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1
“아, 보이네요. 저 산중턱에 건물과 농장들이 바로 거기인 모양입니다.”
바실의 말에 우리 일행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스럽게도 일반적인 수도원들과는 달리 산 정상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진 않았다.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나는 오는 여정에 나름 조사한 아가사 성녀에 대해서 상기했다.
성녀라고는 하지만, 왠지 생소한 이름인데다 과거 황제와 같은 여정을 동행한 동료라고 해서, 상당히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와 율리아가 나름 본국의 군부와 정보부를 통해서 아가사 성녀에 대한 관련 자료를 요구했었다.
그리고 여정 중간에 전달받은 자료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진짜 성녀라고?
유명하지 않은 것은, 내전기 이후의 세대들과 귀족들 한정인 모양이었다. 민중들에서는 혼란의 시대에 세상을 구원한 성녀로 추앙받고 있었던 것이다.
안나 황녀가 과장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황권마저 바닥에 떨어진 혼란기에 유일하게 제국을 누비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고, 기적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가 행한 기적을 목격한 증언도 다수 확인되었다.
상당수가 이교도와 광신자들과 죄인들의 회개와 개종에 관련된 기적이었고, 그 회개자들의 증언마저 남아있었다. 자신들은 기적을 경험했다고.
이 정도로 추앙을 받으니, 성녀의 실체에 대해서는 의심을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의 인물이 왜 이렇게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져야 했다. 그런데 그것도 금방 납득하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혼란기 이후 그녀가 은거한 탓이 크지만, 그보다는 의외로 지배자들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던 탓이 컸다.
백성들의 편에 서서, 무도한 행동을 저지르는 귀족과 황족들을 꾸짖었던 기록도 자주 언급되는 성녀가 그들에게 달가울리가 없겠지.
그래서, 펜을 쥔 식자들과 기록자들은 애써 그녀의 기적을 무시하거나 덮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혼란이 없어진 시대에는 백성들 마저도 신앙의 기적보다는 임대 수입의 증가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거기에 모든 지역이 다 그녀를 환영하지도 않은 듯 보였다. 특히, 정교회 영역 밖의 카톨릭 교구의 사제들에게 그녀는 불편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입증하는, 그녀가 지내는 거처 아랫 마을 주민들의 반응을 목격하였다.
“뭐? 성녀를 찾으러 왔다고? 성녀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성녀. 콱 뒈져버렸으면 좋겠구만.”
순간,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같은 기독교라 이 정도는 아니지 싶었는데, 헝가리 내에서 정교회에 대한 반감이 이렇게 심할 줄이야.
우리는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트란실바니아 주민들의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적대적인 곳에서 거하는 성녀에 대한 걱정, 한편으로는 그런 기적의 실체를 직접 목도한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산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곳은 수도회의 장원을 본따 산 중턱의 고원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세속과 떨어진 신앙의 장소임을 의미하듯이, 민가와 떨어진 곳에 위치하면서도 담벼락으로 둘러쌓인 고립된 지역. 그 입구에서 우리는 문을 두들겼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성녀가 있었다. 누가 봐도,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벽화에 그려진 천사나 성녀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고운 금발 머리에 하얀 피부, 그리고 성경에 묘사되는 자애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검은 수녀복으로 가리고 나타난 그녀.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성스러움이 느껴지고, 그 누구라도 성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그녀의 모습에 우리는 모두 경건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가사 성녀님이십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의 말에 그녀는 조금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요.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아가사 성녀님 곁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는 에스텔이라고 합니다.
이미 안나 황녀님의 소개장은 받았습니다. 아가사 공동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국의 여러분들. 여기서부터는 제가 여러분을 안내하겠습니다.”
그녀의 설명에 우리 일행은 살짝 술렁임이 있었다. 성녀가 아니란 사실에 조금 놀람과 그분의 연세를 생각하면 당연한 거라는 생각이 오간 모양이다.
그리고, 상상 속에 성녀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진짜 성녀의 모습에 묘한 기대감을 가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이구. 사내 녀석들이란. 하지만 뭐라고 하고 싶진 않았다. 나 마저도, 견습 수녀라고 밝힌 에스텔이라면 성녀로 생각하고 고해를 할 것 같은 기분이니깐.
아무튼, 그녀의 안내로 우리는 공동체 마을의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 안은 고요했다. 그리고 작은 텃밭과 작업장, 주택들 사이로 인기척이 안느껴졌다.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멀리 보이는 사람들이나, 우리를 보고 슬쩍 피하는 사람들이 보이긴 했다.
하지만, 다들 얼굴까지 가린 복장으로 우리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노출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과연, 수도회가 주관하는 여성 공동체의 모범적인 모습이다. 정결과 금욕을 추구하며, 남자들을 피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청빈한 삶의 공간이었다.
나는 보고 있으면 내 마음마저 평화로워 지는 것 같은 그 분위기를 느끼며 마을 중앙의 허름한 회관 옆에 공소로 향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기도중이시네요.”
에스텔이 우리를 잠시 멈춰 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창문을 통해서 공소 안의 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거기 성녀가 기도하고 있었다. 살짝 쓴웃음이 났다.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생각하는 성녀의 선입견을 너무 그대로 생각한 탓일까?
그분의 모습은 내 상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조금 통통하시고, 주름진 손과 얼굴에 연세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자애로워 보이는 할머니가 바로 성녀였다.
하긴, 상식적으로 그 당시에 활약하신 분이라면 저 정도의 노인이셔야 정상이지.
그리고, 오히려 선입견으로 가진 성녀보다, 저렇게 시골 할머니 같은 분이 성녀라고 하니, 되려 믿음이 갔다.
잠시 후, 기도를 마치고 성호를 그은 그녀가 일어섰고, 그녀에게 에스텔이 다가가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가 밝은 얼굴로 우리를 보고 맞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녀가 우리에게 건낸 첫번째 말은 조금 의외의 질문이었다.
“주께서 이르시길,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면 네 왼뺨도 내어주거라, 라고 이르셨습니다.
아가사 공동체를 방문하신 주의 어린 양들이시여. 그대들에게 묻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라 생각하십니까?”
“······!!!”
잠시 할말을 잃었다. 응? 갑자기 왜 신학적인 질문을? 요하네스 의원이 없는 것이 아쉽네.
우리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기에, 나는 멋쩍은 얼굴로 그나마 무난한 대답을 골라 대답해야 했다.
“악한 자들의 무도한 행동을 똑같이 갚아주지 말고, 용서하고 보듬으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좋은 대답이지만, 정답은 아니군요. 조금 더 믿음에 정진을 하시고 깨우침을 얻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제대로 소개하죠. 주님의 종으로 이 공동체의 어린 양들을 이끌고 있는 아가사라고 합니다. 제국에서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한분씩 인사드리도록 하죠. 먼저, 제국의 공동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 저를 바로 알아보시네요? 제가 아바마마와 많이 닮았나요?”
“아뇨. 폐하께서는 니키와는 별로 닮지 않으셨어요. 폐하는 유도를 많이 닯으셨군요.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위대한 중흥의 군신에게 주님의 축복을···”
우리 모두가 살짝 긴장했다. 이 세상에 저렇게 자연스럽게 니케포루스 황제와 유도키아 황후를 알면서도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 사람 진짜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으로 율리아를 보며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오오··· 고귀하신 우리 아기님을 다시 뵙는 군요. 아픔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다, 지난 알입니다. 태어나선 안될 핏덩이를 구하신 은혜에 도리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녀는 안드로니쿠스에게 가서 말했다.
“게오르기우스님의 아드님이시군요. 과연 아버님의 기상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고결한 전사와 그 아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아버지의 눈에 한참 못미칠 불민한 자식일 뿐입니다. 하지만 집안의 축복은 감사드립니다.”
다음은 쿠타이였다.
“근래에 말에서 내리지 않는 자들이 제국과 교회를 수호하고, 그들 중에 총명한 소년이 황궁에 있다 들었습니다.
섬기는 자로서 감사드립니다. 이교도인 그대에게도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감사합니다. 성녀님에게도 당신의 주님과 텡그리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온 그녀는 나를 보고 조금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살짝 의아한 표정?
갑자기 왜? 나는 신분을 밝히면 사람들이 식겁할 인물들을 동네 꼬마처럼 살갑게 맞이하던 그녀가 보인 예상치 못한 모습에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
“템즈의 공녀님이시죠? 소개장에 황녀의 소개를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네. 제가 카밀라 아르파드 입니다. 근데 무슨 일이신지요? 성녀님께서 제게 뭔가 의혹스러운 일이시라도?”
“저기··· 아니죠? 니키가 사고친 뭐 그런 거 아니죠?”
아니, 이게 대체 뭔 소리야? 갑자기 뜬금없이 나를 황제랑 엮어? 나는 어이가 없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저는 아르파드의 라즐로 공작의 소생입니다.
황제 폐하와 그런 의혹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 어딜 보고 그러시는 건가요? 제가 그분과 닮았나요?”
“아니, 닮은 건 아닌데··· 이상하네. 묘하게 분위기가 비슷한 것이 좀··· 혹시 혈연이 아니라면, 제자인가요?”
요하네스가 있었다면 성녀의 혜안이라며 또 감동먹고 난리가 아니겠네. 아오, 성녀님!!! 저를 그 술주정뱅이랑 엮지 마시라고요!
제가 어딜 봐서 그 양반이랑 비슷하다는 겁니까? 생각만 해도 열불이 나네.
성녀께서는 여전히 갸우뚱거렸지만, 일단은 우리 일행은 그렇게 인사를 마쳤고, 에스텔이 차를 준비했다고 안내하자 공소 옆 응접실네 자리잡았다.
솔직히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과거 내전기에 활약했던 5인방의 숨겨진 이야기부터, 그녀가 행한 기적까지.
하지만 온화한 표정으로 속세를 떠난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분에게 왠지 모르게 그걸 나서서 물어보는 것이 우리 일행 모두에게 다 난감한 듯 보였다.
그래서, 일단은 잠시 알고 싶었던 일은 뒤로 미루고, 우리는 우리가 그녀를 방문 목적을 먼저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리의 이야기를 한참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열띤 설명 후 그녀의 초빙에 대한 의향을 말하자, 그녀가 대답하였다.
“죄송합니다. 그건 좀 곤란할 것 같군요.”
“아니, 왜요? 설마 헝가리 농민군들이 로마 교회 측이라서 그런 건가요?”
“아뇨. 그분들이 정교회던, 카톨릭이던 같은 주님을 섬기는 이들은 다들 주님의 어린 양이죠.
하지만, 제가 갈 수 없는 이유는, 그분들보다도 저의 도움이 절실한 이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 공동체를 이대로 남겨 두고 떠날 수가 없어요.
지금 이곳은 주님이 내리신 시련에 고통받고 있답니다.”
“네? 여기 공동체요?”
그러자, 아가사 성녀 대신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스텔이 앞으로 나서며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설명을 들은 우리는 공동체에 내린 시련과 왜 그녀가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