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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바실은 안나 황녀의 집에 도착하여 집의 문고리를 두들겼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안나 황녀가 나왔다. 중년이고 모진 세월을 겪었지만 그래도 순수해 보이는 얼굴이 나이보다 조금 젊게 보이는 그녀는 적당히 소박한 야외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맞이하러 온 바실을 보면서 미소지으며 말했다.
“제국의 존귀하신 황제 폐하에게 이렇게 몸소 걸음을 하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지난번에는 제대로 인사드리지도 못했군요. 안나 팔라이올로구스입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지금은 제국의 공동황제가 아닌 종사 바실로서 고귀하신 분을 에스코트하러 왔습니다. 바실레이오스 카르브나입니다. 오늘 하루 황녀님을 모시고 황도를 돌아보는 일정을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바실의 모습은 평소보다는 조금 멋이 났다. 원래 평소 모습대로 평상복으로 돌아다니면, 공동 황제가 아니라 시골 머슴처럼 보이는데. 오늘은 그래도 조금은 신경 쓴 차림인지 평상복이지만 그래도 기품이 조금은 있는 모습으로 우직하고 올곧은 젊은 호위 무사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만남을 나는 조금 멀리 골목에서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나이차이가 모자지간에 가까운 두 사람이 생각보다는 어색하지 않게 훈훈하게 첫만남을 가지는 것을 보며 살짝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나의 옷차림을 보고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반응도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고 있었고.
“우와, 저기 봐바. 어떤 멋진 남자가 골목에서 어딘가를 염탐하고 있어. 대체 누구지? 뭘 하려는거지? 신고해야 하나?”
“아니야. 내버려 둬.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뭔가 마음에 든 여자에게 접근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훈남인 것 같아. 누굴까? 저런 멋진 남자를 매혹한 사람이?”
그래. 망할!!! 나 또 남장했다. 어젯밤 우리 집에 내 뒷목 잡게 만드는 루키는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한명 있어. 누나도 잘 아는 사람이야. 그 사람은 바로··· 마성의 귀공자, 에이전트 카밀!!! 라구사의 여심을 뒤흔들어 놓고 홀연히 사라진 그 전설의 남자가 다시 등장할 시간이야. 그 사람이라면 황실이나 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도 아무런 제약이 없지. 그러니깐, 다시 한번 그 사람으로 변장해서 활약을··· 어라? 누나, 부지깽이는 왜 들어? 아아악!!! 폭력 반대!!! 동양인과 미성년자와 크로스드레서에 대한 혐오를 멈춰주세요!!!”
“정치적 올바름 조까!!! 여기 제국이다!!! 그리고 네가 쳐맞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이를 갈며 내 흑역사를 다시 한번 꺼내들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라구사에 다녀온지 얼마되지도 않았고, 제국 행정부가 광분해서 추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다시 남장을 하고 바실의 뒤를 미행하게 되었다. 어흑, 이 망할 놈의 제국과 황실!!! 왜 자꾸 나한테 이런 짓을 하게 만드는 거야!!! 그렇게 내가 이를 가는 사이 바실과 안나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수행원을 최소로··· 아니 아예 없이 해달라고 하셨다고요? 그리고 가마나 마차도 없이 도보로 황도를 거닐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황녀님이 행차하시기에는 좀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어머나, 그렇게 따지면 공동 황제께서는 더 격에 맞지 않으신걸요. 조금 무리한 요청일지 몰라도 꼭 그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두라초에 피신가기까지 일생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단 한번도 황도를 제 다리로 돌아본 적이 없었죠. 항상 제가 머물 수 있는 곳은 황궁의 규방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꼭 그렇게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제 다리로 직접 이곳을 거닐면서 부활한 제국의 황도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하는 수 없지요. 제가 오늘 황녀님의 호위 기사로서 수행하겠습니다. 가실까요? 일단은 도시의 중심인 히포드룸부터 돌아보시는 것을 추천드리고 싶군요.”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실이 내민 손에 손을 얹고선 미소지으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그런 두 사람의 행방을 들키지 않게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콘스탄틴노플의 중심지이자 가장 번화한 장소인 히포드룸에 도착하였다. 콘스탄틴노플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 중에 하나인 그곳을 본 그녀는 조금 벅찬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 황궁 테라스에서 볼 수 있었던 많지 않은 건물 중에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죠. 항상, 멀리서 보기만 하다가 직접 가까이 와서 보니 그 웅장함이 더 대단하네요. 그리고 주변이 상당히 번화하고 활기차군요. 황궁에 있었을 때는 이곳은 시민들이 항상 황실을 비난하기 위해 모이는, 반란자들의 집결지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하하하···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리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번화하고 평화로운 히포드룸 마차경기장 주변 공원에 시민들 속에는 틀림없이 제국의 시국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태자는 병신이다!”
“맙소사. 어떻게 태자님에게 저런 불경을··· 저걸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나요?”
“괜찮습니다. 제가 뭔가 과실이 있었던 모양이죠. 그걸 경청하고 수용하는 것이 제 의무 중에 하나입니다.
“황제는 병신이다!”
“맙소사. 이번에는 황제 폐하를··· 저것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습니다.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 훼손은 경범죄고 그나마도 실형을 선고하기 어렵습니다.”
“공녀는 병신이다!”
“이번에는 공녀를 욕하네요. 저것도 괜찮은가요?”
“괜찮을 겁니다. 아마, 정황상 공녀님이 또 뭔가를 꾸미신 모양이네요. 시민들이 다들 시선 피하며 자리를 피하잖아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될거에요.”
얌마!!! 나 아니라고. 그냥 길가에 정신나간 놈이 한 헛소리라고!!! 대체, 제국에서 나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길래 시민들 반응이 저 지경이야?!!! 그렇게 울분을 토하면서도 소리를 내지는 못하며 뒤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바실의 설명에 안나는 뭔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점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는 사이에 바실이 뭔가를 발견하고 안나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 생긴지 얼마 안된 새로운 유행을 소개해드리죠.”
그렇게 말한 바실은 길거리의 노점상에서 뭔가를 사서 안나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 물었다.
“이것은··· 얼음인가요?”
“네, 레몬과 포도를 뿌린 셔벗입니다. 카자크인들이 제국에 합류하면서 생긴 새로운 유행이죠. 고산 지대의 얼음을 가장 빠른 파발로 운송해서, 그것을 셔벗으로 만들어 파는 사업이 황도에서 지금 가장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제국에 합류한 카자크 신참자들은 그러한 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벌어들이고, 제국의 일원으로 신속하게 편입되고 있죠. 지금 저 셔벗을 판 가게 주인도 동양인인걸 보셨죠? 새로운 물결은 지금 제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답니다.”
“맙소사. 정말로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네요. 제가 아는 동방의 유목민족은 제국을 약탈하는 것에 혈안이 된 야만족들이 전부였는데. 지금 그들이 제국 내부에서 셔벗을 팔고 있다니.”
그녀는 그런 자신이 알지 못했던 제국의 변화한 면모에 감탄하고, 또 바실이 건내준 셔벗이 맛있었는지 흐믓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쳇, 뭔가 정세에 대해서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지금 저 데이트가 원만한 것에 대해서 입맛이 씁쓸하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들의 뒤를 계속 밟았다. 그들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콘스탄틴노플의 대황궁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황실의 황궁이 아닌 박물관이자 공회당으로 용도가 변경된 그곳을 보면서 안나 황녀는 조금 감회가 새로운 모습이었다.
“거의 폐허에 가까웠던 대황궁이 다시 예전 모습을 찾았군요.”
“네에. 더 이상 황실의 황궁은 아니고, 아직도 여기저기 복구가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이 회복하였습니다. 조금 실망스러우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때 제국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던 대황궁이 지금은 이렇게 박물관 겸 시민들의 공공장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머님을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이걸 냅다 공공 시설로 도시에 임대하고 임대료 받는다는 발상은 대체 어떻게 하면 나오시는 걸까요?”
“후흣, 아뇨··· 유도 다운 생각이에요. 덕분에 제가 어렸을때만 해도 폐허였던 이곳이 지금은 상당히 복원되었잖아요? 그리고 실망하려고 해도, 저 역시도 대황궁은 폐허로만 기억하고 어렸을 때부터 지냈던 곳은 블라르케르나이 황궁이었으니깐 큰 의미가 없어요. 지금 카르브나 황실의 황궁으로 사용되는 부콜레온 황궁도 그렇고 대황궁도 생각보다는 큰 추억은 없어서 말이죠. 뭔가 지금은 황실이나 황궁이 위엄보다는 이렇게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예전 모습을 많이 되찾은 것에 감동이네요.”
그녀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닌 듯 박물관이 된 대황궁을 오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포르피로게니타를 위한 보라색 방을 보고선 우수에 젖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왠지 그녀의 표정 속에서는 복잡한 생각이 많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맞선 상대가 만들어낸 제국의 변모한 모습에 다시금 그의 존재에 대해 내적 평가를 향상시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한편으로는 왠지 바실을 보며 화사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안나의 모습에 울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나한테 모여드는 사람들을 쳐내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우흣, 멋진 남자. 혹시 괜찮으시다면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우와··· 옷차림이 화려하고 멋지시네요. 이곳 대황궁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혹시 이곳에 무슨 과거가 있으신 비운의 귀공자?”
여보셔!!! 황도 처자들. 좀 정신 좀 차리라고. 왜 갑자기 모자를 푹 눌러 썼는데도 나한테 줄줄 따라 붙는거야!!! 미행 들키게 시리. 하지만 괜히 성질이라도 냈다가는 큰 소동이 날 것 같아서 나는 애써 그들에게 정중한 사양을 하며 두 사람의 뒤를 계속 밟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콘스탄틴노플의 명물. 최고의 상업지구인 그랜드 바자였다.
“우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바쁘게 오고 가다니. 제가 두라초로 피신하던 시기에 보았던 황도에는 길거리에 시신이 널려 있고, 약탈할 기회를 넘보는 용병들이 골목에 있어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했는데. 지금은 온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여기 모인 것처럼 북적거리는 군요.”
“제국과 황실은 교역의 안전을 보장하니깐요. 그리고 근위대가 바로 선 다음에는 치안도 확고하게 안정되었고요. 덕분에 이곳 그랜드 바자에서는 세계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와서 번영의 아우성을 지르고 있죠. 과거 관세로만 금화 2만 노미스마를 거뒀다는 전성기를 가뿐하게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는 그들의 편의를 위한 식당이나 놀이 시설도 최고 수준으로 들어서게 만들었죠. 그래서, 이곳에서는 거리의 맛집에서 최고의 고급 정식까지 모든 음식을 다 맛볼 수 있죠. 많이 걸으시느라 출출하시죠? 마음에 드실 고급 식당을 점심에 드실 수 있게 예약해 두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마침 잘되었군요. 고급 식당이라면 조금 조용한 곳이겠죠? 태자님에게 긴히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곳에서 그것을 말씀드리면 될 것 같군요. 그곳으로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순간 나서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닭았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서 그저 감시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 두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서 안나 황녀가 이야기를 꺼내면··· 저 바실 녀석은 영문도 모르고 그것을 수락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나는 그랜드바자의 인파 속에서 고급 식당가로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늘 속에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두 사람이 그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막기 위해서 뭔가 제대로 계획조차 세우지 않고 달려나갔다.
그때 두 사람은 그랜드바자의 모퉁이를 돌았고, 나도 두 사람을 따라 잡으려고 모퉁이를 돌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인파 속에서 튀어 나오며 나를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나를 막아서며 베일을 벗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기겁해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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