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2
헝가리 서남쪽은 광대한 푸스타 초원을 배경으로 전체적으로 완만한 평지가 다수다.
그래서 슬로슈의 거점인 북동쪽의 카르파티아 산맥 지대까지 가지 않으면, 높은 산을 보기는 어려운 편이다.
팩스의 지형도 그랬다. 완만한 평야가 펼쳐지고 간간히 언덕이 보이는 전형적인 헝가리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눈에 확연하게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지 위에 혹처럼 혼자 툭 튀어나온 언덕이었다.
언덕이라는 말처럼 전체적인 높이는 산처럼 높지는 않다. 하지만, 그 형태가 기괴했다.
완만함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말도 안되는 경사의 돌출된 암반이, 마치 언덕이라기 보다는 기둥처럼 보이는 괴상한 지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팩스 영주의 거성은 놀랍게도 그 기둥의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 높이보다도 훨씬 높아 보였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마치 절벽을 방불케 하는 경사 위에 지그재그로 정면에 놓인 작은 오솔길이 전부였다.
그 오솔길은 올라가는 길에 훤히 측면이 여러 차례 노출되서 성의 원거리 공격의 유효거리에 놓여 있었고,
길의 끝에 연결된 성벽은 대체 어떻게 저 위에 지었나 싶을 정도로 높고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규모는 아담했지만 그 모습을 보면, 마치 하늘 위에 세워진 신들의 거성 같은 느낌마저 주는 곳이었다.
아니, 대체 이게 뭐야? 공성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이건 절대로 공성이 불가능한, 문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근데, 그런 난공불락의 요새가 대체 왜 다른 곳도 아닌, 헝가리 중소도시 팩스 인근에 있는 거야?
그 도무지 답이 안나오는 성의 위용을 보고나니, 나는 그제서야 팩스의 유지들이 뭔가 의뭉스럽게 안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망할 아저씨들··· 지금, 자기네들은 도저히 답 안나오는 난제를 결국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나한테 토스한거다.
그걸 깨닭자 나는 그들에게 눈빛을 째릿하게 보냈고, 그 의미를 깨닭았다는 듯이 그들은 일제히 시선을 회피하며 먼산을 감상하였다.
야, 이 망할 자식들아. 어째, 곱게 항복할 때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사정이었냐?
나는 이 얌체 같은 팩스 유지들의 속사정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팩스시와 영주의 성의 위치가 절묘했던 것이다. 아마도 성의 위에서 보면, 팩스의 시가지가 전부 눈에 들어오고 감시가 가능할 위치였다.
그 말은, 기세좋게 영주를 도심지에서 몰아내기는 했지만, 잠시라도 경계에 한눈팔면 바로 보복당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성에 밀고 올라가서 영주의 잔당을 일소하기에는, 성이 너무나 난공불락의 위치였고.
결론적으로 언제 자신들에게 복수하러 올지 모를 영주를 자기 품 안에 안고선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걸 자기네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그걸 그대로 나한테 넘긴 것이었고. 이 망할 놈들이 정말.
마음 같아서는 저기 먼산보는 놈들, 성앞에서 두들겨 패고선 틀어박힌 영주한테 나오라고 협상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 이미 글러먹은 희망에 다시 한번 막연한 기대를 품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동일했다.
“도저히 무리에요. 그때도 고민할 필요도 없이 우회한 것이 차라리 시간절약을 한 거였어요.
성으로 접근하는 오솔길에서 병력의 30% 이상이 성의 원거리 투사 공격에 손실되고도 남을 겁니다.
그리고 설령, 그 병력을 상실하고 성벽과 성문에 다다랐다고 해도, 그 사이에 공간이 너무 좁아요.
그 말은 공성병기나 사다리를 세우고 성벽을 파괴하거나 넘어갈 공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하죠. 성벽 아래에 한줄로 서서 죽을 순서만 기다리게 될겁니다.
행여나 운이 좋아, 사다리를 세워도 성벽의 돌파는 어렵습니다. 성벽 상단에 돌출된 첨단이 아래를 향해 공격이 가능하고, 성벽에 진입을 방해하죠.
그리고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하려는 시도도 좁은 길에 아무런 엄폐물이 없는 상황에서 말도 안되는 사상자를 유발할 겁니다.
그래서 그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성벽을 넘거나 파괴했다고 치죠. 그래도 답이 없습니다. 삼중성벽이네요.
테오도시우스 성벽만큼 거대한 규모는 아니어도, 그 역할을 동일할 것이고 더 악랄해 보여요.
1차 성벽을 돌파한 공격 측은, 이내 2차 성벽으로 퇴각한 방어 측의 공격에 성벽 사이에 노출되어 사상자가 속출할 겁니다.
저건 정말 답 없는 곳입니다. 적의 병력이 5백 정도라고요? 만약에 정석적인 공격을 해서, 공세 측 사상자가 5천 정도 나온다면 전 놀랄 거 같아요.
저걸 공격하고도, 겨우 5천명 밖에 사상자가 안나왔다는 사실에 기겁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아오, 홧병!!! 꼭 그렇게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제대로 희망을 짖밟아 버려야 속이 시원했냐?
하지만,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어디가서 돈주고도 못 구할 제국의 군신이 정확하게 살펴본 공성에 대한 상황 분석이었으니깐.
결론적으로 저거 공격하다가는 망한다. 그걸 생각하니 그저 울화는 나만의 몫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봉변이야? 그냥, 쉽게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한 팩스 공략이, 생각치도 못한 난관에 부딪쳤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헝가리 시골에,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연상케 하고, 거기에 지형을 더해 완전무결한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었던 겨?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거의 울먹이는 수준으로 바실에게 물었다.
“그럼, 저거 도저히 공성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나요? 무슨 방법이 없나요?
세상에 수많은 난공불락의 성들이 존재했었지만,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의 손에 공략법이 나오기 마련이잖아요?
저것도 무슨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건가요?”
“뭐, 확실히 그 말씀이 틀리진 않죠.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의 손에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이겠죠.
하지만, 현재로서 저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결국 방법은 두가지 밖에 없겠네요.
우선 첫번째는 장기 포위를 통해 성의 물자를 고갈시키는 가장 정석적인 난공불락의 성에 대한 공략법이 있겠죠?”
그 말에 나는 실마리 같은 행운을 본 기분으로 유지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주둔병력 3천명 기준으로 10년을 버틸 식량과 물자를 저 성에 비축해 놨었습니다.
영주가 그거 채우겠다고, 팩스시에 막되먹은 과세를 이갈리도록 자주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죠.”
아오, 쓰바. 10년? 근데 그것도 3천명 기준이잖아? 근데 지금 저기 들어간 병력은 대략 5백. 그러면, 단순계산으로··· 60년은 버틸 수 있다는 거야?
야, 이 미친!!! 편집증 환자인 공포공이라면 60년 버틸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고!!!
솔노크에서 2주 돈좌된 것도 사람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는데, 어느 세월에 그 미친 짓을 60년이나 하고 앉아 있어!!!
내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자, 그것이 기각된 것을 인지한 바실이 말했다.
“그럼 두번째 방법 밖에 없겠네요.”
“두번째요? 그게 뭔가요?”
“간단합니다. 성벽에 대한 원거리 파괴입니다.
병력 진입이 도저히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성이라면, 그 성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성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수 밖에요.”
“아! 그렇죠. 발리스타나 캐타펄트 같은 투석기를 이용해서 원거리 타격을 가하자는 거죠?
그렇군요.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그게 좋겠네요. 큰 피해없이 틀어박힌 적의 성벽만 붕괴해도, 공성의 성공률은 높아지겠죠.
아니, 애초에 그럼 왜 그 방법부터 말씀하시지 않고?”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성의 방어력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원거리 투사를 하려면, 그 거리가 너무 멀어요.
아마도, 저 정도 위치보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공성병기에 대해 성에서 직접적인 요격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저, 저기라면··· 에엥? 잠시만요. 저렇게 멀리요? 그냥 우리 앞에 몇십걸음 앞이잖아요? 근데, 거기서 성까지의 거리는···
보병이 거의 30분은 달려야 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도달할 거리인데요? 발리스타나 캐터펄트가 이 정도의 사정 거리가 나오나요?”
“아뇨. 당연히 안나오죠. 그래서, 두번째 방법도 사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순간, 나는 저 녀석의 귀를 다시 잡아서, 솔노크에서 드라마나 처보고 있으라고 내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야, 이씨!!! 그걸 말이라고 하고 앉아 있냐? 결론적으로 저 성을 공격할 방법은 없다는 말이잖아!!! 아아아악!!! 바실아, 너까지 왜 이래?
나는 보는 눈만 없으면 제국의 공동황제님의 머리와 귀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가운데, 한 사람이 의문을 제기했다.
“뭐, 결론적으로는 답없다는 소리네. 그러면, 지금 중요한 것은 없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겠군.
저 답없는 난제가 어떻게 우리 눈앞에 생겼는지, 그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차라리 시간 절약을 하고 어쩌면 해법에 도달할지도 모를 것 같은데?
저거, 대체 어떤 놈이 만든 거야? 듣자하니 여기 영주는 머저리라며? 그럼 그 인간 작품은 아니지 싶은데? 범인이 누구야?”
불패의 군신에게 망설임없이 우회를 결정하게 만든 결코 뚫리지 않는 방패를 만든 놈이 대체 누구지?”
난, 갑자기 일생의 웬수라 생각한 녀석에게 애정마저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율리아, 여기서 제 정신 박힌 건 너 같은 미친 년 밖에 없구나. 그런데, 의외로 율리아의 말이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질문에 팩스의 유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잠시 후 대표자가 입을 열었다.
“좋은 지적이십니다. 확실히 영주는 저런 걸 만들 위인은 아니죠.
저건, 과거 팩스 공방에 가장 뛰어났던 건축기사였고, 지금은 영주의 아래에서 성의 수비대장을 맡고 있는 올렉의 작품입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영주는 확실히 팩스 시민들도 무시하는 모지리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장점 중에 하나는 최소한 자신이 모지리라는 것은 아는 모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외로 군사와 통치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전문가를 선발하고 그에게 전권을 일임하는 식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 영주에게 선발되어 신임을 얻고, 그에게 이런 난공불락의 성을 쌓으라 진언한 것이 바로, 과거 팩스 공방의 최고 실력의 건축기사였던 올렉이라는 자였다.
결국, 저 눈앞에 우리 모두를 좌절케 한 난공불락의 성을 구축한 것은 바로 그 올렉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가 결코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이름을 말하면서 흠칫하거나 함부로 언급해도 되나 하는 고민을 하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병이 많은 우리 부대에서도···
“팩스의 올렉이 쌓은 성이라고요? 흐미. 그건 절대 못뚫어요. 어지간한 대장장이들이나 건축가들이라면 다들 수긍할 겁니다.
그 사람은 우리 같은 제방이나 토담 같은 것을 쌓는 어설픈 실력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다들 경외어린 눈빛으로 안개 위에 성을 바라보았다. 마치, 거장의 예술품을 보기라도 하는 듯.
그런 그들의 모습과, 밝혀진 범인의 정체에 나는 개운하기는 커녕 되려 속이 뒤집어 지는 기분을 느꼈다.
결국, 그냥 난공불락도 아니고, 당대 최고의 건축가가 작심하고 만든 어설픈 공격에는 이빨도 안들어갈 난공불락이라는 말이잖아?
이건 정말로 답없다. 그래서 나는 밝혀진 범인의 정체에 묘한 뿌듯함과 난처함을 보이는 팩스 유지들을 보며 말했다.
“철수합니다.”
“네? 자, 잠시만요. 철수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걸 두고 이대로 가시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헝가리군이 철수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영주가 기회를 노려 팩스를 다시 자기 손에 넣으려고 할 것이 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려고 해도, 저건 도저히 말이 안되잖아요? 저걸 어떻게 뚫으라고요?
저거 공격하다가, 우리 헝가리군 전병력이 저 앞에서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난공불락이라고요? 댁들도 그랬잖아요?
우리 병사들도 아는 팩스 최고의 건축가가 세운 걸작이라고? 이건 감당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삐지겠어요.”
그렇게 말하자, 그들 사이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한참 웅성거리던 그들은 잠시 후 안내키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저어··· 확실히 올렉이 그 정도로 대단한 건축가인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희도 답이 없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우리 대신에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어떻습니까?”
나는 순간 솔깃해졌다.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 제자나 스승이 아니다.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동류가 아닌 상이한 존재, 그렇다면 설마···
“그에게, 경쟁자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톨먼, 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팩스에서 유일하게 올렉과 상대가 가능한, 공식적인 라이벌.
바로, 톨먼 그 사람이 아직 팩스에 머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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