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
한참을 서로 부둥켜 안고 흐느끼던 두 남매는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바실은 다시 찾은 자신의 누이를 부축해서 일으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랑 같이 콘스탄틴노플로 가시죠. 제가 누님을 보호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저를 따라와 주세요. 설령 황제 폐하나 모후의 의견이 저와 다를지라도, 이번만은 저도 순순히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누님을 지키고,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바실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바실···. 바실이라고 불러도 되지? 불쾌하다면 용서하길 바라고, 부를 호칭을 정해줘.”
“불쾌하다니요. 그럴리가요. 바실이면 됩니다. 바실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율리아 누님.”
“그래, 고마워. 바실. 그리고 미안해. 나는 너를 따라갈 수 없어.”
그녀의 말에 바실은 물론 나도 당황했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가 왠지 모르게 처연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우스타샤의 노예야. 정확하게는 두목의 소유물이지. 그리고 이곳 라구사에서 우스타샤의 눈과 귀가 없는 곳은 없어. 렉터궁의 중심지에도, 시가지의 광장에도, 좁은 골목과 어두운 지하실에도··· 그 어디에도 우스타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지. 내가 우스타샤를 떠나서 도망치려고 한다면, 순식간에 라구사 전역에 나를 찾는 감시망이 펼쳐질 거야. 그래서, 라구사 성벽을 벗어나기도 전에 다시 붙잡히게 될 것이 뻔해. 그건 나는 물론 너까지도 위험하게 만들거야.
지금도 결코 안전한 상황이 아니야. 내가 왜 이곳을 약속 장소로 골랐다고 생각해? 그나마 노출된 장소인 민체타 탑이 역으로 우스타샤의 패거리와 내통하는 사람들이 숨어 듣기에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지금 내 외출도 마냥 시간을 끌 수 없어. 서둘러 가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틀림없이 두목이 사람을 풀어서 나를 추적할 거야. 그러니, 어서 돌아가야 해. 네 마음은 잘 알겠지만, 나는 지금 그 무엇 하나도 내 자유 의지로 할 수 없는 신세야.”
“그···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그렇다면, 라구사와 우스타샤를 가만히 놔둬서는 안되겠군요. 지금 당장 군을 동원해서···”
“그래선 더 안돼. 틀림없이 나를 인질로 잡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나를 살해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할거야. 여기는 네가 알고 있는 양지의 세상이 아니야. 음지에서는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돼.”
그녀의 말에 바실과 나는 난감한 기분에 빠졌다. 목적을 달성했는데 이게 무슨 마무리가 안되는 상황? 그래서 나는 뭔가 대안을 여러가지 떠올리며 그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화물에 안에 숨어서 간다거나, 아니면 변장을 하고 움직이시면 어떨까요? 저처럼 아예 성별을 바꿔서 남장을 하신다던가.”
그런데 그녀가 묘한 반응을 보였다. 뭔가 살짝 날선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 어설픈 남장, 확실히 너보다는 잘할 자신이 있지만 들키지 않을 것은 보장하기 힘들군. 바실의 측근인가? 지금 나는 바실과 이야기하고 있으니 함부로 끼어들지마. 어설픈 한량 흉내나 내는 광대랑 할 이야기 없어.”
뭐··· 뭐야? 이 적대적인 반응은? 나는 갑자기 나에게 공격적으로 나오는 황녀의 반응에 할말을 잃었다. 아니, 이 여자가 왜 이 난리야? 따지고 보면 당신 찾는 여정에서 내가 기여한 것도 한두가지가 아닌데. 그렇게 내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사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가 바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역시도 도망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야. 나도 이곳에서 탈출해서 자유롭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단순한 경로로 탈출해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어. 하지만, 나한테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단 한가지 경로가 있어.”
“그게 어딥니까?”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대 로마 시절의 하수도야. 디오클레티우스 황제가 노후에 이곳에 은거하면서 인프라를 구축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오래된 하수도의 일부 구간은 사용되지 않고 버려졌어. 하지만, 지하로 연결된 통로는 군데군데 파손되었고 복잡한 상황이지만 아직 잔존하고 있고, 그건 라구사 성벽 지하를 지나 외부로 연결되어 있어. 그곳으로 가면, 우스타샤의 눈을 피해서 라구사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해. 그쪽으로 도망치는 것이 어떨까?”
“좋은 생각입니다. 누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그럼, 지금은 일단 가게로 돌아갈게. 외출이 길어지면 틀림없이 의심할거야. 내일 저녁까지 도망칠 준비를 마친 다음에, 잠시 외출한다고 말하고 네가 있는 곳으로 합류할게. 너도 도망칠 준비를 마치고 기다려줘.”
“알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겠습니다. 누님이야 말로 의심을 사지 않고 조심해서 오십시오.”
“그래. 그럴게. 고마워 바실.”
그리고 그녀는 바실과 상봉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뭔가, 묘하게 나를 째려보는 것 같은 눈빛을 한번 날려주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아니, 대체 왜 저래?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자 바실도 나를 보면서 말했다.
“저희도 돌아가도록 하죠. 이곳 라구사에서 탈출할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말없이 바실을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바실은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쿠타이와 안드로니쿠스에게 우리가 겪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우리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사실에 환호하고 안도하였다. 그 말을 전하는 바실의 표정이 너무 환해서, 누가 봐도 바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걸 보면서 나는 조금 마음이 씁쓸했다. 다행스럽게도 후계 구도에 영향을 줄 남자 후계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는 황실의 혈육인데 그게 그렇게 좋을까?
그리고 묘하게 나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모습과 왠지 모르게 드는 이질감과 위화감 같은 기분에 나는 썩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잠자코 라구사를 탈출할 준비를 하고, 여정을 함께했던 짐을 꾸렸다. 그러다 우연히 이번 여정의 목적을 달성하게 해준 결정적인 증거, 거래 명세서가 눈에 들어왔다. 양피지로 만들어진 거래 명세서. 이제 본인을 찾았으니 의미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중요 증거 자료이니 잘 챙겨가는 것이 좋겠지?
그래서, 나는 그녀가 보낸 라벨이 붙은 와인병까지 포함해서 이번 여정에서 찾아낸 그녀와 관련된 자료들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탈출 준비가 끝나고 우리는 밤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자, 약속한 장소에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베일을 두르고, 황급하게 소지품을 챙긴 것 같은 긴 가방 하나를 들고 왔다. 그녀가 무사히 도착한 것을 본 바실은 안도하면서 우리 일행을 그녀에게 소개했다.
“무사히 빠져나오셔서 다행입니다, 누님. 여기 저희 측 일행을 소개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안드로니쿠스 근위대장님. 그리고 이 아이는 황궁에서 데리고 있는 카자크의 대표인 쿠타이입니다. 공녀님은 이미 보셨죠? 헝가리에서 오신 카밀라 공녀님이십니다.”
“아아··· 다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쥴리아··· 아니, 율리아입니다. 근데, 바실. 동행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아, 네. 극비로 진행해야 하는 수색이어서, 제가 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만 움직였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소수로 움직인 덕분에 지금까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누님을 찾을 수 있었던 거죠. 안심하십시오. 이곳 라구사만 빠져나가서 역참의 파발만 탈 수 있으면 제가 통제 가능한 영역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반드시 누님을 라구사에서 안전하게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음··· 그래 알았어. 하지만 이곳 라구사를 빠져나갈 때 까지는 나를 잘 따라오렴. 버려진 곳이고, 복잡한 곳이지만 그곳을 아는 것이 나뿐만인 것은 아니야. 추적이 붙으면 위험하니, 서둘러 움직이도록 하자. 자, 이쪽으로.”
그렇게 말한 그녀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우리를 라구사의 외진 곳으로 인도했다. 시가지의 구석에 위치한 하수도의 입구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긴장된 마음으로 그곳에 발을 들인 우리는 그곳의 광경을 보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는··· 하수도라기 보다는 거의 지하도시인데요?”
바실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었다. 나 역시도 내 눈에 들어온 광경에 상당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지하의 공간은 상당히 넓었다. 바실의 말처럼 하수도라기 보다는 거의 지하 도시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풍경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악취가 나고 햇빛이 들지 않는 공간임에는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그들은 마치 그곳이 도시의 한복판인듯 돌아다니거나 영업을 하거나, 혹은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있었다.
상업도시로 번영하여 그 풍경이 수려한 라구사의 지상과 대비되는 시궁창이었지만 그곳에서는 그곳 나름의 사회가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대 로마 제국 시절에 지어진 것을 기반으로 여러 차례 임의 개축이나 보수가 이뤄져서 더 확장된 곳으로 보이는 그 공간에는 지상의 라구사와 대비되는 또 다른 라구사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예상치 못한 풍경에 당황하는 우리들에게 율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이곳은··· 제가 예전에 라구사에 끌려와 우스타샤의 손에 넘겨졌을 때,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던 곳이에요. 그때만 해도 우스타샤는 그리 큰 조직이 아니어서, 불법적인 일들은 전부 여기서 이뤄졌죠. 이곳은 라구사지만, 라구사의 룰에서 벗어난 치외법권 같은 지역이니깐요. 그래서, 제가 이곳의 지리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 있었던 거에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눈쌀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처럼 여기저기서, 지상으로 올라갈 수준이 안되는 작부들이 화대를 흥정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불결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야말로 시궁창이라고 밖에 표현하기 힘든 곳에서 고귀한 제국의 황녀였던 그녀가 느꼈을 충격이 어느 정도였을지··· 그래서, 무거운 침묵이 오가는 가운데 율리아는 우리를 인도하며 그 지하수로의 깊숙한 미로와도 같이 얽힌 통로로 안내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하수도 입구에 있던 지하도시 같은 곳도 사라지고 이제는 수로와 통로만이 이어진 미로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출구가 어딘지 모를 복잡한 통로를 율리아의 인도를 통해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던 지하 저 너머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저쪽이다. 저쪽으로 도망쳤어. 쫓아가!!!”
그러자, 율리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벌써 우스타샤의 추격이 따라붙다니. 서둘러야 해요. 그리고, 샛길로 우회해야 해요. 넓은 길로 가면 금방 들킬거에요. 이쪽으로!!!”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따라 통로의 측면에 난 작은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서 우리를 뒤쫓는 소리가 여기저기 울려퍼졌다.
“저쪽이다. 저쪽으로 달려가. 카탈루냐 놈들에게 뒤쳐지면 안돼!”
“여긴 없어. 반대쪽으로 달려가봐. 놓치지마. 반드시 잡아야 해. 베니스 녀석들 보다 먼저 잡아야 해.”
어둡고 복잡한 통로 여기저기서 우리를 뒤쫓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대체 몇 명이 우리를 추격하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함성소리와 물소리와 발소리가 시끄럽게 지하도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것을 들으며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뭐지? 저 말투를 보면··· 우리를 추격하는 것은 우스타샤만이 아닌 모양인데? 뭔가 카탈루냐 전우회와 베니스 저항군 라구사 지부로 짐작되는 함성 소리에 나는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뭐지? 이거 단순히 창관에 고급 창부가 도망친 정도의 일이 아닌 건가? 그녀가 두목의 애첩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추격이 우스타샤 뿐만이 아닌 다른 자들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그래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율리아를 호위하며 그녀가 안내하는 샛길을 따라서 추격을 피해 도망쳤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안내가 제대로였는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추적자들의 추격에 따라 잡히지 않고 우리는 도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를 찾는 함성이 멀어지자 우리는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지하도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그래서, 뭔가 지하도를 통해서 라구사를 빠져나간다는 계획이 상당히 틀어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를 안내하던 율리아의 체력이 바닥난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휘청거렸고, 그런 그녀를 바실이 부축하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 조금만 부축해주면 걸을 수 있어.”
괜찮다고는 말하지만, 그녀는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그래서 바실은 직접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형이 후위를 맡아줘.”
안드로니쿠스는 바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갔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다가 약간 수로의 교차로로 보이는 공간이 넓은 곳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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