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2
순식간에 상황이 벌어졌다. 이슈트반 왕세자가 달려들며 검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기세에 베일을 두른 환관장은 두동강이 날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채애앵!’ “어? 어어어?” 퍼억!’ “헉? 히이이익?!!!”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이어졌다. 집중하지 않았다면 경과를 못봤을 것이다.
달려들며 검을 뽑는 이슈트반 왕세자의 돌진에, 율리아는 내 머리채를 쥔 손을 허리춤에 칼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슥삭! 탁! 이건 나도 제대로 못봤다.
무서운 속도로 검이 뽑혀졌다가, 다시 칼집으로 들어갔고, 그 호흡은 단 한숨에 이뤄졌다.
그래서, 사람들의 귀에는 검이 다시 칼집에 꽂히는 ‘탁’하는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그 검은 무시무시하게도 정확하게 왕세자의 힐트 아래로 파고들었고, 철검을 종이 자르듯이 베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금속성이 단 한번 울리고, 동강난 검을 위로 치솟았다가, 다시 이슈트반 왕자의 앞에 떨어져 진로를 막았다.
그것이 바로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의 검이 동강나서 진로를 막은 것을 본 왕세자가 당황하여 멈춰섰던 것이다.
얘를 잘 알던 나조차도 믿기 힘든 무시무시한 검술 실력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이 자식 맨날 나랑 머리끄댕이 잡고 뒹굴어서 잘 인지하지 못하는데,
이 자식 사실 라구사의 뒷세계를 자기 실력만으로 차지하고, 근위대장을 상대로 1승을 챙기고, 바실에게 아슬아슬하게 졌던 검의 고수였지?
순간, 오한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와, 씨. 정말로 나랑 싸울 때 칼 안쓰겠다는 거 나름 되게 봐주는 거였구나.
눈깜짝할 사이, 율리아에게 검을 파괴당하고, 과시용으로 납도한 칼을 다시 뽑아 목에 칼이 겨눠진 이슈트반은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런 이슈트반에게 예리하고 가는 세검을 목에 겨눈 율리아는 끈적이는 목소리로 지껄였다.
“먼저 칼 뽑고, 기습하고도 진 녀석은 이긴 자에게 사지 하나 내놓고 가던 것이 내가 살던 곳의 관례지. 어디를 내놓겠느냐?”
그 말에 이슈트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야, 이. 설명 좀 제대로 해. 그건 네가 굴러먹던 라구사 뒷골목에서나 통하는 관례잖아.
근데 그걸 설명없이 말하니, 그게 무슨 제국 황궁 관례라고 생각하잖아!!!
제국 황실을 무슨 뒷골목 양아치 수준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발언을 던진 녀석은 얼어붙은 이슈트반의 몸을 칼끝으로 서서히 흩어내리면서 키득거렸다.
“못고르겠다면 내가 골라드릴까? 있어도 못보는 눈깔? 달려도 못듣는 귀? 소음만 유발하는 혀? 있어도 쓸모도 없는 손?
뭐가 좋을까? 아아··· 여기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따로 있었군. 굳이 없어도 그만인 아르파드의 씨를 뿌릴 그곳. 그곳을 받아가지.”
“뭐? 으아아아악!!! 아아악!!!”
다시,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율리아의 말과 자신의 아랫도리를 향한 칼끝에 기겁한 이슈트반은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고,
그 순간, 율리아는 사정없이 뒤를 보인 이슈트반의 엉덩이를 칼로 찔렀다.
다시 한번, 이슈트반의 비명이 울려퍼지고, 그는 볼썽 사납게 한쪽 엉덩이에 피를 철철 흘리며 앞으로 나뒹굴어진 것이었다.
야, 야이··· 정말로 찌르면 어떻게 해? 아무리 그래도, 저 사람 우리 헝가리 왕세자, 그러니깐 다음 왕이 될 사람인데.
나는 어느 순간 연기를 넘어선 광기에 빠진 율리아를 보고 경악했다.
그러나, 율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상큼하게 웃을 뿐이었고, 되려 광분한 것은 이슈트반 국왕이었다. 그가 소리쳤다.
“근위대!!! 당장, 이곳으로 집결하라!!!”
그러자, 건물 밖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수십, 아니 백여명도 넘는 아르파드 근위대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건물 안의 상황을 보더니, 이내 분노한 얼굴로 나를 붙든 율리아를 둘러싸고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손을 위로 올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율리아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도리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이슈트반 국왕을 보며 말했다.
“호오. 이쯤 되면 피차 막나가자는 거지?”
“입닥쳐라! 세자를 시해한 놈. 내 기필코 네놈만은 용서치 않으리라. 너는 네가 행한 짓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하! 누가 할 소리. 바라던 바다. 애초에 관용과 자비 따위는 필요없어.
주둔군의 철수만으로 이토록 방자하게 구는 너희 어리석은 헝가리 놈들에게 관용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 모든 것은 힘의 논리로 다스리면 그만이었다.
그래, 환영한다. 네놈들의 이런 만행. 덕분에 명분은 충분히 생겼다. 바라던 대로 붙어보자.”
“허세를 집어치우는 것이 나중에 후회할 짓을 줄이는 것이 될 것이다.
네 놈의 검술 실력은 출중하지만, 여기 있는 모든 근위대와 싸워서 이길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하고 자비를 빌어라.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러면 널 붙잡아 지하감옥에서 유린할 근위대가 어쩌면 조금 덜 잔인해질지도 모르니깐.”
나는 왕의 말에 식겁했다. 안돼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제국의 고관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진짜 답 안나온다고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말을 듣고, 살짝 음흉한 미소가 흐르는 근위대를 보니 저게 결코 농담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아악! 이걸 어떻게 해. 그냥 내가 좀 욕먹고 말았을 일이 점점 더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고민은 나만의 몫인 모양이었다.
율리아는 포위된 상황에도 오히려 더 비릿하고 선정적인 목소리로, 마치 놈들을 유혹하듯이 말했다.
“어머나, 이를 어째? 다들 나를 보며 뭔가를 잔뜩 빳빳하게 세우고 달려들 생각인 모양이네?
와우. 헝가리 왕국의 긍지 높고, 최고의 무력의 상징인 근위대의 관심을 이렇게 한몸에 받다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젖어버릴 것 같군.
그래, 확실히 아무리 나라도 저렇게 수백명이 달려들면, 이기는 건 무리지. 그건 내가 아는 어느 한 녀석 정도만 가능하니깐.”
그 말에 근위대원들은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마치, 당장이라도 이긴 듯이. 그러나 율리아의 말은 이어졌다.
“그래서, 우아한 제국의 내궁의 관리자로서, 이런 상황에서 험악하게 흉기를 들고 날뛰는 것을 무리겠지.
그러니, 대신에 나를 지킬 것들을 불러야겠어. 워낙에 그 명성이 자자하신, 아르파드 근위대니깐,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죄다 줄행랑을 치겠지?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주인 말도 잘 안듣는 개들을 부르는 수 밖에. 이제, 이만 나오시죠.”
근위대원들은 정말로 어디선가 맹견들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아래를 둘러봤다.
그런데, 개가 나타난 곳은 아래가 아니었다. 위였다.
“어? 저, 저게 무슨···” ‘휘이이이익, 콰아아아아아앙!!!’ “어? 어어어? 으아아아아아악!!!”
누군가가, 위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자 일제히 그곳에 시선이 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천장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린 무언가가, 바닥에 도달하자마자 들고 있던 해머로 강하게 바닥을 내려쳤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리쳤다고는 믿기지 않는 그 강타에, 굉음이 울리고 동시에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듯이 크게 일렁였다.
덕분에, 근위대의 다수가 휘청이며 주저앉거나 넘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휘청거리다가 겨우 균형을 잡고 나타난 사람을 보고 경악했다.
“우··· 울프스턴 경?”
“오! 공녀. 역시 저 약골들이랑 달리 잘 버티고 서있구만. 그럴 줄 알았어.”
나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저 사람이 왜 갑자기 여기서 나와? 하지만 그 경악은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어이? 비켜, 기절한 꼬마야. 길막지 말고. 응? 어른인가? 뭐 다들 작아서 구분이 가야 말이지.”
“문이 왜 이렇게 작아? 몸이 끼게. 야, 좀 기다려. 문턱 좀 부숴서 터야겠다.“
“뭘 귀찮게 문을 트고 있어? 그냥 벽을 뚫으면 되지. 비켜봐. 내가 뻥 뚫어줄테니깐.”
정상적인 인간의 규격을 벗어나는 거인들이 벽과 문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뭔가, 현실과 다른 세상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욱실리아 베오울프 연대.
전원 노르만 출신의 북방의 거인들로 구성되었고, 신화 속의 전사로 추앙받는 그 사람, 울프스턴의 지휘에 따르는 지상 최강의 연대.
그들이 지루한 얼굴로, 하지만 중무장을 한 상태로 건물에 슬금슬금 들어오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이 인간들이 대체 여기 있어? 협정에 의하면 제국군은 이제 전부 헝가리에서 철군하기로 한 거잖아?
근데, 왜 그냥 정규군도 아닌, 단일 연대로 군단 병력을 상대한다는 이 미친 부대가 여기에 있냐고?
이건, 완전히 협정 위반이··· 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이없는 광경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것은 그들이 팔에 찬, 평소에는 익숙치 않은 모습의 완장 때문이었다. 거기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교관’
뭐, 교··· 교관? 저 인간들 지금 자기들이 교도부대라고 하는 거야?
그러자, 머리 속에 템즈에서 출발할 때 바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후발대로 출발한 군사 재건위에 도움을 줄 교도부대가 합류했다고 했던 건.
난, 전역한 노병들이 느릿하게 오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이 인간들이 교도부대였어?
야, 이 미친!!! 이게 무슨 비전투 자문 인력들이야!!! 이건 전략병기잖아! 그걸 교관으로 보내는 미친 놈이 어딨어?
아, 근데 제국이었지? 와, 씨··· 그게 또 납득이 되네. 얘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나는 경악하고 싶은 심정으로 머리를 쥐어 싸맸고, 율리아 이 미친 년은 오히려 더 흥분해서 광기가 철철 넘치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소개하지. 우리 황궁의 번견들이야. 아아, 근데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겠군.
아마도, 우리 제국보다 너희 서방 측에서 더 유명하지? 마침, 아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군. 저쪽에서 지리는 놈들. 프랑스군에서 파견 복무를 했나?
그럼 이미 그 명성을 들어본 모양이군. 보는 것만으로도 질질 싸고 앉아있는 걸 보니 말이야.”
사실이 그랬다. 몇몇 나뒹굴어진 기사들이 베오울프 연대의 모습을 보자 기겁을 하고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체격에 위압으로 겁먹은 것은 아닌 듯 보였다. 무언가를 들은 모양이었다.
율리아의 말처럼 신성동맹에 속하던 시절 파견 근무를 하고, 뭔가 되게 흉악한 괴담을 많이 들은 모양이지? 그걸 입증하듯 늑대들이 말했다.
“우리 상대는 저 친구들인가? 몇 명정도 필요할까?”
“30명.”
“그래? 좀 많긴 하지만, 그래도 저쪽이 수백명이니···?”
“날뛸 녀석 10명. 그 10명의 양쪽 팔을 붙들고 말릴 20명.”
그리고 그 말에 다들 낄낄거리며 웃었다.
재밌는 농담··· 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왠지 모르게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로 들렸다.
그리고, 그들의 등장에 단번에 바뀐 흐름에 경악한 것은 당연히 헝가리 측이었다.
이슈트반 국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왕세자는 여전히 엉덩이를 쥐고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공작님이 나서실 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환관장. 이제 그만두시오. 정말 끝장을 보자는 것이오?”
“끝장? 그걸 보고 싶은 것은, 먼저 칼을 뽑고 달려들고, 허수아비들을 불러 둘러싼 쪽이 아니던가?”
“협정 위반이요! 콘스탄틴노플 협정에서 제국은 군을 철수하고, 우리의 지위를 동맹국에 위치로 격상하였소.
그걸 당신의 독단으로 파기하고 교전을 벌이겠다는 것이오?”
“내가 그걸 마다할 이유를 모르겠군, 이 더러운 헝가리 개자식들아.
지금 너희가 우리 대사관을 무단 점거하고, 전권대사와 밀담을 하고, 먼저 칼을 뽑은 시점에서 얘기는 끝났다. 더 이상 무슨 인내심을 제국에 요구하는 거지?
황제께서 비열한 배신자와 현장 의사결정을 임의로 한 환관장, 어느 쪽을 용서하시리라 생각하나?”
이 새끼. 완전히 미쳤어. 정말로 여기서 깽판을 칠 생각이야?
지금, 여기 헝가리의 국왕과 왕세자와 신성동맹 측 라인과 최측근 책사가 제국 대사관에 있고, 부다페스트가 바로 저기인··· 어라?
근데 생각해보니 이 정도 상황이면 의외로 엎으면 성공할 확률이 제법···
아악!!!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제국에 물든 내 두뇌야 물러가라!!! 이건 안돼.
여기서 더 막나가면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다고. 하지만, 그런 경악과 무관하게 저 미친 새끼는 마치 대 몰락 서사시의 주인공처럼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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