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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숙소로 돌아와 보니 생각치도 못하게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첫번째 손님은 나에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보며 반가이 맞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라트 경.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른 부대들이 전부 다 위기 수위를 낮추고 주둔지로 귀환했다고 들었는데 아욱실리아 예니체리는 그대로 크림으로 오신 모양이군요.”
“그냥 라트라고 불러주십시오. 공녀님은 그러셔도 됩니다. 네, 오랜만에 뵙는군요. 갑작스러운 차출 명령에 황급히 달려왔는데 이곳에서 공녀님을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욱실리아 예니체리는 귀환 명령이 조금 늦게 도달하여 그대로 크림에 도착하였습니다. 크림 테마 측의 강력한 요구로 외부 병력들은 귀환하고 있지만, 우리들이야 뭐 보급대와 군악대, 취사병들이니 크게 뭐라고 하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곳에서 머물며 크림 사태의 후방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네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곳의 분위기가 그렇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쪼록 최선을 다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나는 라트 경과 그의 군악대와 간단히 담소를 나누고 크림에 후방 지원을 위해 달려온 그들을 격려했다. 예산 낭비시키려고 재무장을 시키며 만든 인연이었지만 나름 나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들과의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보람도 느낄 수 있었고. 예전에 오합지졸 광대패거리 같은 모습을 탈피해서, 제법 중무장을 갖추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했던 일 중에 흔치 않게 성공한 공작의 결과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예산이 제대로 낭비되고 있구나.
그렇게 그들과 간단한 담소를 마치고 나서 나를 찾아온 두번째 손님도 나에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라트처럼 그 손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없었다.
“헬레나 시녀장님? 어떻게 여기에 오셨습니까?”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내 인생에 두통 유발 원인 1순위를 차지하는 헬레나 시녀장이었다. 어흑, 정말이지 콘스탄틴노플의 황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이 먼곳에 까지 찾아와서 얼굴을 마주하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에게 예를 표했고, 그녀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교전 임박이라고 통행 제한이 걸려, 하마터면 도착하지 못할 뻔 했다. 다행스럽게도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었구나. 하필이면 이렇게 오기도 불편한 곳이라니. 덕분에 내가 이런 고생을 하게 되는 것 아니더냐.”
“죄··· 죄송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아오, 교통 불편한 곳이면 좀 안오시면 안되시나요? 그런 나의 바램을 무산시키며 시녀장님이 말씀하셨다.
“신성동맹에서 긴급하게 내려온 공작 지시다. 다른 일을 제쳐두고 최우선으로 하라는 긴급 명령이 떨어진 사안이다. 지금, 이곳 크림 반도에 수십만 유목민들이 밀려들고 있다지? 그리고 그것을 방어해야 할 크림 테마의 귀족들은 총사령관인 혈태자에 반감을 가진 상태고? 그것이 사실이더냐?”
“아, 네··· 사실입니다. 지금 크림 테마의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혈태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그들이 선을 넘지는 않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어떤 소요가 벌어질지 장담할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왜 재확인하시는지? 서, 설마...!!!”
“네가 예상한 것이 맞을 것이다. 본국에서는 네가 어떤 식으로든 크림의 귀족들을 충동질해서, 그들이 혈태자와 큰 마찰을 일으키기를 기대하고 있다. 잘만 된다면, 크림이 밀려오는 유목민들에게 뚫려 아수라장이 되고, 우리의 눈엣가시인 혈태자의 존재를 그들의 손을 빌려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국의 월경지에 소요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제국 중앙의 통제력이 소모되는 것은 나쁜 결과는 아니지. 그래서, 네가 그 일을 해줘야 할 것 같다.”
쓰바. 욕이 안나올래야 안나올수가 없어.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막나가는 공작을 대놓고 지시하는 거야? 방금 전에 내가 본 차기 황제한테도 오만불손하게 굴던 놈들이라고. 황제도 무시하는 놈들이 겨우 내 공작에 넘어올리가 있겠냐고요!!! 지금 신성동맹에서 이런 지시 내리는 막되먹은 놈들의 머리 속이 다 궁금하다. 아니, 대체 왜 이 상황에 왜 이런 터무니 없는 공작을··· 응? 잠깐,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네. 갑자기 왜 신성 동맹에서 크림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개입을 하지?
흑해 북단에서 제국과 킵차크칸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 신성동맹에 무슨 이득을 가져온다고? 항상 터무니 없는 지시를 내리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뜬금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 시녀장님에게 물었다.
“말씀하신 취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윗선에서 신성동맹과 큰 이해관계가 없는 크림의 귀족들을 선동하려고 하는 건가요? 그로 인해 저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런 의사결정을 내리셨는지 의문스럽습니다만.”
“어, 음··· 그게, 확실히 표면적으로는 크림의 일이 신성동맹과 무관해 보이지. 하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크림을 충동질해서 얻은 결과로 우리 측에 상당한 이득을 제공할 존재가 있다.”
“네? 대체 그게 누구입니까?”
그리고 시녀장님의 입에서는 내가 생각치도 못한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엔리코 단돌로.”
“네··· 네엣?!!! 누, 누구요? 엔리코 단돌로? 조르지오 단돌로 도제의 아들이자, 베니스 공화국에서 제국에 사절로 왔고, 베니스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맡았던 그 엔리코 단돌로요? 아니, 갑자기 그 사람이 왜 여기서 나와요? 지난번에 베니스인들이 대거 제국에 항복했을 때 도망쳐서 종적을 감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랬었지. 그 동안 신성동맹에 곳곳을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베니스를 다시 되찾을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바리의 공포공이 들었다면 눈깔이 뒤집혀서 지중해를 다 뒤집어 엎을 소식이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기가 막힌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 정도로 심하게 제국에 데였으면 정신차릴 법도 한데.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거야? 그럴거면 애초에 제국을 상대로 시비를 털지 말았으면 좋았잖아. 그때, 제국이 두려워 할 정도의 해군력과 경제력을 가지고도 거하게 털린 주제에, 지금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뭘 어쩌겠다고 여기서 수작을 부리는 거지? 그리고 그걸 또 신성동맹은 좋다고 받아먹고 있고. 그런 나의 의문에 대해 시녀장님의 설명이 이어지셨다.
“크림은 원래 초원길의 종점으로 교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과거 베니스는 그곳에 직할령을 둘 정도로 공을 들인 지역이었고, 그만큼 막대한 부를 만들어 냈지. 그래서, 현재 그들의 직할령이 사라진 지금도 그곳에는 여전히 과거 운영되던 교역 기반과 거점들, 그리고 지지하는 자들이 존재한다고 하더구나. 거기다, 크림의 영주들이 가진 본국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그런 베니스의 유산들은 베니스가 제국에 편입된 이후에도 청산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온전히 크림에 잔재할 수 있었지.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베니스 독립세력은 그런 크림의 특성을 인지한 모양이더구나. 그래서, 슬그머니 베니스가 가지고 있던 해외 자산과 자본의 거점을 크림으로 집중시켜서 다시 한번 자신들의 통제하에 운영할 수 있도록 작업한 모양이더라. 한마디로 제국의 내부에 자신들의 거점을 은밀히 만든 거다. 그래서, 그들은 망명 세력이지만 경제력에 있어서는 상당한 힘을 되찾았다. 그래서, 그렇게 확보한 그들의 자금은 은밀하게 반 제국의 요소가 될 존재들에게 투자가 되기 시작했지.
조지아의 암사자 여왕도 그렇고, 이곳 크림의 영주들에게도 그렇고, 우리 신성동맹의 윗선에도 그런 그들의 손길이 닿은 모양이더구나. 물론, 그것이 그들의 손에 의해 전달되었다는 증거는 남기지 않고 말이다.”
나는 시녀장님의 말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맙소사, 어느새 이렇게 깊숙히 파고들었던 거야? 그리고 조지아에서도 그 녀석들이 개입했던 거야? 어째, 자금도 부족할 타마르 여왕이 잘도 체첸 병력을 유지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베니스의 자금이 들어갔던 거였구나. 그제서야 그때 가졌던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시녀장님의 말씀이 이어지셨다.
“신성동맹의 윗선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베니스가 가졌던 대외 자산과 자금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더구나. 베니스가 제국의 손에 넘어가서 한동안 각지에 흩어진 계좌와 연락망이 서로 단절되어 힘을 쓰지 못하던 것을, 엔리코 단돌로가 집결시켜서 다시 한번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신성동맹 측에도 자금력을 기반으로 이런저런 요구를 해오기 시작했지. 우리 윗선들도 재정적으로 궁핍하신 분들이 많아서, 그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 모양이시더구나.
그래서, 그들이 이번에 신성동맹 측에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 바로 크림의 소요이다. 그들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자금과 연락망의 거점이 되어준 크림에서 제국의 영향력이 감소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엄청나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사이가 좋지 않은 크림의 영주들을 더 제국과 반목시켜서, 제국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제국에 버티지 못하고 신성동맹과 베니스 측에 손을 내밀 경우 막대한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번 공작은 그런 배경을 통해서 내려진 것이다. 이제 이해가 좀 가느냐?”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교활하고 사악한 책략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대단히 무서운 책략이었다. 타이밍과 그 여파가 절묘할 정도다. 킵차크칸국의 난민들을 이용해서 전시 상태를 만들고, 그 현장에 방문한 바실에 반감을 가진 영주들을 충동질해서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면, 크림은 더 이상 제국의 영역으로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제국의 영역일지 몰라도, 물밑에서는 베니스의 입김이 깊숙히 들어와 있는 신성동맹의 영향권으로 넘어갈지 모른다.
그리고, 바실은 여러가지 의미로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엔리코 단돌로. 지난번 베니스와의 전쟁에서 기억하는 것처럼 대단히 교활하고 제국에 적대적인 자이다. 그 자가 조국의 복수를 위해 칼을 들었고 그 공세는 대단히 잔혹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난감하게도 이번에는 내가 그 공세의 앞에 서야 하다니. 정말이지 기가 막히기 그지 없었다. 머리 속에 조금 전에 봤던 크림 귀족들의 행패를 애써 달래려는 그 순둥이 녀석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아, 진짜 하기 싫다. 정말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르도 죄책감드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건가?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나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나는 마지못한 표정을 억지로 감추며 시녀장님에게 알겠다고 말했고, 시녀장님은 믿고 맡기겠다고 말씀하신 후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대로 콘스탄틴노플로 돌아가는 배편으로 이동하셨다. 그리고, 고민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 되었다. 자아··· 하라고 해서 하겠다고는 했지만··· 이제부터 뭘 어째야 하나?
사실 생각해보면 내려진 공작 지시가 대단히 모호하기는 하다. 그저, 막연하게 바실과 사이가 나쁜 여기 귀족들을 충동질해서 제국에 반목하게 만들어라. 말이 쉽지. 바꿔 말하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게 해라 라고 바꿔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말이다. 여기 귀족들이 무슨 바보도 아니고? 바실에게 이를 갈면서도 책잡힐 수준의 선은 교묘하게 넘지 않고 있는 녀석들이다. 그런 녀석들에게 아무리 바실이 마음에 안들어도 한번 붙어 보라는 식으로 설득할 여지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답이 나올리 없었다. 결국 혼자서 고민을 하던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머리라도 좀 식힐 생각을 하고 숙소에서 나와 식당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거기 바실과 수행원들이 조금 심각한 분위기로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어라? 쟤, 또 표정이 왜 저래? 나는 의문을 가지고 다가가서 물었다.
“태자 마마. 표정이 안좋으시군요.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 공녀님. 아닙니다. 그리 큰 일은 아닙니다. 공녀님께서 신경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 괜찮다고 말하는 바실을 대신해서 곁에 있던 안드로니쿠스가 울컥한 듯 소리쳤다.
“별거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십니까? 저 놈들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태자 마마께서 그렇게 관대하게 놈들을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저 놈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저런 오만한 짓을!!! 다 필요없습니다. 제게 명하시면 근위대를 동원해서 놈들을 제압하고, 녀석들에게 황실의 권위가 뭔지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명령만 하십시오.”
“근위대장님. 아니, 앤 형. 그러지 말자. 그럴 명분이 없어. 태도가 불손할 뿐이지, 못할 말도 아니잖아.”
바실은 흥분하는 안드로니쿠스 근위대장에게 사석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부르며 달랬다. 그러면서 내가 전해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어제의 작전 회의를 참관하고 나서, 바실은 이번 작전을 진행하는 크림 테마군에 어떤 식으로든 지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도착한 보급과 지원에 특화된 보조군, 아욱실리아 예니체리의 도착을 전해들은 바실은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크림 테마군 중에 크림 라인 밖에서 유격군으로 운영될 부대와 거점 요새에 주둔할 부대에 제공할 후방 보급을 자기가 직접 챙기겠다고 한 것이다.
기본적인 전략의 대전제는 크림 라인의 좁은 통로에 저들을 몰아넣고 고사시키는 것이지만, 크림 라인 이북에 위치한 요새들과 적의 움직임에 대응할 유격대들은 방어선 북쪽에서 흩어져 개별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고 한다. 수십만 유목민들이 몰려드는 와중에 그런 부대의 보급을 하는 것도 상당히 위험한 일인데, 그것을 바실은 직접 바랑기안 근위대의 호위 하에 예니체리가 보급을 하는 방식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표한 것이었다. 작전권에 중앙의 간섭을 끔찍히도 싫어하는 크림 테마군이지만, 그래도 보급에 대한 부분이라면 괜찮겠지 싶어 한 제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바실의 제안에 대해 크림 테마가 보인 반응은 여전히 냉소였다고 한다. 물론, 말로는 그런 위험한 곳에 태자가 가셔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지만, 태도나 표정으로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지간하다는 안드로니쿠스 근위대장도 그런 그들의 태도에 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휴, 정말 불손한 녀석들이네. 바실은 정말로 호의를 가지고 제안한 일일텐데. 그걸 그런 식으로 받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안드로니쿠스 근위대장이 푸념하듯 말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저 망할 녀석들이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게 할 수 있을까요? 콘스탄틴노플에 계신 황제 폐하라도 모셔와야 겨우 그 빳빳하던 모가지가 좀 굽혀지려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안드로니쿠스의 말을 듣고 내 머리 속에서 불연듯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어라? 황제? 그러고 보니, 전에 요하네스 의원이 한 말이 있었지. 여기 크림의 귀족들이 가지는 불만의 근원은 제국 전체가 아닌, 바실 본인에게만 해당된다고. 갑자기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뭔가 조금 전에 막막하게 느꼈던 일들이 원만하게 풀리는 실마리 같은 것이 보였다. 이거··· 잘하면 생각보다 쉽게 윗선에서 내린 공작을 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답답해하는 바실과 안드로니쿠스에게 말했다.
“저기, 태자 마마.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따로 크림의 귀족들을 만나봐도 괜찮을까요?”
“네? 공녀님께서요?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이미 보셨듯이 그 사람들 우리 쪽에 대한 태도가 냉랭하기 그지 없는데요.”
“네,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왠지 제가 가서 설명하면 조금 다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번 저에게 맡겨봐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나의 말에 바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딱히 막을 이유도 없었기에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 테마 본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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