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知彼知己
손자병법孫子兵法·모공편謀攻篇에 이르길.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나만 알고 상대를 모르면 이기고 지고를 반복한다. 나도 모르고 상대도 모를 땐 백 번 싸우면 백 번 위태롭다.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의 후손 중 손빈이라는 자가 있어 지피지기를 여러 상황에 잘 써먹었다.
손빈이 모시는 제나라의 장군 전기는 제위왕과 말 달리기 시합을 자주 했는데, 전기보다 좋은 말을 보유한 제위왕이 늘 이겼다.
손빈은 잠자코 말들이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전기에게 계책 하나 헌납했다. 바로 제일 느린 말로 제위왕의 가장 빠른 말과 겨루고, 제일 빠른 말로 제위왕의 두 번째 빠른 말과 겨루고, 두 번째 빠른 말로 제위왕의 가장 느린 말과 겨루는 것이다.
전기는 손빈의 말대로 하여 첫판을 지고 두 판을 연거푸 이겨 그간 잃었던 돈을 모조리 회수했다고 한다.
"하하. 너희 또 졌다."
"으앙!"
대결에 진 낙화문의 어린 제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인호표국의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손뼉을 쳤다.
멀찍이 숨어서 지켜보던 구후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구후 공자의 사제들은 머리가 나빠 보이네요."
단아의 말에 구후영의 탄식이 한결 깊어졌다. 오는 내내 자기 사제들이 부지런하고 착하고 똘똘하다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대련에서 지고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소녀에게 괜찮은 수가 있긴 한데."
"가르침을 청합니다. 단 소저."
구후영의 간절한 말투에 단아가 배꼽을 잡고 깔깔거렸다.
"간단해요. 맨손 말고 목검으로 싸우면 됩니다."
낙화문을 나간 자들은 인호표국을 만들고 호비가 표국주를 맡았다. 장인호는 담 표국주한테서 용행호보권龍行虎步拳을 배워 어느새 일류의 경지에 이르렀고, 남은 아이들도 응비권鷹飛拳이란 실전 권법을 배워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 기뻐하지 못했다.
주먹도 제대로 못 쥐던 임초현이 안물의 치료로 악력을 거의 회복했고 낙화문엔 경지가 일류를 거뜬히 넘은 두전이라는 호법도 생겼다. 거기에 어디서 돈이 났는지 일지봉을 사서 장원과 연무장을 짓고 있고, 산 아래 전답도 잔뜩 사들였다.
사부들의 버림을 받은 열 명의 제자는 명인이 만든 명검으로 수련하고, 영약을 먹어 내공도 잔뜩 얻었다.
유일한 위안이 용호표국이라는 거대한 버팀목이 생긴 건데, 사실인지 몰라도 구후영과 왕가장의 장주 왕제상이 결의형제라는 소문이 있다. 왕제상이란 인간이 소문은 별로긴 해도 왕가장이 태원부에서 갖는 힘은 절대 용호표국의 아래가 아니다.
사실 이들도 낙화문에 있을 때보다 사정이 나아져서 즐겁지만, 낙화문의 사정이 훨씬 나아진 바람에 상대적 박탈감이 심했다.
그런데 호비를 비롯한 사부들이 낙화문과 절대 마찰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자 인호표국의 제자들은 반발심이 생겼다.
그러던 중 구후영이 양양으로 떠나고 낙화문 제자들의 외출이 잦아졌다. 인호표국 제자들은 낙화문 제자들과 말다툼을 일으키고, 강호인답게 대결로 시비를 가르자고 했다.
순진한 낙화문 제자들은 검은 위험하니 맨손으로 겨루자는 인호표국 제자들의 말에 생각 없이 동의했고, 여태까지 단 한 번의 대결도 승리하지 못했다.
낙화문 제자들은 검술만 익혔기에 가까이 붙어서 빠르게 공방을 전환하는 맨손 싸움보단 거리를 벌리고 싸우는 게 훨씬 유리하다.
반면, 인호표국의 제자들은 응비권을 배운 덕분에 가까이 붙어서 싸우는 게 이득이다.
이렇듯, 인호표국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거로 낙화문 제자들이 제일 못하는 것을 이겨서 짧은 기간에 수많은 승리를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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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을 들었다."
구후영이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굳히고 정색해서 말했다.
"문파를 버리고 떠난 배신자들한테 졌다며?"
어린 제자들은 자신들의 패배가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 숨도 크게 못 쉬었다.
"다음 대결엔 검으로 싸운다."
구후영의 말에 사제들이 깜짝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사형. 그러다 실수로 죽이면 어떡합니까?"
"좋은 자신감이다."
구후영의 칭찬에 입을 열었던 사제가 헤벌쭉 웃었다.
"검을 들면 이길 걸 알면서도 그간 계속 맨손으로 싸웠던 거야?"
그러나 이어지는 훈계에 다시 풀이 죽었다.
"검을 안 들고도 이기고 싶었어요."
어린 제자들이라고 멍청해서 맨날 속았던 게 아니다. 계속 지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단지 검 없이도 배신자들을 이기고 싶은 마음에 불리함을 알면서도 대결에 임했다.
"강호에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다간 그날 죽는다."
구후영은 취화봉에서 여자 알몸을 안 본다고 눈을 감았던 기억이 떠오르자 귀가 빨개졌다.
'하늘이 보살핀 거다. 아니면 나 같은 건 벌써 몇 번은 죽었다.'
"대사형의 가르침을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다음 대결엔 목검으로 싸운다. 그러니 당분간은 목검으로 수련해라."
구후영은 직접 깎은 목검을 사제들에게 나눠줬다. 연패로 기가 잔뜩 죽었던 제자들은 대사형의 복귀 덕분에 사기가 충천沖天(하늘을 찌르다)해 구령을 크게 외치며 수련에 전념했다.
"유저야. 잠깐 보자."
구후영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임초현이 말했다.
구후영은 사제들이 알아서 수련하게 놔두고 임초현을 따라 방으로 갔다.
"사부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제자가 기꺼이 분담하겠습니다."
"좌수검을 익힐까 한다."
안물의 치료와 특별한 운기법 덕분에 임초현의 오른손은 거의 회복했다. 그러나 내공의 흐름이 끊기는 일이 가끔 생겨 생사를 건 대결은 꿈도 못 꾼다.
"마음은 정하신 겁니까?"
좌수검을 익히면 방문좌도라고 배척을 받게 된다. 사마외도라고 칼 들고 죽이러 오는 건 아니지만, 은근히 말고 대놓고 따돌림을 한다.
그렇기에 왼손을 쓰는 무인 대부분이 장법이나 권법을 익히고 일부는 양손에 무기를 든다.
"아직 정하지 못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구후영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너도 뾰족한 수는 없구나. 두 호법과 상의해 얻은 결론이 있긴 한데, 네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사부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부담을 갖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제자가 감당하겠습니다."
"장문 자리를 네게 넘겨주면 내가 좌수검을 익힌다고 크게 흠이 되지 않을 것 같구나."
일파의 장문이 자리를 넘겨주면 은퇴한 거로 친다. 은퇴한 자가 좌수검을 익히든 발로 검을 잡든 더는 강호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게다가 장문이 좌수검을 쓰면 문파 전체가 매도당하지만, 장문이 아니게 되면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수 있다.
"사부님, 제자도 사실 할 얘기가 있습니다. 이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 당분간 사부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구후영은 홍엽산장에서 겪은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허! 어디 흔한 씨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홍엽산장의 후손이었다니."
철혈방은 꽤 유명한 방파다. 방도가 수천 명이 되고 열 개가 넘은 지역에 영향을 끼치는 문파가 그리 많은 게 아니다. 소림이나 무당도 명성은 대단하나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범위는 철혈방만큼 넓지 않다.
사천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아미나 섬서 대부분 지역에 영향력이 있는 종남 정도만 철혈방과 비견된다.
그렇기에 임초현도 철혈방은 알고, 철혈방을 알면 홍엽산장을 모를 수 없다. 엄격히 따져서 홍엽산장은 강호의 문파도 가문도 아니지만, 철혈방과 늘 함께 언급되기에 강호에 꽤 유명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네가 홍엽산장으로 가고 싶다면 낙화문에서 내보내 주마. 아니면 우리 모두가 널 따라서 홍엽산장에 가도 된다. 어차피 지금 우리가 먹고사는 것도 다 네 덕분인데, 굳이 따로 염치 차릴 일도 없으니 좋잖으냐."
구후영은 금검당과 은도당의 은원 그리고 홍엽산장이 휘말린 음모를 사부에게 설명했다.
"제자는 일단 자룡을 찾는 일에 집중하고, 자룡을 찾은 후에도 당분간은 여기서 지낼 생각입니다."
"그럼 장문인 자리는 어찌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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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검이어도 자칫 다칠 수 있으니 맨손으로 겨루자."
인호표국의 제자가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다치는 게 겁나면 강호에서 칼밥 먹지 말고 돌아가서 엄마 젖이나 먹어."
낙화문의 제자는 대부분 고아다. 몇몇은 가난한 부모가 푼돈을 받고 낙화문에 넘겨버렸다. 그렇기에 엄마 젖이나 먹으라는 말은 아주 큰 모욕이다.
"그래. 목검은 너희가 들어라. 우린 맨손으로 할 테니."
원래 낙화문의 제자였던 인호표국 제자가 발끈한 얼굴로 말했다.
'됐다.'
원하던 대답을 끌어낸 덕분에 신이 난 낙화문 제자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목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자양단과 부지런한 수련으로 얻은 내공 덕분에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한껏 매서웠다.
이는 검을 휘두른 제자의 경지가 높아서가 아니라, 외공과 같은 원리다. 의념으로 내공을 움직일 수준이 안된다고 내공이 무용지물인 건 아니다. 정확한 휘두름에 내공이 얼떨결에 실리는 일은 경지와 상관없이 가끔 발생하는 일이다.
'겁먹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구후영은 인호표국 제자들 얼굴에 나타난 동요를 어렵지 않게 알아봤다.
"우, 우리도 목검 들겠다."
정작 맨손으로 목검을 든 상대와 싸우려니 두려움이 생긴 인호표국 제자가 말을 바꿨다.
"마음대로 해."
인호표국 제자는 바닥에 널린 목검을 하나씩 들어 확인하며 손에 맞는 검을 신중하게 골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낙화문 제자가 재촉이라도 하듯이 목검을 휘둘렀다.
훙 소리가 꽤 먼 거리에서 지켜보는 구후영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공심위상攻心爲上. 이겼다.'
상대는 대결하기도 전에 마음이 꺾였다. 굳이 결과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낙화문의 승리다.
"손자병법의 모공편에서 이르길."
어느새 나타난 단아가 말했다.
"백전백승은 최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다. 최고의 병법가는 모략으로 이기고, 다음은 외교로 이기고, 그다음은 적을 무찔러 이기며, 제일 하수가 성을 공략해 이긴다."
낙화문의 승리는 모략의 승리다.
지난 며칠 구후영은 사제들에게 몇 개의 베기 동작만 수련케 했다. 덕분에 운 좋게 목검을 휘두를 때 내공이 실려 심리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 머릿속에 있다 나온 사람 같네요."
구후영은 마치 곁에서 지켜본 사람처럼 자기 속셈을 정확히 짚은 단아에게 크게 감탄했다.
"이겼어요!"
대화하던 단아가 대결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둘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결이 끝났다. 목검에 팔을 맞은 인호표국 제자가 통증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인호표국 제자가 이를 악물고 억지로 버티긴 했으나, 통증 때문에 얼굴이 눈물범벅이어서 차라리 소리 내 우는 게 나은 상황이었다.
"이제 어른들 싸움이 되겠군요."
강호 문파는 아이들 싸움이라고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구후영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인호표국으로 간 자들은 버리기로 했으나, 낙화문이 확실히 제압한 후 버리는 형태가 돼야 한다.
안 그러면 다른 문파들이 낙화문을 우습게 본다.
- 작가의말
손빈은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의 5대손입니다. 빈은 발을 잘렸다는 뜻인데, 원래 있던 위나라에서 모함을 당해 발을 잘리는 형벌을 받고 제나라에 가서 전기의 모사가 되었고, 후일 모함한 놈에게 복수했습니다. 손빈도 병법서를 하나 썼는데, 손자병법에 묻혀 아주 유명해지진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전기새마 말고도, 널리 알려진 위위구조도 손빈의 솜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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