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
방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그리고 분위기는 무시무시하였다.
아보니 인근의 농가를 점거하고, 임시로 심문실로 사용되는 창고의 내부가 도축 장비와 어우러져 살풍경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을 살풍경하게 하는 진짜 원인은 사람이었다.
도축 탁자를 앞에 두고, 손목이 결박되어 의자에 앉혀진 젊은 귀족.
그리고 그를 둘러싼 잔혹하고 거칠어 보이는 북방의 전사들이 보기만 해도 섬찟한 병기들을 들고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왠만한 사람은 버티지 못하고 질식할 것 같은 그곳에, 잠시 후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더 중압적인 분위기로.
“여깁니다, 대장.”
심문실로 들어온 일행에 앞에 선 남자. 이미 방안에 있던 전사들도 충분히 거한들인데,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더 건장한 존재가 공간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위압감에 심문실에 있던 그의 부하들마저도 움찔하며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할 정도였다.
그 남자, 울프스턴은 잔인한 미소를 흘리며 부하들에게 고개를 까딱했고, 그러자 그들은 예를 마치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솔노크 선봉부대의 지휘관 아보니 쇼가 당신인가? 큭큭큭··· 만나서 반갑다. 울프스턴이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젊구만. 번드르르한 외모도 잘생겼고. 솔노크의 맹주 베르크 백작이 출중한 사위 덕에 마음이 든든하셨겠어?
바로 어제까지는 말이야.”
승자의 오만이라고 하기도 뭐한 뼈아픈 진실이었다. 특히나 패장에게 있어서는.
아보니 쇼는 그런 그의 말에 묵묵히 있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울프스턴이 말을 이어갔다.
“자, 이제 참패한 이후의 일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눠볼까? 이봐, 저 잘생긴 청년의 결박은 풀어줘.”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호오. 이제야 말문이 좀 열리나? 고집부릴 줄 알았는데, 결박만 풀어줘도 대화가 되다니, 의외로 융통성은 있는 모양이군.
좋아, 그럼 빙빙 둘러대지 않고 요점만 얘기하지. 아보니성에게 성문을 열라고 명령해.
그리고, 솔노크시와 나머지 두 지성들에도 더 이상 승산이 없으니,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설득해.”
승자로서 포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가장 서로에게 희생없이 상황을 마무리할 방법이기도 했고. 대개, 여기서 포로의 의사는 두가지로 갈린다.
순순히 동의하던가, 아니면 악을 쓰며 죽으면 죽었지 그건 못하겠다고 소리치던가. 그리고 아보니 쇼는···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유감스럽게도 후자였다. 베오울프 병사들은 좀 김이 샌 표정이었지만,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이런 상황은 익숙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응 방법도 익숙했다. 쇼의 얼굴에서 흐른 식은 땀이 떨어져 목에 드리워진 거대한 칼날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자신을 겨눈 흉악해 보이는 여러 개의 무기를 오갔다.
사람은 물론이고, 곰이나 맷돼지도 제대로 맞으면 곧바로 세상하직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그에게 밀착했다.
그리고, 울프스턴은 지루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나름 용기가 가상하군. 하지만 상황을 봐가면서 부려야 하지 싶어.
저 친구들 여기까지 행군하느라 많이 배고프고, 그에 비해 보급은 아직 멀어서 이기고 나서도 분위기가 영 신나지 않거든?
난 저 친구들이 오늘 저녁에 다진 고기로 패티를 만들어서 빵에 싸먹겠다고 해도 말리지 못하겠어.”
굳이 그 고기 패티를 뭘로 만들 것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도열한 부하들 중에서 특히 살집이 있는 부하가 입맛을 다시는 추임새도 적절했다.
그래서, 울프스턴은 이 정도면 적당히 그 잘난 자존심을 버리고 현실적인 타협을 해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온 대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목숨가지고 장난질인가? 구질구질하게 구는 군.
좋아. 그렇다면 말로 해선 안되겠군. 이봐, 이 잘생긴 친구 인상이 구겨지도록 좀 거칠게 다룰 녀석들 보고 들어오라고···”
그때,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울프스턴의 말을 끊듯이 쇼가 말했다.
“아니, 내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란 말이다.
내가 가서 명령한다고 해도, 아보니 성의 성문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쇼의 말에 울프스턴은 손을 들어 부하들을 멈췄다. 그리고, 쇼를 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냐? 네가 아보니 성의 성주 아니던가? 성에 네 부하들이 성주인 네 명령을 안들을 거라는 건가?
어째서? 그들이 그렇게 이번 반란에 열렬한 지지자라서, 항복에 대해서 거부하기라도 하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말이 안되지. 네 녀석은 단순히 아보니 성의 성주가 아닌, 솔노크의 맹주인 베르크의 사위가 아닌가?
맹주의 사위이자, 선봉장인 네 녀석이 항복을 권고하는데, 그걸 무시하고 성에서 내버려 둔다고? 지금 그걸 우리보고 믿으라고 하는 건가?”
그런데, 울프스턴의 말이 끝나자, 쇼는 갑자기 고개를 떨구더니 잠시 후 흐느끼는 듯 키득거리는 듯 움찔거렸다.
그의 기이한 반응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데, 쇼가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킥킥킥···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하나 보지? 솔노크에서 제일 복받은 사내.
맹주의 아름다운 딸을 아내로 맞고, 솔노크 지방군을 통솔하는 자리에 출세한 유망주. 앞으로 솔노크의 차기 지도자가 될 몸.
큭큭큭··· 그래, 무리도 아니지. 확실히 겉보기로는 그렇게 보이니깐.”
“아니라는 건가?”
“이봐, 제국에서 온 늑대 양반. 당신 사람 제대로 잘못 짚었어.
당신 눈앞에 있는 이 머저리는 솔노크의 유망주가 아니라, 자기 의지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베르크의 꼭두각시야.”
“······!!!”
순간, 베오울프의 간부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오갔다.
뭐라고? 나름 솔노크의 주력이자 영향력을 발휘할 인물을 확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그런 동요 속에 쇼의 말이 이어졌다.
“베르크에게 나는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다, 항상, 그는 그랬지. 솔노크의 왕으로 군림하며,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하는 자였다.
그가 곧 하늘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아래 것들이며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지.
내가 그의 사위가 된 것은, 내가 딱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자기 외동딸의 신랑으로, 그나마 아보니의 영주 정도는 되야 한다는 이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자, 영주로서 뭘 해볼 여유도 없이, 강제로 그의 사위가 되고, 솔노크의 군사령관이 되어야 했다.
말이 좋아 솔노크 군사령관이자, 사실상 베르크의 뜻 외에는 아무 명령도 듣지 않는 군대에 사령관이 무슨 의민가?
그리고, 아보니의 영주 자리도 사실상 내 것이 아니었다.
사악하기로는 제 아비와 쏙 빼닮은 내 아내, 소피아. 멋대로 아보니 성의 안채에 아내란답시고 밀고 들어와서, 지아비 보기는 하인 보듯 했지.
지금, 아보니는 사실상 그 여자의 것이다. 베르크가 자기 딸에게 우리 집안의 것을 빼앗아 준 선물이란 말이다.
그 여자가 버티고 있는 아보니성이 지금 내가 명령한다고 순순히 문을 열리라고 생각하나?
너희들은 뭔가 나를 잡고 대어를 낚았다고 의기양양한 모양인데,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런 힘은 전혀 없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신세에 불과하다.
뭔가, 나에게 기대를 했다면 너희들은 크게 실수한거야!!!”
쇼는 마치, 마음 속에 깊이 담긴 한을 풀듯이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그리고 얘기를 마치고 나서도 한참을 씩씩거렸다.
그런 모습을 보며, 울프스턴을 비롯한 베오울프의 간부들 사이에서는 당혹한 표정이 스쳐갔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에서는 낭패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초전에 압도적인 승리와 적 사령관의 확보로 순식간에 작전을 종결하리라 생각한 기대가, 완전히 무산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령관인 울프스턴에게 모였다,
부하들의 시선을 느낀 울프스턴은 마찬가지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드러냈지만, 최대한 자제하고 씩씩거리는 쇼에게 말했다.
“뭐, 너희 내부의 내분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작전을 진행하는 것이다.
네 녀석은 네가 나가서 아무리 명령해 봤자, 성에서는 네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건 네 의견일 뿐이다.
그러니, 내일 예정대로 너를 성 앞으로 데려갈 테니, 성에 항복을 권하는 전언을 전해라.”
“킥킥킥··· 단언하건데 틀림없이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란다면 기꺼이 응해주지.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아보니 성이 자신들의 영주인 나의 명령에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말이야.
내가 어떤 모멸을 감수하며 버텨왔는지 그 눈으로 똑똑히 보면, 아마도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크하하하.”
울프스턴은 자포자기하다 못해, 이제는 광소하는 쇼를 두고 간부들과 심문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런 쇼의 반응에 대해, 일부 간부들이 밖으로 나와 울프스턴에게 말했다.
“대장.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성에 회유를 하는 것은 시간 낭비고, 차라리 그냥 공성을 준비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렇게 방비가 잘된 성이 아니니, 작심하고 공격하면 잘 준비된 공성장비 없이도 함락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굳이 회유하느니 하며 적의 지원이 합류하거나 할 시간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흠. 그렇기는 하지만, 공녀에게 우리가 받은 명령은, 가급적 출혈을 최소로 하고 승리하라는 것이었다.
공성을 해버리면 확실히 이기기는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무시못할 사상자가 나올텐데?
밑져도 그만이니, 일단 저 녀석에게 성의 회유를 강요해보고, 정말로 강경하게 성주의 의견마저도 무시한다면 그때 다시 공성을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간부는 합리적인 울프스턴의 말에 수긍하였고 물러섰다. 하지만, 상당수의 장교들은 그런 온건한 방식이 시간 낭비라는 표정이었다.
막말로 마음만 먹으면 50명 정도의 소대 병력만으로도 순식간에 기어올라 점거 가능한 성을 굳이 그런 수고를 들여야 하냐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보니 쇼의 말처럼, 실제로 성에서 그를 압박한 회유를 거절할 가능성도 높아 보였고.
하지만, 외로운 늑대 울프스턴의 통솔에 의문을 품는 자는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아보니 성에 하루 명줄이 연장되었다고 내심 비웃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들은 예정대로 아보니성 앞으로 쇼를 데리고 갔다.
울프스턴은 조금 거리를 두고 위치한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미리 성의 양측면에 배치한 중대들에 신호를 보냈다.
지시는 간단했다. 성문이 순순히 열리면 그대로 복귀. 하지만, 정말로 거부한다면 사다리를 들고 성으로 진입 개시.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아보니성이 그날 함락되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그런데, 울프스턴마저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눈앞에서 벌어졌다.
“커헉!!!”
“어? 어어어? 저, 저게 뭐야?!!! 저 자식 화살에 맞은 거야?”
쇼의 비명이 성 앞에서 터져나오고, 그것을 본 울프스턴이 경악했다.
뭔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보니성에서 날아온 의문의 화살이 쇼의 어께에 명중했던 것이다. 그건, 전혀 생각치 못한 상황이었다.
쇼를 데리고 성 앞으로 간 베오울프 대원들도 질겁을 했다.
그들은 경악하여 순식간에 방패로 쇼를 둘러싸고, 그를 들쳐 업고선 성을 뒤로 하고 막사로 달려와야 했다.
그리고, 그 예상치 못한 강경한 반응에 울프스턴은 일단 양측에 배치한 진입 대기 중이었던 병력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그들 또한 수긍하고 물러섰다. 다짜고짜 밀고 갈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