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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하람릭의 마흐람이 되어달라는 부탁이었다고요? 아니, 왜 갑자기 뜬금없이 그쪽의 풍습을? 아, 생각해 보니 선대 황실은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에서도 니케아 분파였었지? 그렇다면 그런 예법을 언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구나. 다넬리스의 예법도 시간이 지나고 지역색이 들어가니 그렇게 변질될 수도 있구나. 인류문화사에 있어서 상당히 흥미로운 탐구 거리군요.”
“인류문화에 대한 연구는 나중에 따로 하시고, 그게 뭔지 설명이나 좀 해주세요. 대체 그게 뭔데 사람을 그 난리를 치게 만든건데요?”
나의 질문에 요하네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하람릭의 마흐람. 굳이 번역을 하자면 ‘규방의 관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동방의 무슬림 사회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다소 제한되어 있는 건 아시죠? 그래서, 그들은 생활 공간도 여성의 공간과 남성의 공간을 엄격하게 분리해서 지내게 하지요. 그러한 여성들만의 규방 공간을 무슬림들은 하람릭(Haremlık)이라고 부릅니다. 이건 단순히 무슬림의 종교에 의거한 개념이 아니라, 그들의 선지자 무하마드가 오기 전부터 그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관습이었죠.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그쪽 사회의 여성들은 하람릭에서만 생활하며, 남성들은 그곳에 함부로 출입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습은 여성들을 억압하기 보다는, 오히려 무도한 남성들로 하여금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여기서 그러한 여성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접해야 하는, 집 밖으로 나가서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여성들이 함부로 나갈 수가 없다는 점이죠. 그래서, 그러한 여성들이 바깥 출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 사회에서는 여성들을 보호하는 남성 보호자가 수행을 하거나 혹은 여성들을 대신하여 외부의 일들을 대신 처리하게 되는데, 그런 일을 하는 남성 보호자를 바로 마흐람(Mahram)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마흐람은 그 여성의 배우자가 맡아서 수행하는 것이 상식이기는 한데, 상황에 따라서 배우자를 가지지 못한 여성들의 경우는 배우자를 대신하여 그 여성의 가족과 먼 친지들이 그 일을 대신하여 수행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종종 마흐람을 무슬림 사회의 남편을 칭하는 말로 착각하곤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마흐람은 좀더 폭넓은 의미로 여성이 머무는 규방과 그 여성의 신변 보호인 겸 대리인을 칭하는 개념입니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가신다면 7대 악마 중에 이민국의 페드로 국장의 사례를 생각해 보십시오. 수천명의 여성과 중혼한 걸로 유명하죠?
사실 그거, 샤리아 악법에서 구출한 무슬림 여성 공동체에 대해서 페드로 국장이 마흐람 역할을 맡았던 것을 오해한 것입니다. 페드로 국장의 사례처럼 배우자는 물론 가족과 친지가 없는 경우에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인망을 가진 사람이 마흐람의 역할을 맡아주기도 하지요. 그래서, 지금도 페드로 국장은 제국에 뿌리내린 수많은 무슬림 여성 공동체의 공식 마흐람입니다. 안나 황녀도 지금 태자에게 그것을 요구한 것인 모양이군요.”
“그런 거였다고요? 아니, 근데 왜 갑자기 뜬금없이 제국 황실에서 동방의 풍습을 요청해요? 사람 혼란스럽게 시리.”
“그야 뭐··· 제국도 로마의 후예라고는 해도, 동쪽 아나톨리아 방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동방의 풍습에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전에 베스의 맞선 파티에서 봤던 로레이우스군이 터번을 쓰고 있던 것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문화라는 것이 서로 접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상호 영향을 주는 것을 피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과거 니케아를 기반으로 제국의 황위를 차지한 팔라이올로구스 가문에서는 그러한 동방의 풍습을 니케아 시절부터 강하게 영향 받았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렇게 우리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는 다넬리스의 예법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서 제안한 모양입니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네요.”
회상 끝. 아무튼 요하네스의 설명을 통해서 나는 겨우 오해가 풀릴 수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우자 관계로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신변 보호인의 관계였다니. 40대 중년 여성이 20대 청년에게 구혼을 한다면 경기를 일으킬 일이지만, 40대 중년 여성이 20대 청년에게 자신과 자신의 규방의 신변 보호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크게 무리수는 아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실제로 자신들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는 제국의 태자인 바실이니. 바실은 대충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 식사 자리에서 요청한 안나의 부탁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율리아가 복원한 황실 의례에 의거하여 바실이 안나의 마흐람이 되는 의식을 거행하게 된 것이다. 사실,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동방의 예법을 제국 방식으로 재해석한 모습이라 왠지 신변 보호인의 계약이라기 보다는 결혼식처럼 보이는 것도 좀 마뜩치 않고. 하지만, 나름 순수한 표정으로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한 안나 황녀의 마음은 진심이라고 믿으며 나는 하객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데 그때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율리아였다. 이 자식이 또 왜··· 그가 말했다.
“훗, 쫄았냐?”
“쫄기는 개뿔이!!! 너 솔직히 이거보다 더 쎈거 의도했지?!!!”
“흥, 그럴리가 없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바실이 최우선이라고. 이건, 어디까지나 선대 황실의 남겨진 의지할 곳 없는 황녀의 신변 보호를 자처하는 황실의 고귀한 후계자라는 명분을 만들 포장에 불과하지. 설마하니, 내가 진심으로 바실에게 득이 될 것이 없는 혼사를 의도할리가 없잖아?”
정말이지, 말이나 못하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곱게 당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나는 시선을 돌렸다. 성당의 중심에서 의례가 거의 마무리 되고 바실은 안나의 손을 잡고 수행하는 듯한 모습으로 퇴장하고 있었다. 뭔가 살짝 심기가 불편하지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 의식을 마치고 이어질 만찬의 준비를 부탁받았는지 익숙한 얼굴이 나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아, 무라트 연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아, 네. 경사스러운 의식이 있다고 해서, 그 축하 만찬의 준비를 부탁받아서 예니체리 연대의 수석 셰프들과 같이 그것을 준비하러 왔습니다. 근데, 와서 조금 놀랐습니다. 설마하니, 바실 태자님이 하람릭의 마흐람이 되는 의식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태자 마마께서 그런 일을 허락하실 줄이야···”
“뭐가 문제라도 있나요? 그래봤자 규방의 관리인이잖아요. 손 많이 가는 일을 거절하지 못하시는 태자님이라면 그러시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나의 심드렁한 말에 무라트 연대장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흐람이 확실히 우리 쪽 관습에 의하면 신변 관리인이긴 하죠. 하지만, 지정된 여성 개인의 마흐람이라면 별 상관이 없지만, 하람릭의 마흐람이라는 건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지 않나요? 그래서, 원래 동방의 셰이크들이나 에미르들이 하람릭의 마흐람을 자처하면 조금 안좋은 시선으로 보기 마련인데.”
“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냥 규방의 관리인에 대해서 안좋은 시선으로 본다고요? 대체, 왜요? 하람릭은 그냥 여성들의 규방 아니었어요?”
그런 나의 질문에 대해, 무라트는 뭔가 오해가 있었구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내가 생각치도 못한 말을 꺼냈다.
“하람릭은 그냥 일반 가정의 규방을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근데 그게 권력자들이 마흐람이 되고, 그 규모가 클 경우에는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부르죠. 그건 바로 하렘(Harem)이라고 부릅니다.”
“······!!!”
순간, 머리 속에 뭔가 뚝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하··· 하렘?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려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자식은 그제서야 진상을 알아차린 나를 보고선 혀를 낼름 내밀며 메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인내심은 사망했다.
“칼 들어 이 년아!!! 독도 사용해!!! 정당방위로 너 죽이고 천국 가련다. 주여!!! 오늘 사고 한번 치겠습니다!!! 자비는 필요 없고, 저 년만 골로 보내고 지옥가게 해주세요!!!”
“당할까 보냐!!! 네까짓거 그런거 없어도 쳐바르는 거 얼마든지 가능하거든!!! 죽여봐! 이 년아!!! 자꾸 머리끄댕이만 잡지 말고 제대로 붙어!!!”
그렇게 신성한 마흐람 의식이 벌어지는 성당의 앞마당에서는 한바탕 나와 그 요망한 년의 난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해서 쿠타이 녀석은 애써 수습한다고 하는 말이···
“하하하!!! 재밌으시죠? 축하 공연! 축하 공연! 슬랩스틱 코메디를 겸한 코믹 배틀입니다. 와하하하!!! 하객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웃으세요. 그리고 누가 이길지 돈을 거세요!!! 저는 환관장님에게 1 노미스마!!!”
“야, 이 망할 자식아!!! 네 녀석이 제일 나빠!!!”
그렇게 사람들의 훈훈한 미소와 엄청나게 올라가는 판돈과 산산히 헝크러지는 내 머리카락과 함께 바실의 마흐람 의식은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그 뒷목잡는 상황의 후폭풍은 아직 더 남아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 후에 황도를 휩쓴 엄청난 소문이었다.
“마성의 귀공자, 카밀이 대답하게도 황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더라. 행정부에서 눈에 불을 키고 찾아 헤맸는데, 그 안마당에 난입해서 한바탕 난동을 부리고 사라졌다고 하더라고. 수백명의 경비대와 근위대가 추격했는데도 끝내 체포하지 못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고 하더라고.”
“그 하루 동안 잠시 나타난 사이에 수많은 여심을 홀리고 사라진 모양이야. 히포드룸이랑 대황궁이랑 그랜드바자에서 카밀을 목격한 처녀들이 다들 그 멋진 모습과 제국의 권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호쾌한 태도에 바람둥이인 걸 알면서도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야. 상사병으로 앓아 누운 사람이 한둘이 아니래.”
“근데 카밀의 목표는 그냥 평범한 여자들이 아니었나봐.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어. 그랜드바자에서 율리아 파라코이모메노스를 유혹하고, 언젠가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제국에 선전포고 하고선 사라졌다고 하더라고. 율리아는 그가 떠나고 한참을 흐느꼈다더라.”
“그뿐만이 아니야. 내가 아는 경비대원이 봤다고 했어. 카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안나 팔라이올로구스에게도 추파를 던지고, 그녀의 마음을 빼앗고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데. 안나 황녀는 원래 제안된 다넬리스의 예법를 완곡하게 해석해서 마흐람 의식으로 대체했는데, 사실 그건 태자보다도 카밀에게 마음을 빼앗긴 덕분에 카밀에 대한 정조를 지키려고 한 선택이었다고 하더라고.”
“맙소사. 정말 그 마성의 귀공자 무시무시한 존재로군. 다른 사람도 아닌 제국의 태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하다니. 그리고, 안나와 율리아 모녀··· 아니, 모자인가? 아무튼 두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빼앗고선 사라지다니. 대체 정체가 뭐야? 제국 행정부가 난리를 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군.”
아아아아악!!!!!! 에이전트 카밀은 집에 좀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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