 아르파드 왕실보다는, 고립된 슬로슈의 어버 가문을 헝가리의 왕으로 밀면?
제국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든든한 파트너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 이거 정말이야? 한번 해볼만한··· 어?
잠시 내 머리를 두들기고 싶었다. 아오!!! 너무 제국에 오래 살았어. 생각이 다 그렇게 돌아가는 걸 보니.
그래서, 나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마고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 너도 그 주장을 강하게 부정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이구나. 더 말이 필요하느냐?”
나는 그녀의 말처럼 정말로 더 할말이 없었다. 왕실이 보이는 제국에 대한 의심은 인정.
그럼에도 그런 막장스러운 의사결정을 한 생각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겠다는 것에 수긍.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조금 의외의 것을 보았다.
그것은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항상 제멋대로에 당당하기 그지 없던 마고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라? 본인도 의외로 자기가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에 자신이 없는 건가?
그러나, 더 이상의 설득은 불가능했고, 나는 상황의 개선을 위한 의견을 전진시키지 못하고, 일방적인 통보만을 들은 이후 회의실에서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대사관의 숙소로 돌아오니 우리 일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나라 망신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했다.
그 중에서 특히, 이 웬수. 이 자식이 또 얼마나 비아냥거릴지 생각해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데···
“흐음. 의외로 그 지적은 예리하네.”
“그래. 비웃고 싶으면 얼마든지 비웃··· 응? 뭐라고? 지금 뭐라고 그랬냐?”
율리아는 의외로 진지한 얼굴로 내가 한심하게 평가했던 아르파드 왕실의 의견을 평했던 것이다.
“너희 왕실이 머저리들이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 배후가 있다는 지적은 의외로 예리한 분석이긴 해.
슬로슈는 결코 무능한 자가 아니야. 지금까지 분석으로도 그랬고, 이번에 벌린 상황을 통해서 그건 확실해졌지.
그렇다면, 그가 이번 일을 아무런 뒷배경도 없이, 단순한 복수심과 헝가리 내부에서의 승산만 계산해서 벌이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
누군가, 그 자가 믿고 봉기를 일으킬 배경이 되어주었을 꺼야.”
“그렇다면, 네 말대로라면··· 마고 공주의 말이 옳다는 거냐? 그럼 그 말은···”
차마, 뒷말을 더 이어가진 못했다. 제국이 슬로슈에게 양다리를 걸쳤냐는 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도무지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던진 질문에 율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확실히 제국이 네 뒷통수를 쳤다는 가설도 배제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가능성은 좀 낮게 봐도 될거야.
황제 입장에서, 아직 너는 그렇게 1회용으로 쓰고 버릴 정도는 아니거든.
그리고, 네 뒷통수를 칠 생각이라면, 굳이 그렇게 어렵게 할 이유없이 나한테 지시만 하면 간단한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지시는 받은 것이 없네.”
이 새끼가 지금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실실거리고 있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말이 사실이라 생각하고 안도했다.
그러자, 이어지는 의문이 있었다. 제국이 아니라면, 그럼 누가? 나는 유력한 다음 후보를 떠올리고 말했다.
“서, 설마··· 신성동맹이? 그건 말도 안돼.”
“어째서?”
“만약에 그렇다면, 아르파드 왕실 측에서 그걸 감지하지 못했을리가 없잖아? 그리고 신성동맹 측도 그럴 이유가 없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신성동맹에 구원을 청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나 하는, 우리 왕실 대신 슬로슈랑 손을 잡고 내란을 선동할 이유가 어딨어?
그냥, 우리 왕실을 조금만 부추겨도 금방 원하는 건 다 손에 넣을 수 있을텐데.”
“합리적인 분석이긴 한데, 그런 말 하면 좀 창피하지 않냐?”
제길, 당연히 창피하지. 나는 내 뒷목을 다른 의미로 나가게 만드는 왕실에 분노하였고, 그걸 보며 율리아가 말했다.
“일단 네 말도 맞아. 신성동맹의 최고 의사결정자들은 굳이 슬로슈 같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큰 관심이 없을 거야.
근데, 여기서 우리는 한번 생각해볼 것이 있지. 의사결정 체계가 단일화된 제국과는 달리 신성동맹은 여러 열강의 연합체야. 당연히 그 안에 의견도 다양하지.
만약에, 정치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그쪽 입장과 무관하게, 그 내부에 누군가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걸 실현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그 다른 생각을 가진 누군가가, 정치적으로 쉰내나는 결정이나 하는 머저리가 아니라, 우리집 길치처럼 결과 지향, 실력 우선의 실용주의자라면?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슬로슈가 가진 포지션에 시선을 향하지 않을까?”
“뭔가··· 있구나. 이번 일이 벌어지기 이전에 파악한 뭔가가? 리키스카에서 확인된 정보인 모양이지? 컨피덴셜이야?”
“딱히. 기밀로 하기도 뭐한 가설에 불과하지. 하지만, 묘하게 서방 측에 연결된 리키스카의 연락망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어.
저쪽에서도 누군가 우리와 비슷한 존재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그런 움직임이 말이야.
지금까지는 그 정체가 모호했는데, 왠지 이번 슬로슈의 거사 이후 그 움직임이 잠잠해졌지. 마치 꼬리를 자르듯이 말이야. 흥미롭지 않아?”
율리아의 말에, 나는 흥미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저쪽에 누군가가, 우리와 비슷한 포지션에서 우리를 주시하는 자가 있다고?
대체 누가? 그리고 그 정도의 역량을 갖춘 존재가 신성동맹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와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머리 속이 복잡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확한 적은 차라리 편하다. 강약과 무관하게 그 실체가 보이기는 하니깐.
하지만, 모호한 적에 대해서는 먼저 두려움이 앞선다. 대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자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서, 나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그걸 보며 율리아가 말했다.
“뭐, 일단은 그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지.
지금까지는 우선 순위에서 미뤄뒀지만, 이번 상황까지 나오는 걸 보니, 조금은 집중할 필요가 있으니깐.
그보다는, 일단 지금 당면한 과제에 대해서 대응을 해야하지 않아?”
“지금, 당면한 과제? 아! 그렇지. 그럼 마고 공주를 설득해야 하겠구나.
이번 상황에서, 슬로슈의 배후는 제국이 아니고, 신성동맹일 소지가 있다고. 그러니, 도움을 청하는 방향은 제국으로···”
“너 바보냐? 가서 한번 그렇게 말해봐라. 잘도 믿어주겠다.”
율리아의 말에 나는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겠지. 내가 가서 아니라고 해봤자 들을 사람이 아니지.
오히려, 나한테 제국을 두둔하고 왕실에 반기를 든다고, 슬로슈랑 한패가 아니냐고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야.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아오,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상황은 경위야 어찌되었건, 왕실이 신성동맹에 도움을 청하려는 것은 막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쿠타이가 말했다.
“결국, 문제는 왕실 측이 누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거잖아? 그럼 방법은 간단하겠네.
누나 대신에 그들이 믿을 만한 사람이 가서, 그걸 알려주면 되겠네.”
오! 저 꼴통새퀴가 왠일로 그럴싸한 의견을? 나는 감탄하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잠깐만. 우리 왕실이 믿어줄만한 그런 권위가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누가 있지? 그리고, 저 자식은 왜 저렇게 실실 쪼개?
순간, 나는 흠칫하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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