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1
이슈트반 국왕이 입을 열었다.
“마고의 말에 해명을 해보게, 라즐로 공.”
“이미 예전에 보고드렸던 것처럼, 저에게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카밀라를 그곳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미덥지 못한 아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제국은 대역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왕명을 독단으로 어긴 것은 송구하오나, 그것으로 우리는 적의 요구도 수용하면서, 신성동맹과의 연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를 인정해 주십시오. 그리고, 독단에 대한 죄는 이미 용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중에 출발했지만, 소수 인원으로 먼저 앞질러 대사관에 도착해 있던 공작님이 이슈트반 국왕에게 변명을 하였다.
하지만, 그런 공작님의 변명에도 왕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왕이 말했다.
“그래, 용서했었지. 독단으로 보낸 사실에 대해서는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대의 독단으로 보낸 천한 신분의 대역이, 국왕인 나와 동격에 가까운 지위로 돌아올 거라는 보고는 받은 적이 없네.
내가 이걸 어디까지 납득해야 하는 거지? 나중에 자네가 독단적으로 제국을 등에 엎고 나 대신 누군가를 왕좌에 올릴 때 까지? ”
“아, 아닙니다. 그건 결코 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건 전부 다 제국 측에서 의도한 것입니다.
저 역시도 영문도 모르고 당했습니다. 저 또한 그들의 만행에 대한 피해자입니다.
외교 사절로 파견된 제가 그곳에서 무슨 수모를 겪고 돌아왔는지는, 이미 보고를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다 제국의 사악한 농간입니다.”
그렇게 변명한 공작님은 말을 마치고 슬그머니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그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고 말하듯이.
속에 확 열불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떠맡은 일, 원래는 공작님 몫이었잖아요?
그리고 상황이 이 지경으로 막장이 된 것도, 황궁에서 말도 안되는 난동을 부리고, 황후 마마에게 반말 깐 공작님 탓이잖아요?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그 말을 받은 것은 왕이 아니었다.
“참 편리한 변명이군요. 제국의 농간이라. 뭐든 제국의 탓을 하면 다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카밀라도 아닌, 그녀를 모시던 하녀를 하루아침에 우리 헝가리의 군사 책임자로 만들어 돌려받은, 듣도 보도 못한 만행에 대한 변명으로 치졸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라즐로 공이 사실은 제국과 한통속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군요.”
그러자, 공작님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주님에게 맹세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공주, 제가 어떻게 그 흉악한 놈들과 한 통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세월, 오랜 시간 왕당파의 일원으로 아르파드 왕가를 지키고, 신성동맹의 연계를 주장해온 저입니다. 그건 말도 안되는 주장이십니다.”
“그럼, 템즈의 몸종이 하루아침에 사실상 헝가리의 총독이 된 건 말이 되고요?”
“그, 그건···”
말문이 막힌 공작님을 뒤로 하고, 마고는 마치 연출된 동작을 하듯이 천천히 일어서서 알현실을 걸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흠칫하는 기분을 느꼈으나, 어떻게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는 마치 사슴을 발견하고도, 당장 사냥에 나서지 않고 위압하려는 사자처럼 내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나를 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뿐만이 아니죠. 라즐로공. 당신이 해명하셔야 할 일은 이번 상황만이 아닙니다.
그 동안 당신이 그토록 호언장담했던 제국 내부의 첩자의 의미.
그것이 실제로 신성동맹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그 말도 안되는 결과에 대해서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순간, 나는 흠칫하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신성동맹과 관련된 일? 설마···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시리아, 불가리아, 베네치아, 조지아. 그 외에도 수많은 지역에서 벌어진 신성동맹 측에서 요구되었으나 무산된 공작들.
그 일에 대해서는 대체 어떻게 해명하실 생각이십니까?
담당자의 무능?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정작 제국 측의 생각이 다른 모양이군요. 이렇게 근사한 감투를 씌워서 보낸 걸 보면 말이죠.”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는 못했지만, 시선을 그녀에게 향했다. 이 여자였구나.
지금까지 나에게 전달된 말도 안되는 난이도의 공작 지령. 바로 여기서 내려온 거 였어.
바로, 이 여자가 내 몸에 묶인 꼭두각시 줄을 뒤에서 조정하던 인형사였던 거야.
나는 처음으로 마주하는 내 영혼을 쥐고 흔드는 흑막의 실체를 보고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시작은 공작님이고, 행동은 시녀장님에 의해 이뤄졌지만, 그 뒤에 있던 것은 이 여자였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그 모든 시련들이 전부 다.
그녀가 곧 신성동맹의 의지이자, 어둠 속에 숨은 제국의 대적자였던 것이다.
내가 예상치 못하게 조우한 그녀에게 충격을 받은 사이에, 그녀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발언한 것은 이슈트반 왕세자였다.
“분위기가 너무 무겁군요. 좀, 가볍게 기분 전환이 될 만한 이야기라도 하시죠.
의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작님 덕분에 유럽 왕가의 결혼 시장에도 상당한 지각변동이 벌어졌죠.
신성동맹의 고귀한 아가씨들이 줄지어 예정된 혼담을 파기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에게도 이게 날아왔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에서 물망에 오르던 제 반려가 될 처자들이, 더 이상 그 논의를 하고 싶지 않다는 서신입니다.
제가 좀더 독신 생활을 즐기려는 걸 어떻게 알고 이런 배려까지? 제가 감사드려야 하겠죠?”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결혼을 하고 싶으면 헝가리 처녀들도 많은데 굳이 왜 거기서 찾다가 무산되서 빈정거려?
거기다, 속마음은 아니라고 해도 표면적으로는 친 제국 성향이어야 할 왕실의 왕세자가 저런 생각이라니.
국왕보다는 좀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왠지 오늘 보니 너무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받은 것은 마고 공주였다.
“뭐, 오라버니의 혼담이 무산된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신성동맹 측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측에 제법 든든한 끈을 아직 두고 있으니깐요.
극비 사항이긴 하지만 진짜 템즈의 꽃이 바이에른 용공자의 반려로 보내진 상황이죠.
그러니, 신성동맹은 오라버니의 혼담에 큰 미련을 두지 않을 겁니다. 라즐로 공작님에게는 좋은 상황이네요. 든든한 사위를 두셔서 말이에요. 그렇죠?”
“고, 공주. 결단코 그것은 오해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카밀라를 정혼자로 점지한 것은 오히려 바이에른 측이었습니다. 용공자가 직접 구혼하였단 말입니다.
결코 제 개인적인 꿍꿍이로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상황이 너무 절묘하지 않습니까?
신성동맹에 그리 든든한 라인을 극비에 두고 계신 공작께서, 이번에 제국에도 생각치도 못한 감투를 쓴 가짜를 보내 그 관계를 의심케 하다니 말이죠.
저도 참 난감하네요. 억지로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음해하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이리 절묘하니 말입니다.”
공작님은 식은 땀을 흘리며 쩔쩔 매고 있었다.
말은 나긋나긋하게 하고 있지만, 마고 공주는 명백하게 공작님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도 두려움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강적이다.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의 흑막답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야.
귀족 특유의 오만함과 고고함을 가지고, 그러면서도 품위와 고상함을 잃지 않고 자근자근 밟아대고 있어.
내가 모셨던 순하기만 하던 카밀라 공녀님과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저런 사람의 공격의 방향이 설마 나에게 향한다면?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금방 돌아왔다.
“저는 맹세컨데 제국과 그 어떤 야합도 하지 않았습니다. 되려, 지독한 수모만 당하고 왔단 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지금, 제국이 왜 저러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건 제 탓이 아니라, 제국이 감투를 씌워 보낸 저 아이 탓일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그들과 내통하고 신성동맹을 음해하려는 이중첩자로 보는 것은 그만둬 주십시오. 전부 저 아이 탓입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혐오의 시선이었다. 나는 두려우면서도 조금 기가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선의로 공녀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대역을 맡았던 건데.
왜 나는 지금 조국의 왕실에게 이토록 지독한 악의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걸까?
한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더 숙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나를 보는 시선들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것은 연민이나 동정은 아니고, 의외로 나의 모습을 보고 당장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대화를 다시 주도하며 나선 것은 마고였다.
그녀가 갑자기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말했다.
“이름이 뭐냐?”
“네? 카, 카밀···”
“다신 두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 진짜 이름이 뭐냐?”
“아, 아그네. 아그네입니다. 윽!”
갑자기 고개가 들려졌다. 그녀가 손으로 내 턱을 잡고 고객를 위로 치켜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보며 여전히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어이없는 일이군.”
“네, 네?”
“거친 손. 팔과 다리에는 노동으로 생긴 근육에 상채기 투성이. 피부도 거칠기 짝이 없고, 머리칼도 푸석푸석하고.
용모를 가꾸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는지, 화장기라고는 없는 얼굴.
어느 시궁창에서나 흔하게 볼 고귀함이나 고상함이 전혀 없는, 흔하디 흔한 농노의 여식이로구나.
대체, 이런 꼬락서니로 어떻게 템즈의 꽃을 사칭하고, 어떻게 미친 황제를 유혹했지?”
순식간에 3가지 감정이 동시에 폭발하듯 솟구쳤다.
첫번째는 황당이었다. 뭐? 내가 누굴 유혹해? 그 미친 황제를?
상상만 해도 어이가 날아갈 것 같았다. 그 한심한 인간을 엮은 것도 엮은 거지만, 당장 내 눈에는 황후마마가 도끼들고 뭐 쪼개는 장면이 눈에 선했으니.
여보세요, 공주님. 저도 눈깔이라는 것이 있다고요. 왜 날 그 인간이랑?
두번째는 짜증이었다. 그녀의 나에 대한 미모 품평에 살짝 짜증이 날 것 같았다.
내가 확실히 템즈의 꽃을 사칭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있는 건 인정하지만, 나름 제국에서는 박색이라는 소리 듣고 살지는 않았는데.
제기랄, 그래 나 부엌일 하고 빈번하게 벽타고 튀느라 상채기에 근육잡혔다. 그걸 굳이 지적까지.
세번째는 당혹이었다. 지금, 내가 이 망할 감투를 쓰고 귀국한 것이 내가 무슨 배갯 송사라도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인식이다. 황제는 병신이어도 제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나에게 대하는 마치 제국이 패전이라도 하고 물러간처럼 안하무인으로 구는 태도도 다 이런 인식에서 기인한거구나.
지나치게 안일하고, 지나치게 오만하다. 지금 상황은 명백하게 제국이 우릴 봐준거라고.
하지만, 그 말을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없이 있는데, 거기 대꾸한 것은 이슈트반 왕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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