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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머리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곧바로 내가 취해야 할 다음 반응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래서, 조금 생각이 필요했고, 다행스럽게도 이내 나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행동으로 취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창문으로 야경을 보고 뒷짐을 지고 말했다.
“어서 가라. 나는 아무것도 못본 것으로 해주겠다. 그리고, 반드시 행복해라.
뒤는 내가 책임지마. 어서 가! 곧 해가 뜰꺼야.”
훗! 괜찮았어. 애증의 웬수를 저 멀리 송별하는 것으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어. 근데, 그 년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래? 미친 년아! 고국에 돌아오더니 코로 굴라쉬(Gulyás)를 처먹었나? 무슨 헛소리야?”
“곱게 탈주하는 거 눈감아 주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시비걸기냐? 내 맘 바뀌기 전에 어서 가라고.
왜? 도주자금이 필요해? 그렇다면 군대 예산에서 빼서라도 줄 용의가···”
“정신차려, 이 미친 년아! 내가 가긴 어딜 가? 나는 황궁의 파라코이모메노스이고, 공동황제의 소유물이다.
내가 그걸 다 내팽겨치고 나갈 만큼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였냐?
그리고, 설령 가는 것이 나은 상황이라고 해도, 나는 못가! 나는 절대 마르탱과 그런 삶을 꿈꿀 수 없어.”
“아니, 왜? 첫사랑이잖아? 그리고 아직도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고. 그렇다면, 서로 같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뭐가 어때서 그래?
황궁이니, 황족이니 하는, 너에게 얽매인 것만 털어내고 같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달아나면, 솔직히 너 평생 네 정체 안들키고 살 자신있지 않아?
그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황궁의 일이 걸린다면 그건 내가 막아주겠다고. 난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호의로 제안하는 거야.”
나의 말에 율리아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그리고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내가 원치 않아. 모르겠어? 나는 마르탱이 진심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나 같은 거세당한 남자가 아니라, 제대로 된 자신을 사랑해줄 여자를 만나고, 그 사이에서 사랑스러운 자식을 보고,
전쟁이나 암투에 연루되지 않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래. 진심으로.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정말로 무리해서라도 무슨 짓이든 할 용의가 있어. 하지만···
그런 미래에 나는 끼어들어서는 안돼. 만약에 내가 여자였다면 네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나 역시도 서글프지만, 그래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이런 거짓된 나를 녀석의 인생에 더 개입시켜서는 안돼.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단 말이야.”
강한 어조가 아니었지만, 의외로 반박하거나 딴지를 걸 마음이 안들었다.
녀석이 보여주는 흔치 않은 진심어리고 절실한 반응이 그럴 엄두를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좀 이해도 갔고.
확실히, 저 녀석과 같이 살면 언젠가 틀림없이 일반인이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생기고도 남겠지.
녀석은 그걸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한 소년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잘하면 저 웬수를 손도 안대고 처리할 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녀석에게 말했다.
“뭐 그렇다고 해두자. 그럼, 청혼은 거절했겠네? 그래서 그렇게 우울해져서 돌아온 거야?”
“아니야. 그래서 우울한 것이 아니야. 네 말처럼 마르탱의 제안은 당황해서 거절했어.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어.
마르탱이 나의 거절을 납득하지 못하는 거야.”
“응? 납득을 못한다고?”
“그래. 뭔가 내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그런 처지고, 그래서 거절한거라고 착각한 것 같더라.
자기가 어떻게 하면, 내가 자유가 되냐고 물어보더군. 그 면상이 수수한 주인 아가씨한테 얼마 주면 되냐고 물어보더라.”
면상이 수수한 주인 아가씨라면··· 나냐? 이 쌍으로 짜증나는 커플년놈들아? 발끈하려는데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마르탱의 의지를 너무 간과했어. 그리고, 나에 대해서 그 정도로 간절한 마음이었는지도 예측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것저것 변명을 늘어놓으며 거절할 수 밖에 없었지. 하지만, 안먹히더라.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날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만 불타는 것 같더라고.
결국, 최후의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최후의 방법? 그게 뭔데?”
“뻔하잖아. 가장 매정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남자 거절하는 방법.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고 했지.”
“에라이, 썅년아!!!”
“그래. 이번만은 욕해도 인정이다. 나 망할 썅년 맞어. 하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마르탱의 결심을 꺽으려면.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당황하는 마르탱에게 말했지. 미래를 기약하고 만나는 정인이 있다고.
그러니, 너의 청혼은 정말 고맙지만,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이야. 마르탱 울더라.”
“그러고도 남지. 퍽이나 잘하셨다. 뭐, 하지만 생각해 보면 네가 바라는대로, 그 친구 미련을 버리게 하려면 그것 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긴 하네.
그래서, 그렇게 데이트가 파토났고, 그래서 죽을 상을 하고선 돌아온 거야? 그렇게 끝난거야?”
나의 말에 율리아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차라리 끝났으면, 서글펐어도 깔끔하게 이별하고 왔겠지. 그런데 문제는 안끝났어. 마르탱이 봐야겠데.”
“뭘봐?”
“뭐긴 뭐야! 내 연인이지. 대체 그게 누군지 자기 눈으로 꼭 봐야 인정할 수 있데.
그 녀석을 눈앞에 데리고 오라고 하더라고. 지금 그래서 내가 망했다고 하는 거야! 아아악!!! 난 망했어. 이걸 대체 어쩜 좋아! 엉엉엉.”
나는 녀석이 저지른 사고에 할말을 잃었다.
뭐냐? 이 녀석. 근본적으로 되게 똑똑한 녀석인데, 묘하게 바신보다 못한 모지리 짓을 종종 하더라.
이 무슨 머리 속에 꽃밭이 펼쳐진 레이디들의 망상 속에서나 나올 만한 클리셰냐?
나는 아예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는 녀석을 보면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기 치고 온 년이 울긴 왜 울어? 울고 싶은 건 사기 당하고, 첫사랑 순정 배신당한 마르탱이 울어야지.
아무튼, 그렇게 말했다면 방법이 없네. 대충 아무나 네 남친이라고 둘러대고 데리고 나가는 수 밖에. 세게드에서 사람 불러오자.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가장 무난한 건 태자님 밖에 없겠네. 지금 파발을 보내면, 이틀 정도면···”
“잠깐만. 바실을 부르자고? 안돼.”
“뭐냐? 여기서 황궁의 환관장이 어떻고, 제국의 공동황제가 어떻고 할 상황이···”
“걔를 부르면 마르탱이 납득을 못한다고.
너 같으면 오랜만에 재회한 옛날 첫사랑이 지금 사귀는 끝내주는 남자라고 나온 것이 바실이면 납득하겠냐?”
그 말에 잠시 고민. 그리고 용모, 인상 등 이모저모를 검토. 그리고 나온 결론은···
“그러네. 못하겠네. 어딜봐서 자기가 저 농촌총각만도 못하냐고 다짜고짜 태자님에게 한판 뜨자고 달려들고도 남겠다. 기각.”
왠지, 현장에 없었는데도 의문의 1패를 당한 바실을 뒤로 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을 말했다.
“그럼, 누굴 네 연인 대역을 시켜야 해? 안드로니쿠스? 너무 인상이 튀고. 쿠타이? 동양인 소년을 좋아하는 장신의 메이드라. 좀 그렇네.
이런 일에 소질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티 경에게라도 부탁을 해봐야 하나?”
“아아악!!! 그만 좀 하라고. 다들 네가 생각해도 마르탱이 납득하지 못할 진상들을 꼽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
상황을 모르겠냐? 지금 내가 데리고 가야 하는 가짜 애인은 완벽해야 한다고.
마르탱이 보고선 질려서, 알아서 포기할 정도로 말이야. 용모면 용모, 학식이면 학식, 무력이면 무력, 지위나 재산, 명성 뭐 하나 빠지는 사람이면 안된다고.”
“아니, 그런 완벽한 사람을 지금 갑자기 어떻게 구해? 그런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내가 시집가고 말겠다.”
“그러니깐 내가 환장하겠다고 하는 거야. 세상에 그런 흔치 않은 남자를 무슨 수로··· 응? 남자?”
순간, 녀석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꼭 남자여야 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나도 아니고, 그리고 굳이 본인일 필요도 없어. 가명에 위장 신분이면 충분한데, 오히려 그 신분이 유명하다면···”
“너, 지금 뭔 소리를 중얼거리는 거냐?”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녀석의 눈이 빛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고 나를 향해 다가와서 말했다.
“카밀라. 우리 친구지?”
“뭐? 친구?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니가 언제부터 나랑 친구 먹었다고?”
“서로 안죽이고 공정하게 쌈질하기로 신사협정 맺었으면 다 친구 아니냐?”
“아니거든. 나 진심으로 너 죽이고 싶은데?”
“오오오!!! 나도 그래. 우리는 서로 같은 생각과 꿈을 가진 동지구나. 친구 맞네. 그러니깐, 우리 친구끼리 이번 한번만 좀 나를 도와주라.”
“도와주긴 뭘 도와줘? 이 상황에서 내가 할 것이 뭐가 있다고··· 응? 너, 설마.”
“어이쿠, 우리 눈치빠른 친구 같으니. 응, 그거.”
“안돼.”
“제발.”
“죽어도 안돼!!! 너 지금 나보고 남장하고 남친 행세해달라고 하는 거잖아? 미쳤어? 내가 왜 그 짓을 해야 하는데?”
“오오오!!! 역시 현명하고 사려깊으신 나의 사랑 에이전트 카밀님. 이미 알아채셨군요.”
“미친 년아!!! 나가 뒤지라고. 네 망상 속에 카밀이랑 손잡고 사라지라고!!! 여기 그런 미친 놈 없으니깐.”
“안된다고. 어딜봐도 네가 적임이라고. 그 수수한 상판떼기가 남장하면 확 사는 것도 그렇고, 제국의 공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것도 그렇고
말도 안되는 건물과 옥상을 뛰어다니고 날아오는 독침도 채내는 신체 능력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여자들을 말한마디로 홀리는 그 근본적으로 미쳐 날뛰는 바람둥이로서의 매력이 결정타야. 너 밖에 없다. 너 정도 되어야 마르탱이 포기할거야.”
“나를 어디다 취직시키려고 그러냐고!!! 안그래도 심란한데, 말같지도 않은 미친 소리 집어치워. 난 이제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 테니, 네가 알아서 해.
그리고 나는 몸을 돌려 녀석의 방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녀석이 달려와 내 앞을 막아서며 무릎 꿇고 내 다리를 붙들고 말했다.
“제발 부탁이다. 그것만 들어주면 내가 무슨 짓이든 할게.”
“하? 그러셔? 그럼 어디, 쉬운 것부터 해볼텨? 전에 시켜먹고 되게 고소해하던 그것부터 해볼··· 히익!!! 얌마!!!”
되려 내가 당황했다. 다리를 붙들고 사정하는 녀석에게, 절대로 녀석이 할리가 없겠다는 생각에 발등을 내밀었다.
그런데, 녀석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발등에 미친듯이 키스하는 것이었다.
녀석의 녀석답지 않은 반응에 되려 내가 식겁했다. 이 녀석 왜 이래? 누가 보면 되게 오해할 것 같은 장면이잖아. 그만두라고.
그래서, 나는 다리를 뿌리치려고 했는데, 녀석은 그걸 붙들고 놔주질 않았다.
그리고 울먹이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제발 부탁이다. 내 자존심이나 체면 같은 건 지금 아무런 의미도 없어.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가능한한 마르탱이 내 수치스러운 진실을 알지 않고, 그리고 가능한한 상처받지 않고, 나를 자신의 삶에서 놔주길 바래.
너라면 마르탱도 틀림없이 납득할 수 밖에 없을 거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결코 그 은혜를 잊지 않을게. 이번 한번만 도와다오. 내 일생의 흔치 않을 간절한 부탁이다.”
나는 이제 아예 어이가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게 또 웃기는 것이 그걸 무작정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죽어도 녀석이랑 친구라는 걸 인정할 수는 없지만, 나름 같은 궁중밥 먹은 신세에 악연이 쌓인 상황에서 무작정 남처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얼떨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은 만세를 부르며 안도했다.
근데, 이거 지금 괜찮은 상황인 거야? 아무리 세상이 뒤집어져도 그렇지···
거세당했다지만 여장한 남자의 연인으로 남장한 여자가 첫사랑 앞에 나타나서 애인 행세를 해야 하는 거라고?
아오, 이 무슨 말세야!!!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이 대체 어딨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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