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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에 공작님은 한참 동안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잠시 후 체념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기랄. 천한 농노 출신 유모의 딸년이 이제 나를 훈계하는 군.
뭐? 그게 최선이라고? 좋아. 그럼 어디 얘기나 들어보자.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네 알량한 생각을 말해봐라.”
“일단은, 제국의 요구를 수용해서 군의 재편성을 하는 업무를 시작하시죠.
이걸 거부하는 순간, 제국은 지금까지의 반응은 장난으로 치부될 정도로 진지한 반응으로 우리를 유린할 겁니다.
그러니, 진행은 하되, 되도록 이 과정에 태업을 하도록 하시죠.”
“뭐, 태업?”
“네. 다행스럽게도 제국 측에서는 우리 헝가리 측의 군사 재건의 책임자로 저를 임명하였죠.
제국 측에서는 동맹국에 믿을만한 인사로 저를 생각한 모양인데, 그래서 반대로 생각하면 이 부분에 대해 저희 측 의도를 개입시킬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번 일에 대해 최대한 사정을 대며 태업을 하고, 군의 재편성이 늦어지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정을 신성동맹 측과 왕궁에도 공유하도록 하시죠.
그럼, 공작님이 우려하시는 것처럼 템즈의 주도로 헝가리가 제국에 동맹으로 신성동맹에 방패가 되는 일은 그 효과가 약해질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택할 방법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세월이 무서운 걸까? 환경이 무서운 걸까?
공작님 말처럼 농노 출신에 벽타고 책이나 훔쳐보던 하녀가 한참 지옥을 구르다 보니 뜬금없는 역량이 생기네.
의외로 현실적인 타개책에 공작님은 조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너, 그거 정말로 감당할 수 있겠느냐?”
“저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제국에서 제가 가짜 공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저도 나름 하찮은 목숨 살려고 필사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제국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 있을리 없겠지.
좋아. 일단 그럼 네 말을 믿겠다. 그리고 일단은 네가 제안한 방식을 따라주지.
지금 노발대발하고 계신 국왕 폐하에게도 일단은 그렇게 보고드리마.”
공작님은 그제서야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는 그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 이런 대책을 나름 오면서 고민했던 것은 결코 이 양반이 이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반드시 해야 할 일에 동의를 받기 위한 밑밥 같은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을 말했다. 그리고···
“뭐? 네 어미를 네게 넘겨달라고? 아니, 그건 안된다.”
“어, 어째서입니까?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엄마는 저에게 보내주시면···”
“허락할 수 없다. 네 말처럼 너에게 그 권한이 주어진다면, 너를 통제할 방법은 많을수록 좋다.
확실히, 네 정체가 탄로나는 것이 가장 치명적이겠지만, 그것보다 완만하게 네가 배신하지 않게 담보할 방법도 필요하지.
유모는 내줄 수 없다. 그녀를 돌려받고 싶다면, 네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라.”
순간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참, 비참한 기분이다. 제국에 있었을 때는 누군가에게 부탁하면 저 야비한 인간을 구겨줄 사람이 넘쳤는데.
지금 여기서 나는 농노의 딸인 하녀에 불과하니 말이다. 나는 분노를 억누르고 고개 숙여 말했다.
“다시 한번 제고하여 주십시오. 엄마를 만날 일념으로 그곳에서 버텼습니다.
네, 아직 저를 못믿으시겠다면 보내주진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신에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엄마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지금 어디 계십니까?
내일 템즈를 떠나기 전에 잠시라도 좋으니,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그런 절실한 호소는 차갑게 외면당했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으니, 더 이상 묻거나 찾으려고 하지 마라.
만약 그럴 의도를 보인다면, 나는 네가 우리 측에 진심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녀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 네 어머니를 걱정한다면, 만날 생각은 하지 말고 네 할일에 전념해라.”
그리고 공작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왠지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야 했다.
빌어먹을··· 적국보다도 더 차가운 기분이 드는 고향에서 나는 대체 뭘 기대한 걸까?
내가 무엇을 위해서 그 먼 타국에서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삶을 견뎌 내었는데. 비통함만이 가득하였다.
그렇게, 템즈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고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성에서 나왔다.
이미 일행들은 이른 새벽에 출발할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를 본 바실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 공녀님. 일어나셨습니까?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집에서 가족과 지인분들과 즐거운 재회의 시간이셨는지요?
응? 공녀님? 안색이 좀 안좋아 보이시는데요? 무슨 일이라도?”
“별일 아닙니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가족들과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나누다 그만.
그보다는 부다페스트로 출발할 준비는 다 되었나요?”
바실은 나의 말에도 여전히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더 캐묻지는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네, 보급과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그리고 후발대로 출발해 부다페스트에서 합류할 후속 일행들의 소재도 파악되었고요.”
“응? 후발대? 더 올 사람이 있었던가요?”
“아, 전에 말씀드렸는데 잊으신 모양이네요. 군사 재건 위원회에 지도를 담당할 교도부대가 뒤늦게 결정되서 따라오고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들은 것 같다. 제국군은 일단 전원 철수하지만, 군사 재건 위원회에서 헝가리군 재편성을 지원할
훈련 및 교육에 특화된 교도부대는 비전투 인력으로 규정하고 위원회 소속으로 일한다고 했었지?
교도관이라. 짐작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바실을 퍼시라고 부르며 혈태자랑 별명을 붙여주고 항상 떠받들며 따르던 예비역 노병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이라면, 솔직히 비전투 인력이 아니라 그냥 민간인으로 봐야하는 것 아닌가?
뭐, 아무튼 실없는 노인들이지만, 그래도 경험은 많은 사람들이니 교도관으로는 그럭저럭 써먹을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나마, 우울한 내마음과 달리 한없이 해맑은 바실을 보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잠시동안만.
“카밀라 아가씨. 이렇게 말씀도 없이 나오시면 안됩니다. 가실 차비를 하고 나오시죠.
응? 그리고 그러고 보니 당신은, 그때 우리가 콘스탄틴노플로 볼모로 갈 때 동행했던 그 동행 장교군요. 당신이 이번에도 제국군 측 수행원입니까?
그러고 보니, 황궁에서도 몇번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아,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전에도 경고했지만, 함부로 우리 아가씨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니, 이제 제국 황실의 소속이시기도 한 우리 아가씨니, 한낱 연락장교인 당신이 감히 우러러 보는 것이 불경인 높으신 분인걸 모르나요?
그 경박한 언행에 주의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황실 모욕죄로 경을 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어, 음. 뭐 확실히 공녀님이 저보다 윗층에 사시니 높으신 분인 건 맞죠. 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흥, 진작에 그럴 것이지. 어서 물러가세요. 응? 아가씨, 왜 갑자기 머리를 쥐어 싸매시나요?”
대체, 왜··· 저 자식은 투구만 벗으면 알아보는 인간이 드문걸까? 혈태자의 본체는 투구더냐?
그리고 나는 왠지 모르게, 제국으로 출발할 때와 비교해서 전혀 성장하지 않으신 시녀장님의 반응에 두통이 더 밀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웃픈 수준의 두통은 이어질 상황에 비하면 약한 수준이었다.
“타시죠, 아가씨.”
“어? 이 마차는 뭐죠? 저는 같이 동행한 제국 일행들과 같이 이동해야···”
“지금 저 누추한 화물마차를 템즈의 꽃께서 타시는 것이 가당하다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제국 측에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봐요. 대체, 우리 아가씨를 이토록 홀대하는 경우가 어디 있죠?
이젠 우리 헝가리와 제국 양측의 사절이자, 전권대사로 오신 아가씨를 여기까지 그 허름한 것으로 모셨단 말입니까?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보시죠.
제국 장교 양반. 이게 당신네 제국이 우리 아가씨를 대하는 공식적인 태도입니까?”
“아, 아니 그게 저··· 그런 건 아니고. 죄, 죄송합니다.”
예상치 못한 시녀장님의 나를 홀대한다는 주장에 바실은 할말을 잃고 삐질거렸다.
아니, 이건 무슨. 아니, 황궁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나만 잡더니, 자기네 앞마당이라고 좀전에 목숨 날아갈 뻔했던 것도 잊으셨나?
왜 이런 돌출 행동을? 하지만, 의외로 그 억지가 마냥 틀린 말은 아닌지라 바실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녀장님은 나에게 다시 한번 마차에 탈 것을 권했다.
“타시죠. 부다페스트까지 제가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표정관리가 참 힘들었다.
고급 마차였지만, 차라리 저 꼴통들이랑 짐마차에 뒹굴거리며 오는 편이 백배 마음이 편하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걸 거절할 입장이 아니니 나는 마지못해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일행은 템즈를 떠나 부다페스트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앞에 마주보고 앉은 시녀장님의 시선이 못내 불편하여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성문을 지나쳐 가도로 접어드는 고향의 풍경이 보였고, 우리 일행을 멀리서 지켜보는 템즈의 영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 어어어? 저, 저건!!!”
황급히 일어서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저 멀리 성문 위에 템즈의 병사들과 공작님이 계셨다.
하지만, 내가 일어선 것은 공작님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공작님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 병사들이 붙잡고 있는 한 초라한 노파.
엄마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앉아라.”
“하지만.”
“앉으라고 말했다. 네 어미를 다치게 하고 싶더냐?”
차가운 시녀장님의 말에 나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제기랄, 정말로 저질러 버릴까?
뒷일 따위는 알바 없으니, 당장 박차고 나가서 엄마한테 달려가서, 무슨 수를 써서든 엄마를 구하고 어디론가 도망쳐서 조용히 숨어 지내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냉정한 이성이 돌아왔다. 마차 밖 열걸음을 걷기 전에 엄마는 두동강이 나겠지.
멀리서 본 표정으로 봐서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얼떨떨해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
이것은 경고다. 나에게 전하는 경고. 자신들의 뜻대로 내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내게 소중한 것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는 경고.
그것을 상기한 나는 눈물이 어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앞의 행렬에서 의아한 눈빛으로 뒤돌아보고 있던 바실과 눈이 마주쳤다.
바실이 뭔가 말하려는 듯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이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시녀장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찌되었건, 네 바램대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으니,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
잊지 말거라. 모든 것은 다 너 하기에 달렸다는 것을.”
정말이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집에 돌아왔는데, 벌써부터 신물이 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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