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2
바닥이 아득하게 보였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벽에 돌출된 벽돌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짚고 이동했다.
젠장할. 콘스탄틴노플에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과 왕궁들 타고다니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 망할 벽타기는 후덜덜하기 그지 없다.
나는 지금, 어둠이 깔린 밤하늘을 배경으로 부다페스트 왕궁의 벽을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복장은 대충 짐작했겠지만, 남장. 하아··· 에이전트 카밀, 다시 등장이다.
쿠타이 이 새끼. 이 정도되면 이 자식은 나한테 이거 시키는 것을 삶의 낙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한다고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생각해봐. 제국의 공적이라 불리는 자의 입에서 나온 제국에 대한 냉정한 분석.
그거라면 아무리 모자란 아르파드 왕실에서도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지금 이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제국 연루설을 부인하고 신성동맹에 구원을 청하면 안된다고 설득할 사람이 없다고.”
내가 녀석의 머리를 쥐어 뜯는 중에, 율리아마저도 피식 웃으며 의외로 쉬운 방법이 있었다고 호평.
덕분에 나는 울화를 억누르고 다시 변장을 하고, 아슬아슬하기 그지 없는 부다페스트 왕궁의 성벽을 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난 대체 왜 이런 짓을 질리도록 계속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시작부터 그랬네. 그때 템즈에서 공녀님 몰래 윗분들 회의를 담타고 가서 듣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엄마랑 속편하게 템즈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을텐데. 정말이지 시작부터 이건 잘못된 일이었어!!!
맨손 등반의 공포 속에서 나는 절규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한걸음한걸음 성벽을 타고 내궁으로 들어갔다.
멀리, 성을 지키는 근위대들에게 들키면 끝장이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누르며 벽을 탔고, 잠시 후 성에서 돌출된 테라스에 도착했다.
어둠이 깔린 테라스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테라스와 연결된 방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온다.
살그머니 문틈으로 보니, 시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기억에 있는 마고 공주의 시녀들이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찾아온 것이 맞다. 이번 잠입의 목표는 일단 마고 공주다. 이슈트반 왕세자도 실종 상태인 상황에서, 국왕을 설득할 인물은 그녀 뿐이다.
나름, 예전에 율리아 때문에 벌어졋던 소동 덕에 카밀과 구면이기도 하고. 뭐, 좋은 기억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녀를 만나서 설득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잠입했는데 의외로 상황이 만만히 않았다.
그녀 정도의 신분이라면 당연히 수행하는 시녀들이 밀착하기 마련이겠지.
그럼,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할 상황을 만들기가 어렵다. 지금 마고 공주가 방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시녀들은 대기하고 있으니깐. 자, 이를 어쩐다?
일단 나는 최대한 그 시녀들이 적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취침시간에는 최소 인원만 남고 나가겠지.
그때까지 그녀의 방에 연결된 작은 방에서 숨어서 기다리다 기회를 노리자. 마침, 테라스 너머에 작은 창문도 보였다. 그래, 저기로 들어가면 되겠다.
나는 다시 한번 테라스 난감을 밟고 벽을 타고 그 작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다행히도, 창살은 없었다. 오! 들어가는 것에 무리는 없겠군. 그래서, 창틀을 잡고 몸을 넣으려는데, 순간 당황했다.
어라? 미끄럽다? 뭔가 습기에 젖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손이 미끈거리며 안으로 중심이 기울어졌다.
“어, 어라?” ‘풍덩!!!’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나는 창문에서 손이 미끌어져 안으로 굴러들어가며 물에 빠졌다. 물? 성안에 물이 있는 곳이라면··· 설마, 여긴 욕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는데 거의 동시에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꺄! 꺄아아아악!!!”
히익!!! 나는 당황하여 물에서 몸을 일으키고 손을 뻗어 비명을 지르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손목을 뒤로 꺾었다.
아이고,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소리를 지르면 안되는··· 응? 잠시만. 마고 공주의 방에 연결된 욕실의 욕조에 있는 사람이라면··· 설마?
“히이이이익!!!”
나는 순간 당황하여 손을 놓칠뻔 했다. 바로 그녀, 마고 공주가 내 품에 안긴 모습으로 입이 틀어막히고, 손이 뒤로 꺾여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고로 알몸. 와! 내가 남자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상황일지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나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하이고, 하필이면 왜 이 여자가 목욕하는 욕조에 굴러 떨어지는 거야? 뭔가 악의가 넘쳐나는 상황에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욕조에 몸이 반쯤 잠긴 상태로 앉아서 그녀를 뒤에서 허그하듯이 붙든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가 당황한 상태에도 곁눈질로 뒤를 돌아보더니, 내 정체를 확인하고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오랜만에 다시 뵙는 군요, 마이 프린세스. 지난번 보다 더 실례되는 상황에, 실례되는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
부디 부탁드리건데, 비명을 지르시지 마시고, 밖에 사람들을 물려 주시겠습니까? 약속해 주신다면 그대의 입술에 무례를 범하는 이 손을 내려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기분으로 손을 떼었다. 그러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은 그만 숙소로 돌아가라.”
“네? 공주님. 하오나···”
“됐으니깐, 그만 들어가거라. 혼자서 생각할 것이 있다.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그만 들어가라.”
“알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시옵소서.”
그리고, 방에서 아까 전에 테라스에서 봤던 시녀들이 그녀의 방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목도 놓아주었다. 그러자···
‘짜아아아악!!!’
사정없이 싸대기가 날아왔다. 에휴. 그래, 이건 맞아주자. 아무리 봐도 내가 잘못했으니.
나는 싸대기를 날리고 내 뺨에서 여전히 치켜든 그녀의 손을 다시 잡고 손등에 키스하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항상 무례를 범하는군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잘하셨습니다. 저 같은 무례한 지골로는 그렇게 다스리셔야 합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기 그지 없구나.
그래, 그때 얼굴을 비추더니, 한참을 수배해도 안나타나다가, 지금 이 상황에 모습을 드러낸 변명이나 한번 들어 보자꾸나.”
응? 한참을 수배했다고? 왜? 그렇게 나한테 앙심이 생겼나? 와··· 이러면 설득하는 거 무리수 아닌가?
나는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마이 프린세스, 마르가리타 아르파드. 당신을 뵙기 위해서는 좀더 준비를 갖추어야 하지 싶어, 함부로 발걸음을 못했습죠.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쉽게 찾아뵐 것을 그랬습니다. 부다페스트가 포위되었다는 사실에 부리나케 달려와도 너무 기다리게 해드린 모양이군요.
후흣. 저를 많이 기다리셨나요? 그렇다면 좀 더 일찍 찾아오지 못한 것을 사과드려야 할 것 같군요.”
“누, 누가 너 같은 놈을 기다렸다는 말이더냐? 시건방지게 시리.”
그녀는 발끈하며 얼굴을 붉히고 소리쳤다. 다행스럽게도 화를 내는 것에 비해서, 그렇게 반감을 사진 않은 것 같다.
그것을 본 나는 조금 안도하며 말했다.
“후후후. 기다리지 않으셨다니, 이 시건방진 놈이 조금 서운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일단은 사람을 물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오시죠.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욕조에서 나와서 그녀의 방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도 그런 나를 말없이 따라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나는 조금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저어, 공주님. 이 몹쓸 놈에게 호사스러운 광경을 보여주시는 건 감사드리지만, 그래도 정숙하고 순결한 레이디에게 맞게 옷은 좀 걸쳐주시죠.”
“네가 차림을 도울 사람들을 다 내보내지 않았느냐?”
아씨. 딥빡.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직접 옷도 안입는 수준이냐? 제국 황궁이었으면 황후 마마가 부지깽이부터 들고 엎드려 뻗쳐 시켰겠다.
하지만, 악의적이라기 보다는 도리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그녀를 보고 나는 더 따져 뭐하냐 싶었다.
그래서, 한숨을 쉬며 시녀들이 나가면서, 목욕 후 입힐 준비를 해둔 옷을 집어들고선 그녀에게 다가가서 내키지 않는 말을 했다.
“하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도와드리죠.”
“훗, 바람둥이 녀석. 여자들 옷을 벗기고 입히는 것에 아주 익숙한 모양이구나.”
“아, 네. 뭐 그런 편이죠.”
그녀는 살짝 째릿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이내 뭔가 마족한 듯한 표정으로 팔을 벌렸고,
나는 최대한 그녀의 나신을 안보려 노력하며 그녀의 착의를 도와주었다. 참나, 카밀라 공녀님 향세하고 나서는 해볼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냐.
나는 묘하게 착의를 돕는 나를 보며 흡족한 얼굴을 하는 그녀가 옷을 입게 얼른 도와준 다음에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뭔가 만족한 표정으로 그녀는 벽에 놓인 장식장에 와인을 꺼내며 잔에 따르면서 나를 보고 말했다.
“그래, 이 야심한 밤에 욕조까지 침입하여 나를 만나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더냐?”
“뭐, 별일은 아닙니다. 그저, 슬로슈의 봉기에 부다페스트가 포위되었다는 말에 당신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와보고 싶었고···”
“흐음? 그리고?”
“그리고, 앞으로의 상황이 마이 프린세스의 앞날을 어둡게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져 조언을 드리고자 왔습죠.”
“위기? 무슨 위기를 말하는 것이냐?
설마하니, 우리 왕실이 신성동맹 측에 반란 진압에 대한 도움을 청하려는 것을 위기라고 말하는 것이냐?”
“현명하시군요. 그 말 한마디로 제가 뭘 걱정하는지 단번에 파악하시다니.”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아르파드의 백합이라 불리던 나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슬로슈의 배후에 누군가 놈을 은밀히 후원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신성동맹에 대한 도움을 청하는 것이, 그 배후의 존재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동시에 제국을 자극하는 일이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호오. 역시 현명하시옵니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은 놈이 감히 여쭙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 상황에서 제국을 자극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그들을 자극하지 마시고 이용하시죠. 그 편이 의중을 모를 신성동맹에 구원을 청해서 굳이 제국을 자극하고, 슬로슈를 날뛰게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마치, 제국의 대변인처럼 얘기하는 군. 너는 제국의 판데모니움 행정부가 혈안이 되서 추격하는, 제국의 공적 아니었나?”
“후흣. 저는 그 누구의 적도 편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과 같은 아름다운 레이디들의 마음을 한조각 얻고자 하는 불한당일 뿐이죠.
그리고, 제국도 단수가 아니죠. 판데모니움 행정부는 저를 죽일듯이 추격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를 이용하거나 공조하려는 놈들도 존재하죠.
그래서, 지금 당신에게 드리는 정보는, 제국의 입장 따윈 모르겠고, 객관적으로 제가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도움이 되는 정보일 뿐입니다.”
나의 말에, 마고는 타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여전히 못마땅한 모습이 남은 듯 보였다.
그걸 보면서, 나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좀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흠칫했다. 그때 내가 말했다.
“수심을 드리우지 말아요. 마이 프린세스. 웃어요. 나에게 그대의 미소를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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