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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 맞습니다. 테오 오라버니. 그분과의 혼담 때문에 제가 당숙에게 무리한 부탁드렸어요. 하지만, 공녀님도 그분을 보시면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분이 얼마나 수려하고 고고하신 분인지··· 멀리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여서 감히 다가갈 엄두가 나질 않아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다 그럴 정도죠. 아, 마침 저기 계시네요. 저기를 보세요.”
그녀가 창밖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파티장의 한쪽 편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확실히, 상당히 수려한 모습의 남자다. 명가의 후계자이며 유능한 변호사라기 보다는 동화 속의 왕자님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선이 고운 남자였다. 동방 출신답게 무슬림이 아니어도 햇빛을 피하는 터번을 두른 모습도 이국적이었고, 온순해 보이는 큰 개를 데리고 정갈하게 앉아 우수에 잠긴 모습이 뭔가 이지적이면서도 귀족적인 느낌을 주었다.
“네에. 확실히 듣던 대로 수려하신 분이시군요. 베스양이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거기다 명가의 후계자이자, 시민들에게 지지받는 약자의 편에 선 변호사라. 멋진 분임에 틀림없군요. 그리고··· 전해들은 것과 같이 올코트 가의 자매분들이 저분과의 혼담을 두고선 서로 경쟁하는 것도 이해가 되고요.”
“네, 맞아요. 지금 그게 문제에요. 어린 시절에 막연하게 정혼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감이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 멀리서 그분이 활약하시는 이야기에 만나뵙지도 않은 분에 대해서 마음이 설레이는 기분이 들었죠. 네, 저는 이미 그분을 만나기도 전에 그분에게 빠져버렸던 거에요. 그리고 그분을 실제로 만나뵙게 되고선 기절하는 줄 알았아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수려하고 멋진 분이 오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저는··· 진심으로 저 분을 좋아하고 있어요. 그래서 반드시 결혼하고 싶고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럴 가능성이 지금은 전무해요. 지금 혼담을 논하면서 여러 차례 저희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 와주신 저분에게 저는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했거든요.”
“엥? 어째서요? 진심으로 좋아하신다면서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그분에게 다가가 자신을 어필해야 하지 않나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조금 울먹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람들이 올코트 가의 작은 아씨들이라고 저희들을 부르지만, 사실 관심을 가지는 건 메그 언니와 조에 언니 뿐이에요. 저는 그냥 사람들의 관심 밖이죠. 사람들은 예전부터 아름다운 외모에 귀부인의 품격이 있는 메그 언니나 활발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누구에게나 인기있는 조에 언니만을 좋아하죠. 저처럼 소극적이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 아이는 항상 이런 자리에서 들러리에 불과하죠. 제 편은 아직 어린 에이미 뿐이죠. 그리고 그건 이번 혼담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아드리아노플 사교계에서는 누구나 다 테오님의 신부로 메그 언니와 조에 언니 둘중에 한사람이 될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파티에 모인 여자들도 서로 자기가 그 후보로 나설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지지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몰아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서 저의 존재는 어디에도 없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구석에서 숨어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죠. 그래서, 이렇게 도움을 청하게 된 거에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 확실히 귀족 여성들의 사교계에서 이런 암투는 흔한 일이고, 그 중에는 여기 있는 베스처럼 소심한 성격이라 사교계에 어울리지 못해서 구석으로 내몰리는 아가씨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아가씨들은 가장 아름다운 젊은 시절에 단 한번도 스스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부모들의 의지로 정해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사람과 결혼하게 되지. 고향에서도 흔히 벌어졌던 일이다. 안타깝지만 흔히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제는 울먹임을 넘어 흐느낌의 수준으로 넘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묘한 동정심이 드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모시던 카밀라 공녀님도 그 미모에 불구하고 사교계에서는 크게 빛나는 분은 아니셨다. 공녀님의 혼담을 정략적으로 이용할 생각을 하신 공작님의 생각 덕분에 되려 그 모습을 많이 노출시키지 못하고 방에서 나오지 못하시던 분이었지. 다행스럽게도 바이에른의 명가 비텔스바흐 가분의 칼 공자님과 혼담이 성사되고 사랑에 빠지셔서, 공작님의 의도도 성공하고 공녀님도 행복해지셨지만, 그 전에 모시던 입장에서 그분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 물론, 카밀라 공녀님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지만, 집안에 구속되고 다른 자매들의 암투에 밀려 고립된 베스의 모습에서 예전에 느꼈던 연민을 다시 한번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생각했던 가능한한 귀찮은 일에는 발을 빼자는 마음을 접고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도와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울먹이는 베스를 보면서 말했다.
“기운을 내세요. 저는 그런 베스양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벌써부터 포기하지 말고 힘을 내세요.”
“아아··· 공녀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정말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포동포동한 얼굴에서는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는 물었다.
“근데, 구체적으로 제가 뭘 도와드리면 도움이 되실까요? 사실 말은 자신있게 했지만, 저도 이런 사교계의 일은 좀 무지한 편이라 어떤 식으로 도움을 드려야 베스양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는데요. 필요하신 것을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네. 일단 이번 맞선에서 제가 그분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언니들보다도 더 나은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겠죠. 사교계에서 여성들의 품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3가지 요소를 제가 갖추는 것이 시급합니다. 인성, 미모, 지성. 그 세가지를 제가 가지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지금 저는 언니들을 상대로 이길만큼 마음가짐이 강하지도 못하고, 언니들만큼 예쁘지도 않고, 언니들만큼의 교양도 부족한 상황이죠.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실 멘토이자 스승님들이 필요합니다. 대부분, 사교계에서 처음 데뷔하는 젊은 아가씨들이 이런 여자들의 덕목을 갖추기 위해서는 집안이나 혹은 동향의 지체 높고 품격을 가진 여자분들에게 직접 도움을 받거나 배움을 얻어 그 자격을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죠. 하지만, 지금 저에게는 그런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여성 멘토가 없으셔요. 어머님은 물론 언니들은 당연히 도와줄리가 없죠.
그리고, 이곳 아드리아노플 사교계의 멘토가 되어주실만한 존경받는 여자분들은 다들 메그 언니와 조에 언니로 편이 갈려서 저를 돌봐줄 호의를 가지신 분은 전무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저는 고립무원의 처지입니다. 그래서, 공녀님에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이곳 아드리아노플에서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없지만, 콘스탄틴노플이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곳이야 말로 제국의 심장이자 황도. 그리고 그 중심에 계셨던 공녀님이라면 틀림없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는 스승님들을 찾아주실 수 있을겁니다.
그래서, 부탁드려요. 제발 저를 콘스탄틴노플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저에게 인성과 미모, 지성을 갖출 수 있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제국에서 가장 지체 높으신 여자분들을 저의 스승님으로 소개해주세요.”
그녀의 구체적인 요청에 나는 조금은 흐릿했던 방향성이 잡혀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려는 찰라, 방에 누군가 들어왔다. 들어온 것은 세명의 여인이었다.
“황도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집안 어른들에게 소개를 하지 않고 여기로 모시는 건 무슨 예절인거니?”
“어··· 어머님? 그리고 언니들···”
베스는 방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앞에 선 중년의 여인과 뒤에 선 두 젊은 여인을 보고 움추러 들었다. 아항, 이 사람이 바로 올코트 의원의 새로운 부인인 모양이지? 그리고, 뒤에 두 젊은 여자들이 바로 베스가 말한 두 언니인 메그와 조에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녀들이 먼저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한 모양이구나. 아직도 테오군에 대해서 마음을 둔 모양이지? 그만두는 것이 좋다고 이미 말했지 않니? 언니가 좋은 말 할때 알아듣고 포기하렴. 그 사람은 너와 어울리지 않아.”
“그래그래. 그 사람은 나와 메그 언니가 상대할 테니 너는 그냥 얌전히 방에 있으면 돼. 괜히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지 말하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 이렇게 황도에서 억지로 손님까지 초청을 해서 무례를 범하다니.”
“네 언니들의 말이 맞다. 베스. 그만 포기하거라. 이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는 그냥 가만히 지켜보면 된다. 그리고, 카밀라 공녀님. 이렇게 저희 집안의 아이가 무례를 범한 점을 사과드립니다. 이런 일로 황도의 고귀하신 분을 발걸음하게 하는 것이 아닌데. 제가 따로 저 아이에게 따끔히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나는 마음 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녀들이 보이는 오만한 태도도 때문도 아니고, 베스가 보이는 울먹이는 표정 때문도 아니었다. 뭔가, 사교계에서 허영에 찬 여자들이 부리는 텃세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감인 것 같았다. 마치, 나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것 같이 들리는 그녀들의 말에 나는 마음 속으로 결심을 다잡았다. 그리고, 거의 주저앉은 베스의 앞으로 나서며 그녀들을 향해 말했다.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깐요. 이곳에 제가 온 것은 어디까지나 제 자의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였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올코트 가의 가풍과 아드리아노플의 사회가 참 볼만하군요. 힘없는 동생을 따돌리면서 누리는 허영이 그리 좋으신가요?”
“고··· 공녀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이 베스를 따돌린다니요? 그게 무슨···”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상세한 내역은 다 들었으니깐요. 귀족들의 문화가 황도보다 더 앞서간다는 이곳 아드리아노플에서 그 누구도 베스양의 멘토로 그녀를 사교계에 이끌어주지 않는 점에서 이미 말을 다한 것이 아닙니까?”
“하, 하지만 그것은···”
올코트 부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면서 그녀의 말을 끊고 말을 이어갔다.
“구차하게 변명하실 필요없습니다. 그런 건 원하지 않으니깐요. 다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방해하지 말 것을 경고드립니다. 지금부터 베스양의 신변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녀를 잠시 콘스탄틴노플로 데리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똑똑히 보여드리죠. 이곳 아드리아노플이 감히 비길 수 없는 콘스탄틴노플 사교계의 위엄과 품격을 말입니다. 그녀를, 여기 있는 그 어떤 아가씨보다도 더 빛나는 존재로 만들어 보내드릴테니 똑똑히 지켜보시길 바랍니다.”
나의 선전포고 같은 말에 베스는 감격을··· 그리고 올코트 부인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하! 그러신가요? 알겠습니다.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좋을 대로 하시죠. 대체, 무슨 생각으로 황궁에서 오신 손님이 이런 일에 개입을 하시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해보시죠. 저희는 방해하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해보시죠. 베스, 너도 그렇다면 네 하고 싶은대로 해보려무나. 뭐든 허락해줄 테니 말이다. 대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가자, 얘들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베스의 두 언니와 같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차가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결의가 다져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그렇게 나왔다 이거지? 바라던 바다. 반드시 코를 납짝하게 만들어주마. 그리고 나는 여전히 우물우물거리고 있는 베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짐을 싸세요. 지금 당장 콘스탄틴노플로 가도록 하죠. 그리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세요. 이제부터는 언니들과 어머님을 상대로 한 전쟁이에요.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여자들만의 전쟁입니다. 그러니 각오를 단단히 하세요. 그리고 희망을 가지세요. 지금까지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자신은 잊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나로 태어날 시간이에요. 놀랍도록 달라지고 아름다워진 자신의 모습을 미리 그려보며 희망을 가지세요.”
“오오오오!!! 공녀님. 알겠습니다. 각오를 다지고 희망을 가지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짐을 싸서 공녀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는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어라? 나 지금 저 아이한테 인성과 미모와 지성을 갖출 수 있게, 소개해줄만한 존경받는 사교계의 멘토이자 스승이 되어줄 사람들을··· 따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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