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벽력淸天霹靂
일일지계재어신一日之計在於晨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달렸고
일년지계재어춘一年之計在於春
일 년의 계획은 봄에 달렸고
일생지계재어근一生之計在於勤
평생의 계획은 꾸준함에 달렸다.
언 땅이 다 녹기 전인데도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땅을 갈아엎고 거름을 뿌리고 도랑을 정리하며 농사 준비를 시작했다. 아직 추운 날씨라 다들 몸을 한껏 움츠렸지만, 가을의 풍년을 기대하며 입가마다 웃음꽃이 한가득 피었다.
목마하도 여전히 잘 흐르고 있지만, 추위에 움츠린 건지 여름보다 수위가 낮고 유속도 느렸다. 아침 일찍 안문도에서 출발한 구후영은 느려진 유속 때문에 저녁이 거의 돼서야 일지봉 근처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구후영은 기분이 좋았다.
원래는 동생이 납치당한 나쁜 일인데 잘 풀려 괜찮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등에 명인의 검 열세 자루와 덤으로 받은 장인의 검 다섯 자루를 멨다. 주머니엔 사십 알 정도의 보석이 남아 있고, 은자도 삼백 냥 정도 있다.
옥의 티라고 내공을 못 얻은 건 사뭇 아쉬우나 공청석유 덕분에 배고픔을 잘 느끼지 않고 힘이 세지고 시력이 좋아졌다. 허리엔 절세의 보검이 있고 품엔 낙화검법의 비급이 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이 푸르듯이 낙화문에도 곧 백화가 만발하겠구나.'
산을 타는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운 건 공청석유로 힘이 세진 덕분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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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하다가 누군가 넘어지면 어김없이 터지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바로 이어지는 사부와 사숙들의 호통 소리. 그럼에도 웃음을 멈추지 못해 결국 회초리를 맞고 우는 소리.
우는 놈 보고 킥킥거리다가 들켜서 기어코 매를 버는 멍청한 놈. 멍청한 놈에게 몰래 혀를 내밀어 놀리다가 결국 들켜서 같은 신세 되는 놈. 그럼에도 교훈을 섭취하지 못하고 뭔가 해서 똑같이 매를 버는 다른 놈.
구후영이 기대했던 그런 광경은 없었다. 있는 거라곤 불에 타다 남은 흔적과 그에 어울리는 지독한 탄내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온갖 불길한 상념이 우후죽순처럼 떠올라 구후영을 괴롭혔다. 마른하늘이 벼락을 내려 구후영을 때렸어도 이만큼 괴롭진 않으리라.
'내가 여기서 아무리 고민해도 풀리는 일은 없다.'
어렵게 마음을 다잡은 구후영은 몸을 돌려 산 아래로 달렸다. 목마하와 가까운 곳이어서 마을이 많은데, 풍수지리적으로 산을 껴야 한다고 해서 산자락에 집중적으로 모였다.
산밑에 이른 구후영은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촌장의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촌장은 옹이구멍으로 구후영임을 확인하고 반갑게 문을 열어 맞이했다.
"아이고, 소명의.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건가."
"말하자면 깁니다. 그런데 우리 문파엔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우리도 몰라. 갑자기 불이 일었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임 협객이 안 알려주더라고."
사부가 무사하다는 말에 구후영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죽은 사람은 없는 거죠?"
"없어. 그런데 임 협객이 다쳤어."
그러나 사부가 다쳤다는 말에 바로 걱정이 치밀었다. 강호에 이름을 떨친 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절정의 경지에 발을 디딘 무인이다. 그런 사부가 다쳤다는 건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많이 다쳤습니까?"
"글쎄. 그것까진 모르겠어."
아는 게 없는 촌장이 괜히 미웠다.
"혹시 제 사부가 현재 어디 계신지는 압니까?"
"며칠 전 들은 소문으론 태원부 서쪽의 성황묘에 있다던데."
구후영은 작별 인사도 생략하고 바로 몸을 돌려 태원부 쪽으로 달렸다.
"에구. 저러다 또 길을 잃으면 어쩌려고."
빠르게 멀어지는 구후영의 등을 보며 촌장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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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이 성황묘를 찾은 건 이튿날 점심 무렵이었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달렸고, 길을 잃은 후에도 목마하를 찾으려고 쉬지 않고 움직인 탓에 아침이 밝을 무렵부터 꽤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등에 무거운 검을 멘 것도 있어 뛰지 않고 걸었더니 점심 무렵에야 겨우 성황묘를 찾아냈다.
"대사형!"
구후영을 알아본 어린 사제들이 반갑게 뛰어왔다.
옷은 낡았어도 얼굴만은 늘 깨끗했던 사제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같이 왕거지가 '형님!' 하고 부를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장문 사부는?"
"안에 계셔요."
구후영은 성황묘 안으로 달려갔다.
마찬가지로 초라한 몰골의 임초현이 힘없는 얼굴로 벽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사부!"
임초현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랐다.
"얼굴은 왜 이렇게 된 겁니까? 그리고 또 어딜 다쳤습니까?"
"잘 왔다. 안 그래도 요즘 안 아픈 데가 없어."
구후영은 검을 벗어 땅에 놓고 침통을 꺼냈다.
"이번엔 용의 여의주라도 주운 거냐?"
구후영이 내려놓은 십수 자루의 검을 보며 임초현이 농담을 던졌다.
"치료부터 할게요."
외상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염증을 잡는 것이고 하나는 통증을 잡는 것이다.
염증을 잡아야 상처가 악화하지 않고, 통증을 차단해 안 아픈 척 속여야 몸이 자가치유를 시작한다.
당장은 침밖에 없는 구후영은 침으로 통증부터 차단했다. 팔다리를 잘린 장방선생을 돌봤던 경험 덕분에 사부의 상처는 대처가 쉬웠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보다는 내 상처 치료가 급한 게 아니냐? 어서 약방 가서 약 좀 지어오거라."
"제자가 실수했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검이랑 귀한 물건은 들고 다녀오라. 세상에 도둑이 참 많아."
절정의 경지에 이른 사부가 고작 도둑을 걱정한다는 게 슬프면서도 웃긴 구후영이었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검을 다시 메고 밖으로 나간 구후영은 사제들을 불러 모았다.
"자룡은 어디 갔지? 혹시 나 찾는다고 일지봉에 갔어?"
아무리 살펴도 자룡을 못 찾은 구후영이 불안한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오사형은 대사형이랑 같이 나간 게 아니었어요?"
"이사백과 삼사백이 그랬어요. 대사형이 오사형 데리고 도망쳤다고."
사제들의 말에 구후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거짓말할 사람들 같지는 않았는데.'
일행이 나쁜 사람이라면 구후영에게 보석을 나눠주지 않았을 거고, 검도 뺏으려 했을 거다. 게다가 동행하는 내내 약속은 칼 같이 지키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니지. 그들은 나랑 함께 있었으니 자룡을 데리고 있던 건 다른 사람이야. 그 사람이 약속을 안 지킨 거라면? 아니면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지도 몰라.'
문파 건물이 불타고 사부가 다친 것에 놀랐던 마음이 자룡 때문에 한껏 심란해졌다.
'당면한 일에 집중하자.'
눈에 보이는 일부터 해결하는 게 순리라는 생각에 구후영은 머리를 세게 털어 불길한 상념을 억지로 떨쳤다.
"그런데 너희 사부랑 다른 사숙들은? 그리고 사제도 몇 명 안 보이는구나."
"다 나갔어요. 장문검 달라고 장문 사백이랑 싸우고 문파 나갔어요."
"우리도 싫대요. 멍청하고 밥만 축낸다고."
말하던 사제가 울음을 터뜨리자 남은 사제들도 엉엉 서럽게 울었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사부한테 버림받은 설움에 그간 춥고 배고팠던 기억까지 겹쳐 세상 슬펐다.
"괜찮아. 이제부턴 너희 모두 장문 사부의 제자야. 그 모자란 것들이 똑똑한 너흴 가르칠 자신이 없어서 도망친 거야."
전후 사정을 모르지만, 사부한테 장문검을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사멸조의 죄에 해당한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했거늘.'
군주와 사부는 부친과 같이 섬기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군주는 신하를 자식처럼 대해야 하고, 사부도 제자를 그리 대해야 한다.
'짐승보다 못난 놈들이다.'
사숙들이 다음 대 장문인으로 장인호를 지지하지만, 구후영도 잘 대해줬다. 그래서 정이 깊었는데, 몇 년 동안 쌓였던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짜?"
"야. 대사형이 틀린 말 하는 거 봤어? 당연히 진짜지."
"그러니까 울음 뚝 그치고. 너희 셋은 나랑 같이 약방 가자."
세 사제의 안내로 구후영은 태원부의 약방을 찾아 사부의 화상을 치료할 약과 사제들한테 먹일 약을 지었다. 추운 날씨에 문이 뚫린 성황묘에서 자느라 다들 몸에 한기가 잔뜩 배었다.
지은 약을 들고 돌아가는 길엔 고기만두를 비롯해 음식도 잔뜩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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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더 궁금하다. 그 검들은 뭐냐? 네가 몇 번 더 사라지면 우리 문파가 금세 부자 되겠다."
"말 돌리지 마시고, 어서 말씀해 주세요."
임초현은 구후영의 눈을 빤히 보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눈이 더 깊어졌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널 일찍 강호로 내보내는 건데."
똑똑하다고 모든 사람이 입 모아 칭찬하지만, 강호의 흉험함을 아는 임초현은 성현의 말씀을 입에 달고 사는 순진한 제자를 밖으로 몰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의 외출로 사람이 크게 바뀐 걸 보고 일찍 강호 경험을 시켜줄 걸 하고 후회가 치밀었다.
"솔직히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날, 자룡과 구후영이 동시에 사라졌다. 사제들은 구후영이 길을 잃어 사라지자 자룡이 찾으러 나간 거라고 했지만, 임초현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 년 동안 일지봉을 떠나지 못하는 벌을 내렸기에 구후영이 산을 내릴 일이 없다. 반드시 내려가야 할 일이 있다면 분명히 사부인 자신한테 허락을 받을 고지식한 제자다.
그래서 사제들이 극구 반대하는 데도 기어이 표행에 빠지고 구후영과 자룡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밤중에 갑자기 불이 일었다. 모든 건물이 함께 불탔고, 방화범도 있었다.
임초현은 검을 휘둘러 방화범을 벴으나 몹시 얕았다. 어린 제자들의 비명에 마음이 흔들린 탓이었다.
잠깐 갈등한 임초현은 세 명의 방화범이 도주하도록 놔두고 제자들을 구출하는 데 전념했다.
현재 입은 상처는 방화범한테 당한 게 아니라 불타며 쓰러지는 기둥을 팔로 막다가 생긴 거였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임초현은 구후영과 자룡의 실종까지 연관하여 예삿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에 임초현은 어린 제자들을 데리고 태원부로 와서 염치 불고하고 용호표국에 신세를 졌다.
그러던 중 표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놀랍게도 장인호가 용호표국 담 표국주의 손녀와 눈이 맞아 혼약을 맺었다.
남자들이 보기엔 구후영이 훨씬 잘생겼으나 여자들 눈은 달랐다. 게다가 또래 중에서 내공이 깊은 편이라 담 표국주도 흡족해했다.
이대로 잘 풀리나 싶었는데, 문파가 불탔다는 말을 들은 이사제와 삼사제가 딴마음을 품었다. 이들은 장인호가 용호표국의 데릴사위가 된 마당에 자신들끼리 표국을 만들기로 했다.
이들의 계획엔 당연히 도움이 안 되는 어린 제자들이 없었고, 오른팔을 다쳐 무공을 펼치기 힘든 임초현도 없었다.
이들은 임초현이 중요한 표행에 빠진 걸 장문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억지를 부리며 장문검을 내놓으라고 겁박했다.
임초현은 비록 몸을 다쳐 무공을 펼치긴 힘드나 내공은 그대로였다. 임초현은 장문검을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사제들에게 더 지랄하면 장문검을 부러뜨린다고 역으로 협박했다.
오랜 기간 임초현에게 눌려 살았던 사제들은 겁박을 이어가지 못했다. 대신, 용호표국에 얘기해 임초현과 어린 제자들을 그대로 쫓아냈다.
"이게 전부다. 이제 네 이야기를 해보아라."
- 작가의말
새해 복 아주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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