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3
“베오울프 연대! 저들을 제압하시오. 이미 제국의 영토인 대사관에 발들인 자, 쳐죽여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소.
오늘 다시 저 비열한 자들은 제국의 손에 완전히 복속될 것이다. 채찍이 아닌 전갈로 말이다.”
헝가리 측 사람들이 경악하였다. 아르파드 근위대가 허둥지둥 이슈트반 국왕을 둘러싸며 달아나려 하였고,
국왕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뒤로 물러나려 하였다. 그리고 마고도 하얗게 질렸고, 세자는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공작님과 시녀장님은 완전히 얼어붙어서, 얼마 전 제국에서 겪은 수모를 상기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피비린내가 풍길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베오울프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상황은 율리아도 예상 밖이었는지 눈만 껌뻑거리며 얘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율리아에게, 울프스턴 경이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이봐, 환관장. 지금 상황과 심정은 충분히 알겠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당신 명령은 따를 수가 없어.”
“뭐라고요? 어째서? 지금 명백하게 저들이 제국 대사관에 들어와 우리를 도발했는데. 당신도 제국군이라면 교전 수칙에 따라 대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제국군이라면 그래야지. 근데, 문제는 지금 우리가 제국군이 아니라는 거야.”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뭐, 뭐야? 설마하니 배신?
아니, 아니지. 베오울프는 원래부터 제국군 편제가 아닌 용병들이다. 그러니 그들은 계약에 따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배신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말이지. 그저 계약 관계가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설마 지금 그런 상황? 그리고 그걸 입증하는 말이 울프스턴의 입에서 나왔다.
“현재 베오울프 연대는 제국군과의 고용 계약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어. 그래서, 현재 우리는 아욱실리아 소속이 아니야.
지금은 그냥 전역한 민간인 신분이지. 그래서, 우리는 제국군 교전 수칙을 따를 수 없고, 환관장인 당신을 현지 교전에 대한 의사결정권자로 볼 수 없어.
현재, 우리는 민간군수회사의 에이전트 자격으로 새로운 클라이언트의 방침을 따라야 해.”
“뭐, 뭐라고요? 고용 계약이 중단되었다고요?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베오울프는 아욱실리아 중에서도 특별히 황궁과 직접 계약을 한 부대인데. 그걸 누가 마음대로 계약 중단을 시킨단 말입니까?”
그리고, 새로운 클라이언트? 그게 누군데요?”
그러자, 갑자기 그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응? 뭐야? 왜 나를 봐? 에엥? 나? 새로운 클라이언트가 바로 나?
그리고 병사 중에 한명이 나에게 서류를 한장 내밀었다. 그리고 울프스턴이 말했다.
“유도키아 황후마마께서 직접 서명하신 일시적 계약 중단 합의서와 신규 고용 계약서다.
그 계약서에 의하면, 그 고용 계약의 주체가 되는 지명된 서드파티 클라이언트는 바로 카밀라 아르파드다.
그러니, 우리에 대한 명령권은 공녀에게만 있다. 그러니, 교전은 무조건 공녀의 명령이 있어야 한다.”
어이가 없어서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고, 황후마마. 고맙기는 한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이세요?
제국군 전략병기를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내 개인 사병으로 준 거나 다름 없잖아요? 민간인은 무슨 개뿔이 민간인. 하나하나가 인간 흉기들인데.
한마디로, 내가 원한다면 지금 내 손으로 헝가리를 멸망시켜도 상관없다는 재가를 한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권한에 황당해서 말을 잃었다. 그리고 울프스턴이 말했다.
“공녀에게 다시 물어보지. 저것들··· 손 좀 봐주면 되나?
손은 우리가 써. 뒷처리도 우리가 하지. 공녀의 안전은 완벽하게 우리가 지켜. 하지만, 의사결정은 우리가 못해.
공녀가 해야지. 그러니 물어보지. 환관장이 제안한 저 업무 요청, 할까?”
나는 다시 한번 나에게 선택지가 쥐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한번씩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헝가리 측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 율리아의 광기, 베오울프의 느긋함.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나는 베오울프가 아닌 아르파드 근위대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 그만 하도록 하시죠. 근위대, 국왕 폐하와 왕세자님을 모시고 왕궁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피차, 여기 모인 모두가 오해와 불만이 있을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정도에서 그만하시죠. 모두에게 그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당신들의 딸이자, 제국의 전권대사로서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양측은 뭔가 앙금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언급한 딸이자 대사라는 말에 공작님과 국왕은 살짝 발끈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반박은 없었다.
베오울프는 시시하다는 듯 무기를 집어넣었고, 아르파드는 동료들을 부축하고 왕을 호위하여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처음으로 맞은 조국의 국왕 폐하와의 알현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험악하게 끝을 맺었다.
앞으로, 여기서 지내는 날들이 만만치 않을 것을 예고하듯이.
그런데, 그때였다. 헝가리 측과 마찬가지로 아직 불만스럽다는 듯 보이던 율리아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머문 곳은 바로 마고 공주였다.
그리고 마고 공주도 아직 할말이 남았는데 돌아가야 한다는 듯, 분한 표정으로 국왕과 같이 퇴거하다가 율리아와 눈빛이 마주치고 멈춰섰다.
잠시 눈빛이 격렬하게 오가고 나서 율리아가 말했다.
“마르가리트 아르파드. 일명, 아르파드의 백합이 바로 너더냐?”
“······”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저 지독한 경멸어린 시선으로 율리아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비웃듯이 받아 넘긴 율리아가 혀로 입술을 핡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쉽네. 지난번 전쟁에서 운좋게 제국에 인질로 오지 않아서 말이야.
만약에 템즈의 꽃 대신에 아르파드의 백합이 왔다면, 나름 이것저것 재밌게 황궁 지하에서 놀아줄 수 있었을텐데 말이야.
아쉬워. 그 입에서 처절하게 차라리 죽여달라고 지저귀는 걸 듣고 싶었는데 말이야.”
마고는 소름돋는 눈빛으로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뭔가 말하려는 듯 부들거리다가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야, 이씨. 그걸 꼭 그렇게까지 이겨먹어야 하냐?
나는 묘하게 마고에게 끝내주는 뒤끝과 집착을 보여주는 율리아에게 혀를 차며 말했다.
“연극 끝났으니, 제발 적당히 좀 하시지. 그래도 우리 공주님이시다. 그리고 신성동맹 측의 은밀한 라인이기도 하고.”
“그 두가지는 되려 적당히 하지 않아야 할 이유 아니냐?”
더 이상 말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과 마고 공주. 두 사람의 갈등이 왠지 모르게 나에게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
그리고 나는 일단 녀석에게 해야 할 말은 하기로 했다.
“일단, 고맙다고 해야 하나? 상황을 모면하게 해준 건 고맙지만, 방법에서 그럴 맘이 안생기네.”
“고마워 할 필요 없어. 너 좋으라고 한 일 아니니깐. 그리고, 죄다 연극인 것 만은 아니니깐.”
“뭐, 뭐라고? 죄다 연극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응? 설마?”
“황궁이 개만 딸려보내 줄거라고 생각했냐? 감시자도 당연히 붙는다. 언더커버로 오긴 했지만 좀 주의하시길 바래.
네 옆에 사생활의 영역까지 리키스카의 수장과 황궁의 파라코이모메노스가 관리해드릴 예정이니 말이야.
뭐야? 눈치 못챈 거 아니잖아? 설마하니, 정말로 내가 바실 메이드 노릇만 하려고 동행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얘는 가끔 되게 맹하더라.”
율리아의 말에 나는 확실히 만만치 않은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아아··· 그러시겠다 이거지? 그래, 뭐 나름 감시인 역할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저 녀석이 감시인이래도 딱히 부담감이 없어서 실감이 안났지.
오늘만 해도, 최악의 깽판보다는 솔직히 도와줘서 고맙다는 마음이 더 컸으니깐.
“어련하시겠어? 그래, 알아 처먹었으니 좀 살살하자. 팍, 씨 열받아서 죽여버리기 전에. 그리고, 거지 같은 연극은 일단 고맙다.”
녀석은 내 말에 어께를 으쓱했다. 기분은 제법 유쾌해 보였다.
그래, 그 정도로 날뛰고, 연극이라지만 그토록 바라던 나를 엿먹였으니 기분 참 좋으시겠다.
그리고 나는 녀석과 같이 대사관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우르르르··· 콰과과광!!!’
“어어어? 건물이 무너졌다!”
“멍청아! 그러니깐 벽을 그렇게 마구 부수고 들어가지 말랬잖아.”
베오울프 대원들의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들려오고, 정말로 대사관 알현실 건물이 붕괴했다. 와, 씨. 마무리 죽이네.
그걸 보며, 왠지 나는 앞으로의 일들이 저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긴 하루다. 이제 다 끝났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기겁할 일은 한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그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실에게서 벌어졌다.
“아, 이제 나오시네요. 공녀님, 형님, 괜찮으세요? 도착한 베오울프와 같이, 말릴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마구 달려 들어가셔서 걱정했습니다.”
“아아, 다 잘 해결되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좋은 말과 엄한 태도로 교섭을 마무리했습니다.”
뻥치지마. 이 망할 년아? 그게 어디가 좋은 말과 엄한 태도야? 그 말에 안도하는 바실을 보며, 율리아는 의외로 핀잔을 주듯 말했다.
“아아··· 다행이군요. 저는 혹시나 큰일이라도 날까봐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별 걱정을 다하시는군요. 근데, 정 그렇게 걱정스러우시면, 차라리 이번 기회에 혈태자의 모습으로 폐하께서도 난입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저 주제도 모르는 이슈트반 국왕에게 제국의 군신의 위엄을 한번 보여주셨으면 좋았으련만.
저 폐하만 믿고 날뛰는 망할 기집애가 나름 핀치였던 모양인데, 이럴 때 한번 제대로 멋진 모습 한번 보여주지 그러셨습니까?”
뭐래, 이 자식이. 근데 살짝 빈정을 담은 율리아의 말에 바실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수행 장교 신분으로 방문한 것이니, 그건 좀 무리겠죠. 아무쪼록 형님이 잘 해결해주셔서 다행입니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바실을 보며, 그래도 이 녀석이라도 좀 얌전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흠칫했다. 왜냐하면 내 눈에 생각치도 못한 것이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걸 본 나는 흠칫하며 얼떨결에 율리아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걸 본 율리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야, 갑자기 왜 이래? 무슨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사색이 되어서.”
유령이면 차라리 다행이게. 그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내 시선에 들어온 그것,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저, 바실의 칼자루에 흙이 묻어 있다는 것에 불과하니깐.
하지만, 그걸 본 나는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만약, 비실비실하고 순박한 얼굴로 칼자루에 느릿하게 미끄럼 방지 처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갈 거에요.’
그래, 확실히 그랬었지. 하지만 정작 웃기는 것이, 그랬던 바실도 그때 라구사에서 칼자루에 미끄럼 방지를 하지 않고 그냥 싸웠다.
녀석의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전투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칼자루에 흙이 묻어 있었다.
나는 순간 오늘 경험한 일 중에 가장 심한 오한을 느끼며, 마음 속으로 율리아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 새끼가 먼저 급발진하지 않았다면, 오늘 내가 무엇을 보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오, 젠장. 이제 집에 돌아왔는데, 왜 나는 아직도 집에 좀 가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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