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심법高級心法
단전과 외부 기운을 느끼는 심기, 기운을 단전에 쌓는 축기, 단전의 기를 주변 혈도로 방사해 길들이는 연기, 길들인 기운을 움직여 사용하는 운기.
이 넷은 내공심법의 뼈대이자 기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구후영은 심법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익혔다. 밥상으로 치면 밥도 있고 국도 있고 반찬도 있는데, 딱 어느 집에나 있는 밥과 국과 반찬인 정도.
거대 문파들은 달랐다.
이들은 내공에 입문하기 전에 익히려는 심법에 적합한 맞춤 토납법吐納法으로 심기 능력을 키운다. 덕분에 재능과 집중력 모두 뛰어나야 내공에 입문하는 낙화문과 달리, 재능이나 집중력 중 하나만 뛰어나도 된다.
게다가 토납법으로 기초를 다지면 내공 수련에 정식으로 입문했을 때 쉽게 적응한다. 낙화문처럼 초반에 버벅대며 자신감이 떨어진 바람에 품은 재능보다 수련 결과가 별로인 경우가 드물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류의 경지에 이르면 축기와 연기를 동시에 진행하는 법을 가르치고, 절정에 이르면 더 대단한 방법도 알려준다.
다행히.
우연과 기연이 겹쳐 구후영도 그러한 법들을 깨우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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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따끔하며 새로운 독이 구후영의 몸에 들어왔다.
구후영은 당황하지 않고 몸에 침투한 독을 강한 의념으로 이끌었다. 뛰어난 운기 재능 덕분에 독의 기운은 구후영의 의지에 따라 혈도들을 경유해 단전으로 갔다.
단전에 갓 발을 들인 독 신입은 다시 십이경맥으로 흩어졌다. 먼저 들어온 선배 독들이 기운이 훨씬 세고 응집력도 강한 탓에 속절없이 밀려난 것이었다.
그렇게 선배들의 등쌀에 못 이겨 십이경맥으로 흩어진 독 신입은 서서히 약해졌고, 수십 바퀴 돌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야 숨 좀 돌리겠구나.'
목을 문 거미를 끝으로 더는 새로운 독충이 나타나지 않았다. 구후영은 잠깐 쉬며 정신을 가다듬은 후, 여전히 단전을 꽉 채운 독을 처리하는 일에 착수했다.
흡.
구후영의 들숨에 따라 많은 기운이 단전에 들어왔다. 그러나 기운의 세기나 응집력 모두 단전의 독과 비교조차 미안할 정도여서 바로 쫓겨났다.
구후영은 낙심하지 않고 연기로 기운을 다시 단전에 수납했다. 단련을 받은 기운은 단전에서 떠날 때보다 강해졌지만, 여전히 독들보다 약해 또 쫓겨났고, 좀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그렇게 수백 번 쫓겨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강해진 기운이 드디어 단전에 자리를 잡자 가장 약한 독이 밀려났다.
그에 맞춰 구후영은 운기에 집중하여 단전에서 쫓겨난 독을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제압했고, 제압이 끝나자마자 다시 축기와 연기에 몰두했다.
그러나.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구나.'
과정이 너무 느린 게 문제였고, 점점 느려지는 게 문제였다.
언제 화산 제자들이 돌아올지 모르고, 또 언제 독충에 물려 독의 양이 증가할지 모르니 현재 이 방식은 해결책이라기보단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분명히 놓친 게 있다.'
구후영은 객잔에 있을 때 분명히 수련에 성공했다. 그런데도 단전에 내공이 전혀 안 남았다. 수련 과정에 무아지경에 빠진 바람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운기로 모조리 소모했다고 여기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일단 상식에 안 맞는다.'
구후영은 웬만한 절정도 안 부러울 정도로 많은 내공을 단전에 쌓았다. 내공에 입문할 때 배운 지식에 따르면, 새로 쌓는 건 어려워도 기존 수준까지 회복하는 건 쉬운 일이다.
즉, 내공을 기존 수준까지 회복하는 것만 따지면 구후영의 축기 속도는 절대 운기 속도에 지지 않는다.
설사 구후영의 운기 재능이 천마와 장삼풍을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나다고 쳐도 축기 속도를 따를 수 없기에, 내공이 깡그리 사라지는 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독의 기운은 또 어딜 갔을까.'
객잔에서 한 수련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많은 독의 기운이 운기로 그저 사라진 것도 이상하다.
'내가 뭘 모르는 거지?'
사라진 기운에 관해 골똘히 고민하던 구후영은 갑자기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벌이던 때가 떠올랐다.
'현현자의 그 많은 내공은 또 어디로 갔지?'
그저 운기로 소모했다기엔 너무나 막대한 양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져보자.'
초식을 반복적으로 훈련하는 건 단지 투로에 익숙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반복하여 훈련하는 과정에 필요한 근육들이 단련되어 해당 초식을 펼치기 한결 용이해진다.
운기 역시 단순히 기운의 움직임에 익숙해지려는 게 아니라 혈도를 단련하여 기운의 이동을 한결 쉽게 하기 위함이다.
연기와 달리 운기에 내공이 많이 소모되는 이유다.
'근육이 강해지면 더 큰 힘을 낸다. 혈도가 단련되면 어떤 효과가 있지? 단지 내공이 더 쉽고 빠르게 통과하는 것뿐일까?'
구후영의 고민은 여기서 멈췄다. 연기를 통해 혈도가 어떻게 단련되는지 정확히 모르니 추리를 이어갈 수 없었다.
'맞다. 아까 추락할 때 갑자기 내공이 생겨났어.'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고민하던 구후영은 또 다른 의문점이 떠올랐다. 황상엽에게 밀려 추락할 때 구후영의 단전에 뜬금없이 내공이 생겨났다.
당시 생사가 오가는 긴박한 상황이어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의하지 못했지만, 그 내공이 축기로 얻은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공의 출처는 어딜까? 잠깐. 설마!'
새로 생긴 의문점이 아까 막힌 의문점과 격렬하게 충돌하여 눈부신 빛을 냈다.
'내공을 품는 혈도가 단전이 유일한 게 아니라면? 운기 과정에 사라진 내공이 그저 소모된 게 아니라 일부가 운기된 혈도에 남은 거라면?'
이 가설이 성립하면 현현자의 일도, 객잔에서 내공을 얻지 못한 일도, 추락할 때 뜬금없이 내공이 생긴 일도, 몸에 침투한 독의 칠 할 정도가 사라진 일도 한꺼번에 설명된다.
'연기 과정에 주변 혈도로 방사한 내공을 회수하듯이, 운기에 쓴 내공도 일부는 회수할 수 있을 거다.'
구후영은 위기의 순간에 소림이나 무당을 비롯한 거대 문파들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제자한테만 가르치는 수련 방법을 깨우쳤다.
'그러나 어떻게?'
문제는 깨달음만 있을 뿐 방법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단전 주변의 혈도는 단전과 가까워서 기운을 쉽게 뺏긴다. 먼 혈도들은 무슨 방법이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문이 갑자기 사라지고 두서없이 흩날리던 생각들이 일제히 멈춘 순간, 전신 수백 개 혈도에서 엄청난 기운이 일어나 구후영의 단전으로 빨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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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영청 밝은 보름달에도 풍애협은 어두컴컴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도 반이나 그림자에 잠기는 풍애협이니 밤에 어두운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풍애협에 갑자기 밝은 불이 두 개 생겼다. 푸른 빛을 뿜던 두 개의 불은 숨 몇 번 쉬는 사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후."
불이 사라진 자리에서 구후영이 긴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다행이다.'
구후영은 우선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살핀 다음, 주변을 둘러봤다. 뱀과 지네와 거미를 비롯해 열 종류가 넘은 독물의 사체가 구후영 주변에 널려 있었다.
종류가 아닌 마릿수로 따지면 백은 몰라도 팔십은 넘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축기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단전이 발달했다는 뜻이다. 연기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단전 주변의 혈도들이 발달했다는 뜻이다. 운기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단전과 거리가 먼 혈도들이 발달했다는 뜻이다.
축기와 연기는 평범하고 운기가 뛰어난 구후영은 당연히 단전과 단전 주변 혈도가 덜 발달했고, 대신 단전과 거리가 먼 혈도들이 대단히 발달했다.
'내가 성공했다는 건 단전이 아닌 혈도도 강한 내공을 품을 수 있단 말인데.'
예전의 구후영이 단전에 내공이 안 쌓인 이유다.
운기는 내공을 소모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후영처럼 잘 소모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운기할 때 열의 기운 중에 둘이나 셋을 소모한다면, 구후영은 다섯이나 여섯을 소모했다.
이는 혈도가 발달하여 더 많은 기운을 품었기 때문이다.
사실 구후영이 내공이 안 모인다고 늘 안타까워했던 것과 별개로, 전신 혈도에는 꽤 많은 기운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대신 단전은 조금 휑했고.
'뭔가 깨달은 거 같은데, 그게 뭐지?'
그간 단전이 휑한 게 재능이 부족해서라고 오해하며 구후영이 마음고생을 꽤 했지만.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구후영이 적혈장을 맞았을 때 잘 버텼던 건 단순히 공청석유만의 공로가 아니었고, 현현자와 벌인 내공 대결에서 악착같이 버텼던 것도 그저 요행이 아니었다.
전신 혈도에 쌓인 내공이 결정적이진 않아도 꽤 유의미한 역할을 했다.
아쉽게도 낙화문이 내공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구후영의 이러한 상태에 대한 해결책은 고사하고, 어떤 상태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수십 마리 독충에 물려 어마어마한 독을 몸에 쌓은 상황에 목숨을 부지한 것도 모자라 막대한 내공까지 얻은 지금에도 구후영은 비슷하게 추론만 할 뿐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아무렴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게다가 무엄하게도 '좋은 게 좋은 거'란 얼토당토않은 생각으로 내공 수련을 위해 매일같이 절치부심하는 강호 동도들의 염장을 질렀다.
'내공도 넉넉하니.'
구후영의 전신 혈도에서 몰려온 기운이 단전의 독을 차례로 쫓아냈고, 쫓긴 독들이 운기를 통해 조금씩 고분고분해졌다.
고분고분해진 독들은 결국 전신 혈도에 흩어져서 응집력을 잃었고, 응집력을 잃은 기운은 구후영이 각개격파하여 자신의 내공으로 전환했다.
그렇게 단전이 많은 기운을 품자 연기가 분주하게 진행되었고, 상대적으로 발달이 부족하던 단전과 단전 주변의 혈도들이 충분한 단련을 받았다.
여전히 모든 혈도의 균형이 잡힌 건 아니지만, 구후영은 얼떨결에 더 높은 경지로 향하는 길 하나를 닦아놨다.
남은 건 시간과 노력에 맡길 일이다.
'슬슬 가볼까?'
낙화문의 최종 오의를 확인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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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광은 피독단의 결함에 관해서만 구후영을 속였다. 속는 셈 치고 전중광이 알려준 대로 움직인 구후영은 꽤 은밀한 구석에서 동굴 입구를 발견했고, 사람이 드나든 확실한 흔적도 확인했다.
'솔직히 난 들어가고 싶지 않다.'
어서 들어오라고 연신 유혹하는 시커먼 입구를 앞두고 구후영이 마음을 다스렸다. 풍애협에서 겪은 위기는 사실 구후영이 자초한 거나 다름이 없기에, 동굴에 들어가기에 앞서 망설임이 컸다.
'그러나 꼭 들어가야 한다.'
이유가 명확히 떠오르진 않지만, 구후영은 여길 안 들어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이토록 들어가고 싶은지 모르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복수심이나 검법에 대한 욕심이 아닌 건 확실하다. 그러니 복수나 검법은 절대 우선순위에 놓여선 안 된다.'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구후영은 마음을 다잡고 천공교검을 손에 든 채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 하나 없이 골짜기보다 더 캄캄한 동굴이지만, 막대한 내공을 품은 구후영에겐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구후영은 눈으로 앞선 사람들의 흔적을 살피고 귀로 온갖 기척을 들으며 신중하나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 작가의말
그간 어떻게든 꼭꼭 감추려고 애썼는데, 이젠 한계에 달했네요.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고백하려 합니다.
여러분, 놀랄 준비 되셨습니까? 그럼 공개하겠습니다.
그간 전혀 눈치 못 채셨겠지만, 사실 주인공은, 천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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