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
잠시 식은 땀이 흘렀다. 아니, 그런 거라면··· 나보다는 여기서 다소곳한 표정으로 나 보고 있는 이 미친 년한테 요구하는 편이···
내가 허약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자이고 정식으로 전투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고.
근데, 갑작스럽게 무력을 선보이라고 하니, 나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것도, 규칙도 없이 내가 알아서 선보이라니.
그런데 그때였다.
“길을 비켜라. 왕세자님이 왕궁으로 귀환하신다.”
“아르파드 근위대의 앞을 막는 무엄한 놈들은 용서치 않으리라. 다들 길을 비켜라.”
대로에서 일대의 군대가 큰소리를 치며 행인들을 길가로 내몰면서 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한숨이 나왔다. 전에 대사관에서 봤던 아르파드 근위대다. 그리고 멀리 군기를 보아하니 이슈트반 왕자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차림새를 보고 나는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들 좋은 장비와 건장한 체격을 가진 청년들이었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규칙성이 없었다.
각자 맞춰입은 중갑의 형태는 제각각이었고, 무기도 서로 개인적인 무기를 다양하게 들고 있었다. 이건 뭐지? 전에 본 애들보다 더 하수들인데.
그런데 그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바로 마고 공주에게 보고하며 들었던 소식.
귀국한 망명 귀족 젊은이들이 대거 아르파드 근위대에 합류하였다고 했지? 아마도, 지금 눈앞에 병사들은 그들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의욕은 넘치고, 사기도 높아 보였다. 그리고 좋은 장비와 건강한 체격들이 일대일이라면 쉽게 당해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불안했다. 바실의 지론처럼 군에서는 제일 평범해 보이는 놈이 제일 위험하다.
나는 그들에게서, 제국에서 자주 목격했던 소름끼치는 평범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조직력도 떨어져 보였고. 라구사가 떠올랐다. 300 대 2가 아니라, 1 대 2를 300번 한다고 했었지?
호흡이 잘맞는 조직력이 실전에서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내가 몸으로 실감했었지.
그걸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응? 이런 상황이라면···
그때 마르탱이 말했다.
“이봐. 고개를 숙이라고. 그리고 잠시 거리에서 떨어지도록 하지. 일단 시험은 자리를 피해서··· 어? 지금 뭐하는 거야?”
“꺄아아아악!!!”
거리에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들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치마가 위로 확 들려서 속옷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율리아의 모습이었다. 물론 범인은 나.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거짓말 안하고 거리에 모든 남정네들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특히나, 젊고 혈기넘치는 아르파드 근위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신병으로 보이는 그들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듯 위협적으로 행진하다가, 갑작스럽게 전원이 멈춰서서 멍하니 굳어버린 것이었다.
심지어는 어느새 우리 앞에 나타나 대열의 중간에서 그들을 통솔하던 이슈트반 왕세자도 마찬가지였다.
거리가 잠시 침묵에 휩쌓였고, 잠시 후 정적을 깬 것은 근위대원들이었다.
“뭐, 뭐야? 저 끝내주는 미인은? 이봐, 봤어?”
“순식간이었지만 보긴 했지. 근데, 누구지? 어느 집안의 메이드야? 저런 청초한 메이드라면 기억이 날텐데.”
“누군지 모르겠다면, 물어보면 되지. 이봐요, 아가씨, 혹시 어느··· 응? 으아아아악!!!”
근위기사의 수작질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율리아에게 말을 걸던 그들의 면상에 날아드는 발길질이 있었으니깐.
그 공중도덕도 모르는 치한이 뻔뻔스럽게 소리쳤다.
“이런 무례한 놈들. 감히, 네놈들이 가련한 레이디를 겁간하려고 하다니. 하늘은 용서해도, 이 몸은 용서치 못하리라.”
“뭐? 그게 무슨? 그리고 네놈은··· 어? 어어어? 으아아아악!!!”
내가 벽을 박차고 몸을 날려 발길질을 날려서 쓰러뜨린 동료를 보고, 경악한 근위기사는 나에게 뭐라 말하려다 다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동료의 면상을 그대로 밟고 다시 점프해서 녀석의 면상도 갈겨버렸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아르파드 근위대 2명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 무사히 착지해서, 자세를 취하면서 소리쳤다.
“권세와 무력을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는 무도한 무리들. 내가 너희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내 이름은 카밀.
이 어지러운 세상에 너희 같은 자들을 벌하고, 약한 자와 핍박받는 자를 돕는 바람의 나그네다. 아리따운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율리아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와아아아!!! 멋지다. 멋져.”
갑자기 거리에서는 박수 갈채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다들 선망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물론, 근위대를 제외하고.
“이게 무슨 짓이냐? 근위대!!! 저 놈을 포박하라.”
뒤에서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굳어 있던 장교가 소리쳤다. 그러자, 근위기사들이 할버드를 들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걸 본 나는 먼저 마르탱을 봤다. 어이없어 하는 마르탱에게 자그만한 소리로 부다페스트 외곽의 성당에서 보자고 말했다.
그 다음에는 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녀석에게 말했다.
“오오오··· 저 무도한 놈들이 아름다운 레이디를 겁간하려는 추악한 위도를 포기하지 않는구나.
일단 지금은 그녀를 이곳에서 피신시키는 것이 먼저일 듯 하다. 나의 레이디. 내 손을 잡으십시오. 저와 같이 하늘을 날아 달아나시죠.”
내 말에 율리아가 경악했다. 그리고 입을 딱벌리고 무언으로 물었다.
‘야, 너 지금 그거 하려는 거냐?’
‘어. 그거 하려고.’
‘미친 년아!!! 그건 너나 바실 같은 정신나간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그런 거 못해.’
‘네가 선택한 카밀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그리고 손을 내밀지 않으려는 율리아의 손을 내가 덥석 잡고, 나는 내가 그나마 자신있는 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본 아르파드 근위대가 소리쳤다.
“추격해!!! 놈이 벽과 지붕을 타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벽타기였다. 아, 지난번 라구사 사태를 겪고 나서, 이제는 건물 타기로 업그레이드 된 내 특기였다.
쿠타이 녀석이 까면서 말하기를, 무슨 일만 생기면 일단 누나는 창문 밖으로 뛸 생각만 했다고 했던가? 그때 머리 쥐어 뜯어서 미안하다 동생아.
아무래도 이거 정말로 내 천직인가봐. 잡생각을 떨치고 나는 자재를 밟고 난간을 잡고 지붕 위로 뛰어올라서 율리아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걸 닭쫓던 개처럼 보다가, 나를 따라 벽을 탈 궁리를 하는 근위기사들을 보았다.
또 부다페스트의 전망도 보았고. 이 정도면, 콘스탄틴노플이나 라구사만은 못해도 제법 건물과 성벽이 어울어져 위로 달아날만 하다.
군데군데 빈틈이 있기는 하지만, 뭐 그건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일이고.
결정적으로 중갑을 걸친 근위기사들이 처음 해보는 벽타기에 아무래도 익숙치 않을 것이, 내가 이 방법을 선택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예상대로 근위기사들을 나와는 달리 낑낑대며 건물을 올라왔고, 그걸 보며 나는 소리쳤다.
“와하하하!!! 추격하는 속도가 굼벵이 같구나. 그 속도로 내 망토 한 조각이라도 잡을 수 있겠나?
그래도 한번 근성을 발휘해봐. 나 잡아 봐라~~~”
그리고, 나는 겨우 옥상에 올라온 근위기사를 외면하고 옆의 건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부다페스트의 백성들이 다시 한번 박수 갈채를 보냈다. 당연히 근위기사들은 욕을 퍼부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달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아슬아슬한 옥상과 난간과 처마를 밟고 달렸다.
곧 여기저기서 나를 추격하다가 땅에 추락하는 놈들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건 우리 쪽도 상황이 비슷해 보였다. 몇번은 겨우겨우 나를 따라 점프하고 아슬아슬하게 도약하며 쫓아오던 율리아에게 한계가 왔다.
발을 몇번 헛디디기 시작하자, 녀석은 창백해졌고 곧 눈으로 나에게 소리쳤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어휴. 좀 조심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알았어, 여기서 갈라져.
지금 오기가 발동한 저 녀석들 눈에는 나만 보이는 듯 하니깐, 네가 갈라져서 슬그머니 군중 속에 숨어도 추격이 붙지는 않을거야.
약속 장소에서 다시 만나. 그리고, 한가지 더.’
‘한가지 더 뭐?’
‘살 좀 빼라. 몸이 무거우니 나랑 속도를 못맞추지. 황궁 생활 되게 편했나 보다.’
‘뒈져버려!!! 이 망할 년아!!!’ “근위대 나으리들!!! 저기 카밀이란 놈이 있어요. 여기에요.”
히이이익!!! 너무 놀렸나? 그래도, 이 미친 년아! 헤매고 있는 근위대를 네가 부르면 어떻게 해!!!
순식간에 그 신고를 듣고 달려온 근위대의 추격자들이 내 뒤를 따라 붙기 시작했다. 나는 숨이 터져라 달리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건물 여기저기를 몸을 날려 넘어다니다가, 어느새 나는 귀족가의 저택이 모인 거리로 접어든 것을 깨닭았다.
마침, 잘되었다. 높은 건물이 많은 여기라면 더 수월하게 추격을 따돌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던진 순간이었다.
“어? 어어어어? 으아아아악!!!” ‘와장창창’ “꺄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내 비명 소리, 뭔가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내가 평범한 옥상이라고 생각하고 착지한 곳이, 사실 옥상이 아니라 옥상 위에 설치된 가설 천막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무게를 버티지 못한 천막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있던 여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른 것이었다.
나는 실수했다는 생각을 하며 아픈 것도 잊고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려 애썼다. 내가 어디 떨어진거지?
응? 이건··· 티테이블? 그리고 내 주변에 입을 막은 여자들은··· 귀족가의 아가씨들이네. 어라? 내가 어느 귀족가 영애들의 티파티에 난입한 건가?
그런데 그때였다. 나를 보며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네··· 네놈은 누구냐? 감히 이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다니!!!”
“어? 마고?”
순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눈앞에 있던 것은 바로 얼마 전에 나한테 이를 갈던 바로 그녀, 마고 공주였던 것이다.
그녀가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엉겁결에 그녀를 마고라고 부른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들킬지 몰라 옷깃을 세웠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그녀에게 말했다.
“마르가리타 아르파드 공주님이시군요. 실례를 용서하시길. 이 몸의 이름은 카밀이라 하옵니다.
고명하신 아르파드의 백합을 뵙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서 평소보다는 좀 덜 과장되게 인사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손을 내밀려던 마고는 멈칫하더니 다시 손을 뒤로 빼고 나를 보며 말했다.
“카, 카밀이라고? 그 소문으로만 들리고 실존 인물인지 불명확했던 제국의 공적?”
“호오. 미네르바의 축복을 받으신 듯하군요. 네. 이 몸이 바로 그 제국의 무례한이올시다. 그리고,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헝가리의 난봉꾼이 되어버렸군요.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리고, 차 한잔 허락없이 마시겠습니다. 음. 실론산이군요.”
나는 옆에 그나마 무사한 찻잔에 차를 들어 마시고, 숨을 돌렸다. 그리고 머리가 아파왔다. 아오, 마고도 카밀을 알아?
대체 카밀의 신상이 어디까지 퍼진 거야? 신성동맹 측 고위층도 인지한 상황인거야?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 왠지 스케일이 점점 더 커져가는 것 같네. 이거 수습이 되려나 몰라.
그래서 벌컥벌컥 질나쁜 실론산을 마시는데, 마고가 당황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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