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
크림 라인 수비대가 의사 결정을 내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바실은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서히 열리는 관문을 보면서 안도했다. 그리고, 안드로니쿠스와 무라트에게 명했다.
“보급대장은 관문의 물자를 인수하여 걸음이 느린 노약자들과 환자들에게 계속 배급하십시오. 근위대장은 관문 수비대를 장악하시고 각 요새들에 공문을 발송하십시오. 공문의 내용은 현 시간부로 크림의 모든 부대는 주둔지에서 전원 대기. 그 어떤 움직임도 반역으로 간주한다. 전원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만약 불응할 경우, 제국군 총사령관이 직접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크림 테마의 본부에도 공문을 보내주십시오. 내용은 간단합니다. 내가 간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소름이 돋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요하네스는 혼잣말처럼 감탄하며 말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것보다 더 줄여서 보낸 전문이군요.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요. 아마도 크림 테마에서는 난리가 날 듯 하겠군요. 오, 주여, 크림의 그 개자식들을 거두어 편한 곳으로 데려가시길.”
그 말 그대로였다. 그 개자식들은 왠지 주님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일제히 게거품을 물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3만 대군에 달하는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크림 테마군이, 관문 돌파 후 각지에 보내진 십여통의 공문에 일제히 와해해 버린 것이었다. 각 지역에 배치된 부대들은 지들 상관의 인성도 닮았다. 테마 본부의 동향 확인 문의조차도 대꾸하지 않고, 기지에 틀어박혀서 강아지가 종종 하는 배만져줘 자세로 드리누워 버린 것이다. 어우, 출세할 놈의 새끼들. 상황 파악은 겁나 빨라.
덕분에 크림의 귀족들은 테마 본부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고, 바실은 그런 그들을 향해서 근위대와 예니체리와 합류를 명받은 크림 테마군 파견부대와 수십만 유목민족들을 몰아 달려왔다. 마치 그 기세가 거대한 인간과 기마의 파도와 같아, 크림의 모든 백성들과 군사들은 집 밖으로 나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그래서, 크림의 귀족들은 제대로 동향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테마 본부 너머에 거대한 파도가 도달하고 나서야 그들은 망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나도···
“근위대. 지금부터 테마 본부를 접수한다. 저항하는 놈은 1회 경고 후 보고하지 않고 즉결 처분해도 좋다. 아니, 경고도 안해도 좋다. 제발 부탁이니 개겨서 한놈만 좀 걸려달라고 사정해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걸리는 것 없이 편하게 도륙할 수 있도록 제발 한놈만 좀 확실하게 도발시켜 봐라. 내 말뜻을 이해했다면, 전원 돌입!!!”
안드로니쿠스 근위대장의 명령으로 바랑기안 근위대는 순식간에 테마 본부로 난입했다. 그리고 타이투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크림의 귀족들은 그런 그들의 공세에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전부 다 포로로 잡혔다. 나는, 테마 본부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과 함성을 들으면서 나 역시도 죽은 목숨이라는 걸 감지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가장 절실한 욕구가 생겼다. 씨바!!! 나 살고 싶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해? 죄다 털어놓고 납짝 엎드려서 사실을 낱낱히 고할까? 아냐, 그랬다가는 되려 예전에 저지른 미수로 끝난 일까지 엮여서 빼도박도 못하고 참수야. 진짜 카밀라 공녀님도 아닌, 하녀 출신 대역에 템즈 공작원인 나를 살려둘 이유는 한가지도 없어. 그러면, 바실에게 동정을 호소해 볼까? 그래도 같은 지붕 아래 살던 정이 있으니··· 아냐, 그것도 안돼. 설령 바실은 날 용서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용납하지 못할꺼야. 바실에 인정을 끌어내는 스파이는 되려 더 위험하다 여기고 더 확실하게 손을 쓰겠지.
아아아악!!! 아무리 생각해보고 여러가지 선택지를 고민해봐도 죄다 목적지가 왜 처형장으로 연결되는 거냐!!! 난 죽기 싫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유로 죽고 싶지 않다고. 망할 시녀장님!!! 이런 말도 안되는 대형 사고를 쳐놓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치고. 나도 데리고 도망을 치라고 이 망할 악덕 상사야!!! 하지만, 그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나는 시시각각 내가 머물고 있던 곳으로 가깝게 들리는 병사들의 소리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생각해. 생각해야만 해. 살아날 방법을 생각해야 해.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모면할 방법을 떠올려야 해. 일해라, 내 두뇌야. 맨날 하는 공작마다 난장판이고, 이번에도 변함없어서 그 성능에 믿음은 안가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생각을 해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지금 내가 맞이할 것은 죽음 밖에 없단 말이야. 난 정말 죽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그때였다. 순간, 머리 속에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에··· 자, 잠깐만. 그러고 보니, 오히려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는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걸 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라? 잠시만··· 뭔가 이야기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 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거, 상상 속에서나 할 이야기지 정말로 내 목숨을 걸고 실행한다고?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한다면, 틀림없이 미쳤다고 말하면서 말리고도 남을 일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초조함과 절박함 속에서 떠오른 그 생각은 뭔가 한가닥 지옥에 내려온 동앗줄처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내 머리 속에는 뭔가 그 생각에 대해 하나하나 살이 붙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화되면 구체화될수록 나는 질겁할 수 밖에 없었다.
“정신차려. 아그네!!! 이건 진짜로 미친거야. 이거 누가 감당하려고 그래? 하지만···. 그래도 살 방법은 이것 밖에는··· 아니, 이래도 죽으려나? 그래!!! 죽을 것이 틀림없다고. 그렇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서는?”
나는 마치 이중인격이라도 된 것처럼 나 자신과 논쟁을 반복하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카밀라 공녀님. 여기 계셨군요. 잠시 저희들을 따라 와주셔야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내 방에 들어온 것은 안드로니쿠스 근위대장이었다. 그 특유의 붉은 머리가 정말로 불길처럼 보일 정도로 그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본 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닭았다. 그래서, 나는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 년 미쳤구나!!!’ 라는 방안을 실행하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죠. 그러지 않아도 마침 찾아가려고 했던 차였으니깐요. 안내하시죠.”
그리고 나는 그들과 동행하여 방을 나섰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나는 평소에는 황궁 경비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던 바랑기안 근위대원들이 얼마나 거한들이고, 그들이 가진 무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근접 거리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아오, 씨바. 할버드도 아닌 한손 도끼가 어떻게 내 키만하냐? 내 목 치는 거랑 스테이크 써는 거랑 체감할 만큼의 차이가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식은 땀을 흘렸고, 그 사이 우리는 바실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그곳은 크림 테마 본부의 거대한 홀이었다.
여러 번 왔던 곳이지만, 그곳의 풍경은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홀의 끝에 놓인 옥좌 같은 느낌마저 주는 의자에는 바실이 중무장을 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바랑기안 근위대와 예니체리 보급대의 장교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낯선 존재들도 있었다. 바실이 귀순시킨 것으로 짐작되는 유목민족의 장로들과 젊은 군사지도자들이 동석하여 서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크림의 귀족들이 벌써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창백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모두 이곳으로 연행되는 사이에 무장을 해제당했는지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그런 그들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백여명 남짓한 바랑기안 근위대원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명령이 내려지면 당장이라도 난입할 기세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근위대라는 명성에 맞게 가장 좋은 장비와 무기가 지급되어, 번쩍번쩍 광이 나는 그들의 거대한 무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지릴 것 같은 기세였다. 그리고, 이미 그들의 필두인 타이투스는 필사적으로 그 일에 대해 변명을 하는 중이었다.
“정말입니다. 저희는 정말로 폐하께서 제안하신 보급 지원에 대해, 공녀가 가져온 의견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겠다고 한 죄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다 공녀가 입안하였단 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기억해 주십시오. 저희는 애초에 태자 마마가 보급 지원을 하시겠다고 한 의견을 태자 마마의 안전을 이유로 거절했었음을. 이 상황에 대해 저희 역시 당황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에라이, 이 동정할 가치도 없는 의리없는 색꺄. 너만 살고 보자는 거냐? 나는 어쩌면 당연히 벌어지고도 남았을 크림 귀족들의 배신에 혀를 찼다. 그리고 그때 안드로니쿠스가 크림 귀족의 말을 무시하고 바실을 보면서 말했다.
“폐하. 공녀를 모셔왔습니다.”
그러자, 바실과 다른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바실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불신보다는 불안에 가까웠다. 그렇게 나를 보며 흔들리는 눈빛을 보이는 바실의 마음 속에서 나는 그가 여전히 나를 믿고 싶어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며 내 안의 떨림을 자제하고 말했다. 드레스를 양손으로 들고 최대한 우아하고 태연하게.
“태자 마마, 무사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네, 공녀님. 잘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조금 여운이 남은 귀가가 될 것 같습니다.”
평소와 같은 귀가 인사였지만, 식은 땀이 흘렀다. 그리고 바실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에 오면서, 저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서 깊은 의문점을 지적받았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죽이기 위해 저를 함정에 내몰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한 사람으로 다들 한 사람을 지목하였습니다. 지금 저기 있는 크림 테마의 타이투스 경마저도 말입니다. 공녀님······ 아니시죠? 지금 저에게 들리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거죠?”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제법 긴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끊어질 기색이 없었다. 그러자, 한참을 기다리던 바실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말이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녀님이 저를 해하려고 하시다니.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죠. 하하하. 그렇죠? 뭔가 공녀님에게 오해가 있었던 것이···”
“아니요.”
“......!!!”
그리고 그때 나는 바실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오해가 아닙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입니다. 바로 저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태자 마마를 그곳으로 내몰았습니다. 태자 마마를 죽음으로 인도한 사람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 카밀라입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