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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뭐라고? 태자님이 잠시 본국에 돌아가신다고?”
“누나가 수해 복구하러 다니느라 정신없어서 못 전했는데, 본국에서 이것저것 밀린 일이 있다고, 형에게 일시 귀국 요청이 왔었어.
마침, 안나 황녀님도 귀국하신다는데, 말 나온 김에 호위를 겸해서 콘스탄티노플에 잠시 돌아갈 예정이래.”
끄응. 안나 황녀님이 귀국하시는 거야 두손들고 환영인데, 그걸 걔가 호위하고 겸사겸사 업무로 귀국한다고 하니 다급해졌다.
솔직히, 아무리 바실이라도 씨도 안먹힐 얘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옆에 있을 때 얘기해야 그나마 덜 민망하게 거절을 당하겠지.
질질 끌었다가는 또 나중에 왕실에서 왜 지지부진 하냐고 난리 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얘기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짜증이 확 치밀었다. 어휴, 저 깊은 산속 대체 어디에 녀석이 있는 걸까?
2시간 후, 나는 드디어 짜증이 폭발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 녀석,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세게드의 야산이 슈발츠발트의 흑림도 아닌데, 은근히 녀석의 행방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헤매다가 발견한 것은 녀석의 소행으로 보이는 은신처, 저장고, 화덕 등등.
여기서 지낸지 얼마나 되었다고, 참 여기저기 많이도 만들어 놨다.
그걸 보며, 나는 쓴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역시, 얘는 아무리 봐도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보다는 호밀밭의 시골 소년이 더 잘 어울려.
나나 걔나, 어쩌면 우리에게 맞지 않는 가장 어색한 옷을 걸친 동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킥킥킥··· 묘하게 그 모지리랑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나일지도 모르겠네?”
“응? 저요?”
“응. 너. 응? 꺄아아아아악!!!”
순간 식겁해서 뒤로 나자빠졌다. 고개를 돌리니 바로 내 옆에,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꺼꾸로 매달린 바실이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서, 바실은 난처하게 웃더니 이내 땅에 뛰어내려 착지하고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켰다.
“잠시 나무 위에서 낮잠을 자느라, 공녀님이 오신 줄 몰랐어요. 괜찮으세요?”
“정말 놀랐다고요, 태자님.”
나는 일어서며 녀석을 보고 뭔가 한 소리를 할까 하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항상하는 생각이긴 하지만, 누가 얘를 천년제국의 공동 황제이자 불패의 군신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안나 황녀가 와서 좀 꾸민 덕인지, 평소보다 조금 뽀샤시한 티는 남아도 여전히 황궁보다는 야산이 어울리는 시골 소년이다.
옷차림도 그냥 마자르 농민들과 구분되지 않는 검박한 모습이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지만, 여전히 다수가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갭이다.
그리고 그런 갭에서 묘하게 나만은 근본에 가까운 저 소박한 모습이 더 익숙하고 바실답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녀석도 나에게만은 그걸 숨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하는 것이, 왠지 나만이 독점하는 제국의 군신의 모습이란 걸 생각하면 조금 웃음이 난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조금 미소지었고, 녀석에게 말했다.
“본국에 귀국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그만 내려가서 가실 준비를 하셔야죠.”
“아아··· 그 얘기인가요? 사실 그 얘기가 듣기 싫어서 숨어 있었던 것도 있었는데. 뭐 들켰으니 하는 수 없네요.”
“귀국이 많이 아쉬우신 모양이시네요?”
“그럼요. 지금 여기에는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는 걸요. 그걸 두고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네요.”
응? 잠깐만··· 뭐라고? 여기 세게드에 있는 소중한 것? 엑! 그리고 그 그윽한 눈빛 뭐야?
갑자기 나는 내가 아는 그 녀석답지 않은 묘한 시선에 좀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얘 갑자기 왜 이래? 사람 당혹스럽게? 그리고 녀석이 말했다.
“캠프 되게 잘 만들어 놨는데. 그리고 쉘터랑 저장고도 거의 완성했고, 얼마 안있으면 양봉장이랑 훈제작업장도 완성된단 말이에요.
이걸 다 두고 가려니 너무 마음이 안타까워요. 하아··· 열심히 만들었는데.”
때릴까? 역시나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여기서 때리면 황제 폭행도 정상 참작되지 않을까?
뭐 역시나 바실이 바실하는 대답에 나는 때릴 생각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에효. 네가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하냐?
그래서, 나는 그나마 무난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어차피 좀 이따 살짝 불편한 얘기도 해야 하고.
“세게드에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열정을 다해서 뭔가 만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요.
너무 아쉬워하진 마시죠. 어차피 임시 귀환이니 언제든 다시 오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가능한한 제가 틈틈히 돌보고, 이곳을 태자님을 위해 남겨놓고 보존하도록 지시해 두겠습니다.”
“아!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건 공녀님 밖에 없으셔요. 마침, 오신 김에 한번 둘러 보실래요? 나름 손님맞을 공간도 만들었는데.”
“아, 네··· 뭐. 그러죠.”
그렇게 말하자, 바실은 신이 났는지 내 손을 잡고 희희낙낙하며, 자신이 만든 소중한 공간에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오··· 얘 혼자 무슨 마을을 만들어 놨냐?
장기 거주로는 좀 부적합하지만, 야외 캠핑용으로는 중대 하나가 와도 그럭저럭 지낼만한 부대 시설들을 여기저기 잘도 만들어 놨다.
야, 이··· 여기가 네 개인 캠핑장이냐? 엄연한 군사 부지에.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대체 뭔 짓을 하면 이 정도로 많이 만들어 놓을 수가 있냐?
아무튼 나는 한참동안 녀석이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이것저것에 영혼없는 추임새를 넣어야 했고,
한참 후 화덕 옆에 원목을 거칠게 다듬어 만든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내놓은 다과를 보고 또 할말을 잃었다.
허니라임티와 라즈베리 머핀. 그릇도 아예 여기서 구웠는지, 질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근데 또 맛은 끝내주네. 지난번 부다페스트 왕궁 정원 티파티에서 먹은 것들보다도 나은 수준이라고 말할 정도로···
대체 이 야생 소년은 모든 것이 다 왜 이렇게 극단적인 걸까?
“맛 괜찮죠? 하핫! 틀림없이 공녀님이라면 저와 같은 걸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통 이런 것에 관심이 없어서···”
“그랬나요? 의외네요. 쿠타이 녀석이라면 좋아하지 싶은데.”
“하하하. 걔는 유목 생활보다는 콘스탄틴노플이나 라구사 같은 도시가 더 좋다는 애 잖아요.”
“아아, 그것도 그러네요. 그럼 안나 황녀님은 요?”
“그분은··· 항상 저를 챙겨봐 주시려는 건 감사하지만, 가능한 여기서 저를 끌고 내려오시려는 입장이시지 않을까요?”
바실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멋쩍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묘하게 그 말을 듣고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내가 굳이 상관할 부분은 아니지만, 안나 황녀가 하람릭의 주인이란답시고 바실을 서방님이라며 찰싹 붙어 다니는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았으니깐.
거기다 왠지 모르게 합류한 아가사 할매도 안나 황녀랑 죽이 맞아서 돌아다녀서 뭐라 그러지도 못하고.
암튼, 굳이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이래저래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는데, 바실이 한 말에 상관관계가 없어도 묘하게 안심되는 기분이 들었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좀 나아진 기분으로 차를 들 수 있었고, 그래서 오늘 꺼내야 할 용건에 대해 말할 용기가 생겼다.
솔직히, 거절당할 것은 명확했다. 아무리 얘가 좀 모자라도 그렇지, 전장에서는 신으로 추앙받는 절대적인 존재다.
그런 녀석에게,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고, 군축에 가까운 수준의 부대 운영 교리 개편을, 우리 기준에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이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하겠나?
그래서 나는 가능한한 녀석이 화내지 않는 수준에서 가볍게 웃으며 거절당하기를 소망하며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런 내 기대는 산산히 무너져 내렸다.
“아, 그런 의견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죠 뭐. 공녀님이 제안하신 대로 전 제국 테마군의 교리를 헝가리군에 맞춰 변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응? 근데 왜 공녀님 왜 갑자기 차를 뿜어내시고 뒤로 휘청거리세요?”
“그걸 몰라서 물어보세요? 지금 제 정신이세요? 그걸 잠시 고려도 해보지 않고, 거절도 아니라 무려 동의를 하신다고요?”
“네? 공녀님이 제안하신 거잖아요? 그거 제 정신이 아니어야 동의하는 거였나요?”
“아니, 그··· 그건 아니지만.”
기겁할 것 같은 너무 빠른 동의와 반문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얌마. 이건 아무리 네가 단순해도 좀 아니잖아.
우리가 여기 오게 된 이유를 상기해보라고. 우리, 이 한심한 헝가리군을 최소한 옆구리 끄트머리에는 둬도 될 정도로 만드려고 온 거 아니었어?
근데, 그 한심한 수준으로 따라 낮추면 어떻게 해? 세게드 야산에서 캠핑하다 버섯이라도 잘못 먹었냐?
내가, 제국의 사람이라면, 아니, 제국과 무관해도 싸다구를 날려서라도 말려야 할 일을 태연히 동의하는 녀석에게 나는 경악했다.
그런데 녀석은 의외로 별일 아니라는 듯이 태연히 대답했다.
“결론적으로 소대나 중대 단위의 부대 편성에 전투 특기를 병행하지 않는 공병을 의무적으로 배정하라는 말이잖습니까?
제안해볼 만한 의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뭐 그렇게 경악할 만한 일인가요?
동맹군으로 보조를 맞추기 위해, 괜찮은 운용 방식을 유사한 편제로 맞춰달라는 말이 그렇게 무리가 있다는 생각은 안드는데요?”
“아, 아니··· 태자님. 제안한 제가 할말은 아니지만, 그걸 테마군 전부에 그대로 전부 적용하는 건 좀 무리가 있죠.
당장, 부대 전투 인력 구성이 줄어들게 되잖아요? 그럼 같은 중대 규모 부대가 교전하면, 아군 측이 불리하다는 말이기도 한데.
그리고, 제국은 전통적으로 그런 지원 부대는 아욱실리아로 빼서 별도 전문 부대로 운영하시잖아요?
당장, 아욱실리아 예니체리가 취사, 군악, 보급을 겸해서 공병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고요.
그런 상황에서 굳이 전문 전투 부대에 그런 비전투 병과를 끼워넣으면 반발도 무지막지하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해달라기 보다는 그저 가벼운 의견 정도로··· 천년 군사제국 로마의 체계가 그렇게 간단히 바뀌어서는 안되는 거잖아요?
“아뇨. 저는 오히려 그런 체계가 신속하게 바뀌는 것이 우리 로마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름, 제가 여기와서 소집된 병사들과 지내고, 훈련이나 편성에 참여하면서 새롭게 공부하게 된 것들이 많습니다. 좋은 경험의 시간이었죠.
그리고, 그걸 통해서 저는 저희도 나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지적하신 대로 전투력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수지만, 그 공백을 공병 지원으로 채우는 방식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라 판단했습니다.
당장, 이번에 발생한 수해에서 군이 확실하게 헝가리 전역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입증하지 않았습니까?”
얌마. 우리 소방대나 구조대 아니라고. 군대라고!!! 왜 관점이 아르파드 왕실의 머저리들이랑 똑같아?
그러거나 말거나, 바실의 말은 이어졌다.
“저는 장기적인 측면에서 그런 군의 범용성을 높이고, 각 부대의 대응이 전투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방면에 대응할 수 있는 시도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제국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겠죠. 좋은 건 배우고 나눠야 하지 않겠어요?
공녀님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번에 본국에 돌아가면, 그 부분에 대해서 군사 관료들과 사령관들을 모아 놓고 논의해볼 예정이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당장 이 녀석의 뒷통수를 쎄게 치면, 그 동안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안돼!!!!!! 쓰벌, 지금까지 어떻게 동고동락하며 키운 제국군인데, 이런 말도 안되는 한심한 수준의 신생 농노군의 체계를 배우고 나누게 만들어!!!
내가 가장 먼저 기를 쓰고 반대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지시가 내 입을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그···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좋은 의견을 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별 말씀을 요. 공녀님은 아직 제국군 총사령관의 수석자문이십니다. 항상 제국군을 위해 걱정하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죄의식이 만땅!!! 왠지 모르게 바람피고 마누라 내쫓고 이혼한 서방이 우연히, 재가한 마누라 만났는데,
마누라가 재혼해서 낳은 애가 자기 애보다 넘 이뻐서, 괜히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좀 못나게 키우라고 흉본 느낌이야.(뭐가 이렇게 구체적이야?)
암튼, 왠지 모르게 내가 바람핀 몹쓸 신랑 입장이 되서,
해맑게 ‘우리 애 좀 멍청하게 키울게’ 라며 충고 고맙다고 말하는 마누라를 보며 나는 더 할말이 없었다.
나 진짜 여기서 이래저래 정체성 혼란 많이 느끼고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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