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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흥겨워 하면서도 나름 숨을 죽이고 그가 보일 반응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주도한 이슈트반 국왕과 왕세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오오··· 그대에게 이런 찬사를 듣다니. 내 인생에 이런 영광이 다 있을까? 내 귀를 의심할 지경이군.
그대의 고견 잘 들었네. 그리고, 부디 오늘 그대에 건낸 좋은 조언처럼,
그대와 북방의 백성들이 우리 아르파드 왕실에 더 이상 증오와 적대가 아닌, 좋은 관계로 남길 기대하지.”
“응? 증오와 적대라고요? 아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아직 왕실은 우리를 오해하고 계신 모양이셨군요.
지금 말하시는 그 증오와 적대라 하면, 아마도 그건 저희가 선대 대공과 후계자를 왕실에서 고의적으로 죽게 하고, 그를 아직 원망한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잠시 흥겨웠던 파티가 잠잠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다들 조금 긴장했다. 쉽게 대답을 꺼내기가 어려운 발언이었다. 거의 기정사실이니깐. 하지만 언급하기는 두려웠다.
그래서, 그런 무거운 말의 책임을 대신 진 것은 마고 공주였다.
“아니라는 건가? 뭐,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슬로바키아인들이 우리에게 이를 갈 이유는 많지만,
그 중에서 특히 북방의 야수가 품은 복수의 명분은 그것일텐데? 지금 와서 그것이 아니라고 부인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흥미로운 일이네. 오늘 훈련 덕에 북방의 야수도 좀 꼬리를 말은 건가?”
마고 공주의 말에 두 이슈트반 부자는 식겁했다. 하지만, 북방의 야수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두죠.”
“뭐, 뭐라고?”
그리고, 슬로슈는 뭔가 혼잣말을 하듯이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나에게는 이유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누군가 숙부와 형님을 죽였어야 하고, 그래서 내가 복수를 해야만 내 존재가 인정받을 것 같았으니깐요.
그래서, 전쟁에서 항상 벌어질 수 있는 안타까운 전사의 책임을 왕실에 몰아야 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왕실에서 주장하듯 그것은 어느 전쟁터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내전에서 딱히 왕실이 비겁하다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비난을 하기가 무색하게, 왕실은 그보다 더 큰 수모도 이겨내고 나라의 입지를 다시 잡았습니다.
슬로바키아의 산속에서, 연락을 끊고 그것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철이없었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뭐 더 큰 시련을 겪는 왕실을 보니 조금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번에 저는 조금은 저를 되돌아보고 왕실에 대한 오해를 해소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번 초청에 응한 것도, 사실은 그런 우리 측 역시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보여드리고자 하는 취지도 있었습니다.
이런 저의 의사를 조금은 왕실도 이해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눈빛이 서로 오갔다. 되게 달콤한 이야기다. 위협으로 여겨지던 권신이, 이제는 개심했으니 다시 봐달라고 한다.
믿고 싶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이야기지. 그리고 그것을 지적한 것은 역시 마고 공주였다.
“못본 사이에 혀만 반지르르 해진 모양이지? 그런 술술 넘어가는 이야기는 동화책으로나 쓰지 그래?”
“좋은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그 동화책의 말미에 이렇게 끝을 내볼까 합니다.
북방의 야수는,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기사님들에게 자신의 앞마당 푸스타 초원에 양지바른 땅에 언제든 와도 좋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라고 말입니다. 어떠십니까? 제가 생각한 동화의 결말이?”
“······!!!!!!”
순간, 엄청나게 많은 생각들이 서로의 눈빛을 통해 오갔다. 동화로 비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건 정치적 제안이다.
말 그대로, 근위 2군이 평소에는 진입하는 순간 바로 내전 개시라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는, 슬로바키아 남쪽 푸스타 초원까지 주둔을 동의하겠다는 말이다.
헝가리 북동쪽을 둥글게 감싼 형태의 슬로바키아의 배를 찌를 장소를 우리 측에 넘겨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자신이 결코 적대적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건 진짜다. 정말로 근위 2군이 그곳에 배치하고, 아르파드 계열 영주들의 병력이 후방 지원으로 붙으면, 슬로바키아군은 외통수를 맞는 거나 다름없다.
결국, 그렇게 되면 슬로바키아군도 아르파드 왕실의 의사에 따라, 내전은 꿈도 못꾸고 대외 전력으로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수백년간, 헝가리에서 복잡다난한 분쟁을 이어갔던 슬로바키아인들이, 비로소 마자르계 아르파드 왕실에 굴복하겠다고 선언한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선물에 이슈트반 국왕의 표정이 주체를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왕세자도.
마고 공주만이 분한 표정을 참는 듯 보였지만, 그래도 구체적으로 뭔가를 강하게 반문하지는 못했다. 그 자체로 너무 파격적인 양보였으니깐.
“하하하!!! 오늘 어쩌면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일지도 모르겠군.
북방 대공이 스스로 오해를 풀고, 오랜 은원을 해결하고 우리 품에 안기는 날이 오리라고는 내 상상도 해보지 못했네.
진심으로 내 그대의 결단에 경의를 표하네.
그리고, 맹세컨데 더 이상 우리 마자르와 슬로바키아가 반목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이것을 주님에게 고할 수 있어 진심으로 기쁘다네.
자! 여기 모인 모든 헝가리의 방백들과 공후와 왕족들이여. 다들 잔을 채우라.
나, 국왕 이슈트반이 제안하노니,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은 다 같이 우리 슬로슈 대공을 위해 건배하도록 하세.
그는 그럴만한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는 자이니 말이야. 다들 채웠나? 건배!!!”
“북방 대공에게 건배! 아르파드 왕실에 영광 있으라!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이어질 우리 헝가리의 평화를 위해 건배!!!”
모두가 다 마치 오늘이 우리 시대의 최고의 날이라도 되는 듯 즐거운 표정으로 건배했다.
쿠타이 녀석이라면, 이 상황에 ‘그래, 그거면 된거야.’ 라고 납득하라고 하려나? 상황이 그렇기는 하지.
그냥 나만 얻어터진 우리 애들 땜에 고민하면, 다들 행복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니깐.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더 이상 자리를 버티기 힘들어졌다. 어차피, 웃고 떠드는 자리가 그리 익숙하지도 않고,
가급적 여기서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미리 시녀장님과 마고 공주에게 경고를 받은 것도 있고. 그러니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나는 파티장을 빠져나와 발걸음을 우리 군의 임시 숙소로 쓰고 있던 제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사관의 과거 병영으로 쓰던 임시건물은, 마고 공주에게 뜯어낸 수리비 덕분에 제법 깔끔하게 알현실과 같이 정비되어 있었다.
문제는 거기 널린 사람들 뿐인가? 여기저기 끙끙 앓는 사람들로 병영은 혼잡스러웠다.
그리고, 가벼운 상처라고는 해도 목검으로 두들겨 맞은 부상이다. 골절이나 타박상은 당연할 정도로 넘쳐났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발견한 병사들이 놀라 말했다.
“어? 공녀님이시다. 공녀님, 왜 높으신 분들의 파티에 안가시고 여기에?”
“여러분들이 걱정되어 자리에 있기가 좀 그렇더군요. 양해를 구하고 왔습니다. 부상들은 다들 괜찮으십니까?”
“하하하. 뭐 이정도는 너끈합니다. 하루이틀 귀족가 도련님들한테 맞아본 것도 아니고··· 어? 공녀님. 그러시지 않으셔도.”
“붕대로 압박 제대로 하세요. 어설프게 해서, 괜히 세게드에 가서 교관님들에게 혼나지 마시고요.
그리고, 터진 상처는 꼭 약초를 붙이고 붕대로 감으시고요. 동행한 메이드 간호병들은 꼼꼼하게 마무리 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주의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근데, 다들 괜찮다고 들떠 있으셔서.”
응? 들떠? 왜? 근데, 그런 의문은 이내 풀렸다.
“근데, 공녀님. 저희 오늘 제대로 잘한 것 맞죠? 지는 역할이었기는 했지만, 저희 제 몫을 제대로 다 한 것 맞죠?”
“뭐, 역할이 역할이긴 했지만, 그래도 동포들이 저쪽이 이겼다고 환호하면서 즐거워 하는 걸 보니, 당하는 저희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응? 근데, 우리 내가 마지막에 깃발 최종 거점에 먼저 꽂았으니, 규칙 상으로는 우리가 이긴 거 아닌가?
“야! 그게 뭐 중요하다고 따져. 그냥, 그러려니 해. 다들 좋은게 좋은거지 뭘 거기다 굳이 우리가 이겼다고 초를 치냐?”
“히히히. 그런가? 뭐, 그럼 우리가 진걸로 하지 뭐.”
어우, 머리야. 이 인간들 되게 뿌듯해 하고 있었다. 나는 죄의식과 수치스러움에 몸부림치는데, 이 인간들은 무슨 반응이 수해 지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흑, 이 인간들아!!! 오늘 니들은 그냥 광대 노름에 뒤지게 맞고 오기까지 한거라고.
그리고 그 주범이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닌 나라고. 그러니, 내 앞에서 죄의식 자극하게 자랑스럽게 오늘 일 얘기하지 마!!!
더 얘기했다가는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잘못을 고백하는 대신, 그들의 분위기를 깨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쉬시고, 내일 하루는 제 재량으로 자유시간을 드리도록 하죠. 부다페스트 구경을 하고 오세요.
그리고, 지금 쉬시는 동안에는 대사관 측에 술과 고기를 준비하라고 말해두겠습니다. 오늘 하루 고생하셨고, 많이 아프시겠지만 일단 먹고 기운내세요.”
“우와아아아아!!! 공녀님 만세!!! 이런 호사는 천국에나 가야 받는 건줄 알았습니다!”
“잘 먹고 마시겠습니다!!!
나는 뒤로 환호하는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병영을 빠져나왔다.
그래, 그거면 된거야. 어찌되었건, 수치심이나 미안함과는 별개로 슬로슈는 이번 훈련을 통해서 왕실에 유화적인 입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그것은, 당분간 아르파드 왕실이 우리에게 큰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고, 헝가리에서 큰 소요가 터지질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칫 잘못하면, 헝가리를 구성하는 4개의 무력 집단 중에 3개가 나머지 1개와 맞붙는 상황이 될수도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완전히 해소된 것이다. 이제는 4개의 무력 집단 모두가 아르파드 왕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그 결과를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병사들의 해맑은 부상을 뒤로 하고,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마음을 달래었다.
그래, 그거면 된거야. 그거면···
그리고, 다음날 슬로슈는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자기 영지로 돌아갔고, 우리는 조용히 세게드로 복귀했다.
이슈트반 왕세자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근위 2군에게 희소식을 전하고, 슬로슈가 양보한 푸스타 초원의 거점들에 병력 배치를 명령했다.
순식간에 그 배치가 끝나고, 얼마 후 근위 2군은 기세좋게 출정식까지 거행하며 푸스타 초원으로 향했고 전해졌다.
그리고, 나는 울프스턴 경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아니, 우리 애 얼굴을 봐요. 이거 흉지게 생겼잖아? 애를 데려갔으면 무사히 데리고 와야지, 공녀가 책임자인데 이러면 되는 거에요?”
“아이, 교관님, 괜찮다고 했잖아요. 창피하게 여기까지 찾아와서.”
“얘! 어디가!!! 정말, 네 맘대로 이러기야!!! 내가 못살아 정말!!! 병사들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더니 정말···”
아, 씨. 그만 좀 하라고! 안어울리니깐, 그 앞치마도 좀 벗고!!! 병아리 그림은 뭐야?
그렇게 내가 형이하학적인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마티 경이 방으로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공녀님. 큰일났습니다.”
“네? 뭔데요? 이번에는 누구네 엄마가 또 항의하는데요?“
“그,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뭐가요? 뭐가 사라졌는데요?”
그리고, 마티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이어졌다.
“푸스타에 배치된 근위 2군이··· 완전히 섬멸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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