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
나는 눈을 부비부비하고 다시 한번 보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던 그 광경이 달라지진 않았다.
내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감탄인지 절망인지 모를 말이 터져나왔다.
“성이··· 구름 위에 있어?”
그러자, 곁에 있던 팩스(Paks)의 유지들은 그 말에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말했다.
“구름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안개입니다. 그냥 짙은 안개가 구름처럼 보이는 것 뿐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안개라고 치죠. 근데, 그렇다고 해도··· 성이 구름까지는 아니어도, 안개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건 사실이잖아요?”
동네 유지들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자기 동네 먼산들의 경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야, 이씨!!! 장난하냐?
슬슬 뒷목에 조짐이 오는데,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성을 바라보고 있던 바실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아, 기억났다. 지난번에 여기 팩스를 지나갈 때 본 기억이 났어요.”
나는 그 말에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바실이 지난번에 지나갔던 일이라면, 헝가리가 통째로 제국에 털린 미로크슈 추격전이다.
어찌되었건, 제국의 군신께서 어떤 식으로든 손을 보고 지나간 곳이라는 말이다.
답이 있다는 뜻이다. 아, 다행이다. 상황만 봐서는 죽어도 해결이 안되는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나에게는 바실이라는 희망이···
“저 성, 죽어도 못뚫어요. 그래서 애초에 공성할 생각도 안하고 크게 우회했었어요. 덕분에 큰 희생없이 진군이 가능했었죠.”
죽었다. 희망이 죽었어. 아아아아아악!!!!! 애초에 저 길치를 희망이라고 생각한 내가 미친 년이지!!!
나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해맑게 아주 오래 전 결정한 우회기동이 얼마나 현명한 판단이었는지 흡족해하는 바실에게 분노했다.
이 머리터질 것 같은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를 이해하려면 시간을 조금 돌려야 한다.
그것은 솔노크 방면 작전이 완전히 돈좌된 상태로 내 속을 완전히 뒤집고 있던 시점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절이 사령부에 방문한 것이었다.
“공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는 팩스(Paks)에서 온 사절입니다.”
“누가 주인공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주인공이 아니라면 단역이야? 그럼, 가는 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해도 큰 문제없겠네? 아니, 시나리오 상 그게 적절하겠지?
그거 수사하러 오거나, 혹은 분노해서 복수 다짐하는 놈 누구야? 그 놈이랑 얘기하겠어.
아, 참고로 그 자식에게 출생의 비밀이나 어린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골목대장 소꿉친구가 있다면, 정리하고 오라고 해!!! 당장!!! 이제 더는 지긋지긋하니깐!!!”
“네??????”
잠시, 발광하는 나를, 베오울프 대신에 솔노크 작전을 어영부영 바치고 돌아온 마티가 쩔쩔매면서 뒤로 끌고가서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솔노크 평정은 대단히 허망하게 결말이 나버렸다.
아보니에 돈좌된 베오울프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도 안했고, 그래서 대신에 마티를 솔노크시로 경보병 대대와 함께 부랴부랴 대체 투입했다.
그리고, 그렇게 전개된 마티의 부대에 대해 베르크 백작은···
“지금 딸내미랑 사위 놈 때문에 정신없어 죽겠는데, 이게 또 뭔 난리야? 원하는 것이 솔노크의 항복이야?
알았어. 알았으니깐, 부대 데리고 와서 솔노크 점거하고 우리 항복했다고 부다페스트에 전해. 대신에 우리 귀찮게 건드리지 말고.
안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별 거지 같은 것들이 와서 성가시게 굴고 있어.”
항복하는 놈이 점령하는 놈을 개무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더라. 마티도 그 기세에 어리버리 ‘항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왔고.
덕분에 수천대군을 동원해 보란듯이 전개한 헝가리군의 첫출격은 뭔가 되게 애매하게 끝나버렸다.
아니, 끝난 것은 아니지. 솔노크가 항복한 것과 무관하게, 거기서 벌어지는 상황은 점점 더 수위를 높여가며, 우리 주력을 여전히 돈좌시키고 있었으니깐
“뭐라고? 마··· 마리아가 토했어? 서, 설마··· 응? 누구 아이냐고? 야, 이 개새끼야! 죽인다. 당연히 쇼의 아이지!!! 뒈져라, 엘렌파 쓰레기들아!!!”
“저 여자는 뭐야? 갑자기 쇼에게 끼부리는··· 에엥? 이본느가 누구야? 뭐라고? 전에 그 편지에 나온 이본느? 엘렌이 가명으로 쓴 거 아니었어? 새로운 히로인?’
“메란 저 새끼는 또 왜 저래? 갑자기 왜 쇼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야!!! 근데, 복선이나 전개를 생각하면 완전히 맞아들어?!!! 아아악!!!”
아오, 씨발. 저 더러운 새끼들이랑 그거 보고선 이제는 지들끼리 파벌 나눠서 쌈질하는 베오울프들, 전부 다 뒤졌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렇게 작심하고 출전한 첫 작전을, 어디가서 말하기도 창피한 수준으로 말아먹은 상황을 보고선 속이 안터지면 내가 미친 년이지.
그래서, 팩스에서 온 사절들에 대해서도 말이 곱게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진정을 하고 나서 다시 접견한 팩스의 사절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고 망설이다가, 잠시 후 자신들이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나는 상당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팩스는 슬로슈가 주도한 반란에 동참할 의사가 없고, 그래서 우리 헝가리군에 항복 및 협조를 하겠다고요?”
“아,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지도를 돌아보았다. 팩스는 헝가리 남서쪽에 위치한 중소도시다.
더 남서쪽에 위치한 대도시 페치와 부다페스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예로부터 상인들과 공방이 많은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최초에 우리 헝가리군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세운 목표,
부다페스트와 세게드를 양쪽 꼭지점으로 잡고, 측면에 두개의 꼭지점을 더 확보해 다이아몬드 형태로 해방구를 연결한다는 그 작전.
그 중에 하나가 이제는 이가 갈리는 솔노크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팩스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작전과 무관하게 공격에 사람 뒷목을 제대로 잡게 만든 솔노크와 달리,
동등한 수준의 작전 목표가 대가없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나는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이 믿을 수 없는 행운에 그 동안 솔노크에서 마음 고생한 것에 대한 주님의 은총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다. 마티였다.
“우리 측에 투항하겠다고요? 일단 환영하기는 합니다만, 뭔가 좀 이상하네요.
왜 팩스의 반란에 가담한 영주가 아니라, 팩스 시의 시민 대표 명의로 항복을 하러 온 거죠? 영주는 어디 있나요?”
“아, 그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세상이 그렇게 나한테 친절하면 되려 내가 어색해야 정상이지.
이것도 뭔가 쌔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살짝 내려놓은 기분으로 들은 그들의 이야기는 이랬다.
원래 팩스시는 예로부터 영주의 힘보다는 도심지에 위치한 공방과 조합의 힘이 더 강한 자유 도시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그래서, 선대 영주들도 그런 역학 관계를 무시하지 않고 시민들을 존중하며 공존하는 방식으로 통치가 이루어졌는데, 그런 평화가 깨진 상황이 터져버렸다.
바로, 아르파드 내전이었다. 앙주 가문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왕실은, 그곳에 내전에 공을 세운 방계의 일족을 영주로 앉혔다.
그런데, 그 영주가 능력은 부족한 것에 비해 좀 똘끼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사건건 도시의 공방과 조합과 마찰을 일으키고, 부당한 정책을 고수하여 백성들의 반감을 제대로 산 것이었다.
덕분에 서로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상황이 개선되기는 커녕 빵터지는 사건이 터졌다.
바로 슬로슈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팩스의 영주는 다른 영지들과 달리 순순히 영주의 말을 듣지 않는 영민들도 미웠고,
그런 영민들을 통제하지 못해 상소가 올라오는 것을 책망하는 아르파드 왕실에도 불만이 점점 쌓였다. 마침 그때 슬로슈가 봉기한 것이었다.
그 멍청한 영주는 얼씨구나 슬로슈의 봉기를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동조했다.
그리고, 그는 당당하게 팩스시에 유지들을 불러 모으고, 팩스 시민들에게도 자신을 따라 이번 반란에 동참하고 물자와 지원을 내놓으라 요구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그 상황에 어이없어 하며, 영주에게 ‘님 도르신?’ 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영주는 지가 반란을 일으키고선 되려 시민들을 반역자라 맹렬하게 매도하며 펄펄 뛰었다고 한다.
결국 분노한 영주는 사병들을 불러모아,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시민들을 응징하라 명했고, 시민들도 그런 영주의 만행을 곱게 받아주지 않았다.
시민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영주의 사병과 맞선 것이었다.
그래서, 반란에 가담도 하기 전에 도시는 피차 서로 되게 수준낮은 사병과 민병대의 난투로 혼란에 휩쌓였다.
하지만, 팩스시의 시민은 물론, 팩스 지방의 작은 외성들의 성주들도 영주에 가담하지 않고, 시민들의 편에 서자 결국 승기는 시민들의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전투··· 아니, 거의 난투 수준에 허접한 싸움이 영주의 패배로 끝날 것 같자, 영주는 분노하여 시민들을 저주하고 팩스를 탈출해 자신의 성으로 도주했다.
그의 거성은 팩스시가 아닌 도시의 외곽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얼떨결에 영주를 도시에서 몰아낸 조합과 공방들은 어쩔 수 없이 대표를 선발해 우리 측에 사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제안은 간단했다. 팩스시는 헝가리군에 투항하겠다. 그 대신, 도주해서 도시를 다시 탈환하려고 노리고 있는 못된 영주를 좀 어떻게 해달라.
그것이 그들이 우리를 방문해서 일단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던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면 말이 안되지. 나는 김이 팍 샌 얼굴로 사절들을 보았고, 그들은 민망한 표정으로 시선을 흐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단 나는 마음 속으로 그래도 나한테 손해볼 것은 없는 괜찮은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야 어찌되었건 헝가리 동남부의 요충지인 팩스가 나에게 투항하는 것이다.
물론, 도주하여 자기 성에 틀어박힌 영주를 손봐줘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지만, 그마저도 그의 병력이 겨우 5백 이하라는 이야기에 실소가 나왔다.
아니, 그 영주 진짜 머리가 나쁘긴 한 모양이네. 겨우 그 병력으로 틀어박혀 있다고? 와서 잡아갑쇼 하는 충동이 솟구치게?
결론적으로 이건, 우리가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 공짜로 팩스를 손에 넣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말도 안되는 미친 이유로 주력이 돈좌되어 시간이 질질 끌린 솔노크의 전선에 까먹은 것을, 순식간에 만회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좀 곤란하다는 투로 표정관리를 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대들, 팩스의 시민들이 아르파드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 그로 인해 반역을 도모한 영주를 몰아낸 것을 치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자신의 거성에 웅크리고 반기를 든 영주는 우리가 처리하도록 하죠.
그렇게 하면 사절분들께서 비로소 납득하시고 이곳까지 찾아오신 수고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질문에 그들은 안도의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이것으로 한건 해결이라고 생각하려는 찰라, 문득 나는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저 표정은? 안도는 안도인데··· 뭐랄까나, 잘 풀려서 안도라기 보다는, 뭔가 나만 아니면 돼! 라는 기분의 안도감?
내 자의식 과잉인지는 몰라도 살짝 그런 쌔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라도 빨리 팩스를 접수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절에게 안심하라고 하고, 마티에게 말했다.
“솔노크랑은 다르게 신속하게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령관이 생각하시는 적정한 투입 병력규모는?”
“경보병 1개 대대와 기동 1개 대대. 이렇게 두 부대가 바로 전개가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진을 준비하도록 명하십시오. 그리고 수뇌부는 가능한 전원 동행하여 가도록 하죠.”
그렇게, 솔노크 작전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공으로 팩스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리고 나는, 현장에서 돌발 발생가능한 협상과 자문을 위해 언급한, 가능한 수뇌부 전원을 데려가기 위해 아보니성 앞에 관람석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어느새 전혀 위화감도 없고, 돌아왔다는 말도 없이 나타나, 자리에 퍼질고 앉은 어느 머저리의 귀를 잡아당겨 끌어냈다.
“아악! 공녀님. 귀는 좀 놔주세요. 그리고 바쁜 건 알겠지만 지금은 안되는데. 이제 곧 클라이막스라고요.
엘렌이 쇼를 위해서, 마리아의 베일을 쓰고 희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엘렌파로서 이런 하이라이트를 놓칠수는 없단 말입니다.
신분을 숨긴 하녀의 로망을 제대로 담은 엘렌의 이야기가 딱 내 취향이라고요. 엘렌파여 영원하라! 공녀님, 제발!!!”
그런 거 니 옆에도 하나 있으니, 닥치고 따라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팩스에서 나는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구름처럼 보이는 안개를 뚫고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이는 말도 안되는 난공불락의 성을 말이다.
야, 이 팩스의 유지 개새끼들아!!! 이건 사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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