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1
“전쟁은 구르기 시작한 수레바퀴와 같다.”
나는 예전에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에 대해, 요하네스 의원은 감탄하며 호평했다.
“과연, 호전적인 니케포루스 황제다운 말이군. 저 짧은 문장에 전쟁의 진리를 모두 담고 있어.
바퀴가 굴러가며 만드는 대지의 상처는 전쟁의 고통이요, 그 축으로 연결되어 같이 굴러가야 하는 다른 바퀴들은 전쟁의 역학을 의미하지.
그리고 의지와 무관하게 바퀴를 따라 전진해야 하는 마차는 전쟁의 운명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어느 한쪽에서 시작한 전쟁은 그 누구도 회피할 수 없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래서 세상 모든 이가 무관하지 않게 되지.
그리고 고통을 감내하고 정해진 방향으로 전진하여야 하고, 누군가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은 멈출 수 없지.
지독하리 만큼 전쟁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입증하며, 자신의 의지를 담은 정치적 수사야. 전쟁에 대한 저서를 쓴다면 서문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서문으로 남기지마. 그거 황제가 술 처먹고 늦게 들어와서 황후마마에게 쫓겨나고선, 황궁 밖 마차에서 노숙하면서 중얼거린 개소리야.
하지만, 결국 그 문장은 어느 저서에 인용되었고, 모르는 사람들은 그걸 보고 황제의 전쟁에 대한 광기에 섬뜩함을 느꼈다나 뭐라나. 어흑, 뒷목.
그 진위야 어찌되었건, 지금 내가 그런 제국에 머물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아마도 지금 내가 임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수레바퀴로 묘사되었던 비장한 전쟁의 현장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긴장풀지 말고, 이 악물고 버틸 준비해라. 곧 놈들이 들이닥친다.”
“오오오!!! 전원 전투 태세! 전투 태세!!!”
빗속에서 헝가리군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위치를 확보하고, 오와 열을 이루었다.
그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빗속에서 그들의 어께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것이 보일 정도로. 무리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훈련장이 아닌, 현장에 투입된 것은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니깐.
신병들 특유의 불안함과 열정, 그리고 초조함이 진형에 감돌았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서 상대해야 할 적의 움직임을 보던 마티도 오늘만은 오합지졸들의 두목이 아닌, 제대로 된 지휘관처럼 보였다.
멀리 적의 움직임을 보던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오고 있다. 적들이 오고 있다. 전원 충격에 대비하고, 돌입할 준비를 하라.”
“충격 대비! 돌입 준비!”
“내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난입해서는 안된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잠시 후 눈앞에서 적들이 무도한 기세로 쇄도해 들어왔다.
“기다려.”
이미 지척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티는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말했다.
“기다려.”
당장이라도 아군의 진형을 집어삼킬 듯이 적들이 달려들었다. 이제 늦은 거 아닌가? 그런데 그때였다.
‘콰과과과광!!!’
적의 측면을 강타하는 의문의 공격이 있었다. 그 공격에 적의 일부는 방향을 틀어, 습격한 쪽에 맞붙었고,
아군으로 향하던 적의 기세는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마티의 손이 내려졌다.
“지금이다! 돌입!!!”
“와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적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손에 쥔 적을 제압할 무시무시하고 둔탁한 흉기로 노도하는 적의 예봉을 가로막았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그 기세를 막아내는 그들의 무기는 바로··· 모래주머니?
“만세!!! 물살의 기세가 약해진다. 효과가 있다. 어서 날라!!! 후방에 잔뜩 만들어둔 모래주머니를 어서 날라.”
“오오오오!!! 다들 힘내자고!!!”
뒷목이 가볍게 뻐근. 와! 이제는 이 정도 상황은 가벼운 편두통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어.
뭔가, 편두통에게 승리하고, 세상에게 진 것 같은 기분. 나는 통증은 가볍지만, 그래도 골때린다는 것은 변함없는 눈앞에 상황에 절규하고 싶었다.
기본 편성과 기초 훈련을 겨우 마친 헝가리군의 첫 출진은 바로, 홍수 사태에 대한 대민 지원이었던 것이다.
사연은 간단했다. 갑작스러운 호우로 인해 도나우강과 그 지류들이 갑작스러운 홍수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히, 범람은 한해 농사를 망치는 심각한 재앙이었고, 그것에 대해서 영주들과 지주들은 국가 단위의 대책 마련을 왕실에 요구했다.
나름, 상황의 심각성은 인정하지만, 괜히 재정과 인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던 왕실은 그 요구를 외면하려 하였는데···
마침, 그 상황에 생각치도 못하게 써먹을 만한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헝가리군이었다.
왕실은 별로 고민할 이유도 없다는 듯이, 세게드 사령부에 통보를 보내어, 헝가리 각지에 벌어지고 있는 홍수 사태에 대한 군의 대민 지원을 명령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우리는 장비와 인력을 데리고 수해 지역들을 돌아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은 두개의 제방을 트고, 연결지점을 모래주머니로 막아서, 범람한 강줄기를 도나우강으로 돌리는 제법 수준 높은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뭐, 무리도 아니지. 사실, 여기 모인 인간들 죄다 병사라기 보다는 노무자에 작업자들에 가까웠으니.
그래서, 그들은 그 고무적인 결과에 환호성을 질렀지만, 나는 그걸 보며 두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니들 군인이라고. 건설노동자나 대민공무원이 아니라!!!
왜, 군인이 자기 본질인 싸움에는 답이 없으면서, 이런 일에만 재능을 보이는 건데?
나는 통탄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비를 맞으며 저 멀리 언덕 위에 시찰단으로 온 왕실의 일행들이 머무르는 막사를 올려다 보았다.
제법 화려하게 꾸며진 막사들을 신규 편성된 아르파드 근위대가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살짝 원망이 드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번 대민 지원에 대해서, 안하겠다는 건 아닌데, 어차피 군을 동원할 정도라면 근위대도 일부라도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안 그래도, 최근에 병력이 증강되어 기존 수도를 지키는 1군에 더해, 신규 병력으로 구성된 2군을 편성한 근위대였다.
그러니, 병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요구는 간단하게 거절되었다.
“캬아아악!!! 왕실과 수도를 지켜야 하는 근위대에게 그런 진흙탕을 뒹구는 일을 시킨다고?
말이 되느냐고 생각하느냐? 그들은 군인이다.”
그럼, 우리는? 더는 말을 뭐해. 그리고 딱히 나 외에는, 우리 군에서도 오든 말든 크게 서운할 것도 없다는 입장이고.
“에이, 그 도련님들이랑 높으신 분들이 이런 거 어떻게 해요? 그냥 거기 계시라고 하세요.
이런 일은 익숙한 우리들만 하는 것이 맞아요. 괜히 오셨다가 사고라도 나시면, 그걸 누가 감당하려고 그분들을 불러요?
그냥 저희들끼리 해볼게요. 이봐! 다들 잘할 수 있지? 이런 토목 공사는 자신 있다고요.”
거듭 얘기하지만, 니들 군인이야. 건설 노동자가 아니고!!!
빗속에서 진흙탕을 뒹굴고선, 사람들이랑 가축 구하면서 짜릿하다는 성취감 담긴 미소짓지 말라고!!!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 속에 외침은 전해지지 못했다.
되려, 그들은 머리를 쥐어 싸맨 내 눈치를 보며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와서 말했다.
“저어··· 공녀님도 여기서 비맞고 계시지 마시고, 저 위에 막사에서 쉬시지요? 현장은 아직 위험합니다.
이런 일은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근위대와 같이 계심이···”
“됐어요.”
“하지만···”
“아! 됐다고요!!! 난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편하니 냅두라고요!!! 왜요? 노는 꼴 보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래요?
같이 일이라도 거들어 드려요? 저 모래자루 날라드리면 좀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하! 그럼 그러시죠.”
“아, 아니, 저희들은 그런 말이 아니고. 히익!!! 공녀님, 그거 내려놓으심이···”
마티와 고참병들이 기겁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속에 끓어오르는 울화를 모래자루에 풀듯이 거칠게 내동댕이 쳤다.
지금 내가 저기 못올라가고, 여기서 니들이랑 구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니들 탓이라고!!!
하지만, 역시나 그런 나의 울분은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병사들이 나를 보며 식겁하며 말했다.
“오오··· 템즈의 꽃께서 지금 병사들과 같이 진흙탕을 구르며 구호를 독려하고 계셔.
이 무슨 고결하신 자세이신가? 이 자식들아! 다들 아무도 게으름피우지 말고 열심히 일해! 공녀님깨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역시, 저분은 다른 아르파드의 영애들과 뭔가 달라.”
아르파드의 영애가 아니니깐 다르지!!! 열불나서 화풀이하는 것에 일일히 감동받지마!
하지만, 나를 열받게 하는 것은 농노 병사들의 감탄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합류한 진상도 그걸 거들었다.
“키야! 니키 그 뺀질이 새끼가 똘마니 하나는 제대로 키웠네. 너 좀 친다.
그냥 내숭떨고 질질 짜기나 하는 영애님이 아닐세. 주여, 저 좀만한 개념있는 년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야, 어차피 몸 쓰는 김에 불이나 좀 붙여봐라. 비가 와서 부싯돌이 도무지 쓸모가 없네.”
이 노망한 성녀 할망구야! 불 필요하면 아주 땔감을 모아서 성녀에 걸맞게 불놀이 한번 해드려?
되게 화형 마려웠지만 빌어먹을 판크라치온 그라운드 기술이 무서워서 참았다. 에스텔 말에 의하면 아직도 다섯번에 한번은 사부한테 진다나? 씨발, 현역이야?
대충 세게드 교구 교회들이 겁에 질려 할 일하니, 이제 그만 안돌아가냐고!!!
아무튼, 또 나만 속에 열불이 나고, 왠지 모르게 감동에 빠진 머저리들은 훈훈하기 그지 없는 속 뒤집히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아오, 이 환장할 것 같은 상황이 나중에는 또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로 역사에 기록될지 참 암담하다.
‘그해 여름, 도나우의 하천이 일제히 범람하여 마자르의 백성과 방백이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니,
세게드의 공녀가 마자르의 자제 수천을 데리고 응하더라. 이에 모래의 성으로 된 제방이 들어서고, 홍수의 기세가 가라앉았더라.
이를 기뻐하며 병사들이 공녀에게 이르니, ‘보소서. 물살이 가라앉고 있나이다. 안심하소서!’ 라고 하니
공녀는 도리어 그들을 꾸짖으며 가로되, ‘보라. 저편에 구해야 할 이가 수천이요, 고립된 이사 수만이라. 어찌 작은 성취에 기뻐하느냐?
너희 보루가 없는 곳에 물이 차니, 이는 나의 부덕이로다. 그러니, 내 몸 편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나태한 너희들 대신 내가 제방을 쌓겠노라.’ 라고 하더라.
이에 놀란 방백과 병사들이 만류하나, 공녀가 노하여 몸소 물살을 가르고 제방을 쌓으니, 이에 다들 부끄러워하며 힘써 노역하더라.
그리하여 범람이 가라앉고, 온 백성들이 감사하며 이르되, ‘보라, 홍수가 끝나고 마치 새 하늘과 새 땅과 생긴 것과 같더라.’ 하나,
공녀가 이를 마뜩치 않아 하여, 감히 나서서 진실로 고하고 감사함을 드러내는 자는 없었다 하더라.’
아무튼, 내 의지와 무관하게 분노에 가득 차서 진흙탕을 뒹굴며 애꿎은 모래포대에 화풀이하던 작업은 끝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논의할 일이 있다는 부름에 입궁해야 했다.
하지만, 오면서도 여전히 짜증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젠장할. 이번에는 또 뭘 가지고 트집을 잡아서 사람을 괴롭히려고 그래?
귀족가 도련님들 대신에 수해 복구 다했고,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군대라기 보다는 무슨 건설 인부들처럼 구르고 다녔잖아.
군대가 해야 할 본문인 전투와 체계는 간 곳이 없고, 왠지 용역이나 노동에만 재능을 보이는 머저리들에게 안 그래도 속뒤집히니깐 더 괴롭히지 말라고요.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저, 여기 가면 건물 엄청 빨리 지어준다고 해서 왔는데, 맞죠? 지금 우리 마을에 성당 건축할 건이 있는데 의뢰를···”
“당장 꺼져!!! 여기 건설회사 아니야!!!”
이런 분위기에 내가 다 홧병이 날 지경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왕궁에 들어왔고, 헬레나 시녀장님이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인내하자. 어차피 까이고 좋은 소리 못들을 거, 정신 건강 챙기자. 그런데···
“너네 생각보다는 쓸만하더라.”
“네, 그렇게 말씀하실 줄··· 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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