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급해독秘笈解讀
태극이 무엇인지에 관해 원기파元氣派·허무파虛無派·사십구파四十九派·음양파陰陽派·천도파天道派 모두 견해가 다르다. 여기에 비주류까지 합치면 몰라도 수십 가지 이상의 다양한 해석이 있다.
게다가 각 파를 신봉하는 자들도 해석이 대동소이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실질적으로 태극이 무엇이라고 콕 집어 말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이건 태극이오."
수십 쌍에 달하는 무당 장로들의 불타는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구후영이 단정 지어 말했다.
"천자문을 시작하는 열여섯 글자가 태극이라고?"
옥청전의 분위기는 역모의 죄를 범한 죄인을 처형하는 형장보다 더 무겁고 엄숙했다.
"천지는 하늘과 땅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말하오. 세상은 태극이오."
망나니가 귀두도를 건들거리며 목을 위협하는 듯한 분위기에도 구후영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일단 그렇다 치고, 계속하시오."
"우주는 공간과 시간이오. 이 역시 태극이오."
"우는 상하와 사방을 말하니 태극이 아닌 육합이고, 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리키니 삼재가 더 어울리지 않는가?"
"태극은 숫자로 일이오. 그러나 하나둘의 일이 아니라 시작을 뜻하오. 양의兩議 역시 대립과 구분을 뜻하지 꼭 둘을 말하는 게 아니오. 오행도 여러 성질 중 대표적인 다섯을 돌출한 거지 단순한 다섯이 아니오. 그러니 숫자에 따라 육합이니 삼재니 구분하는 건 의미 없소."
"그런 주장도 있긴 한데, 그게 반드시 옳다고 장담할 수 있나?"
칼같이 단호한 반박에 구후영은 설득 방향을 바꿨다.
"공간은 변하지 않소. 이는 항恒이니 태극이오. 시간은 늘 똑같이 흐르오. 이는 상常이니 역시 태극이오. 우와 주를 합치면 세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니, 이 역시 태극 아니겠소?"
구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 갸웃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월영측과 진수열장은 순환과 변화를 뜻하오. 이 역시 태극이오."
"그럼 그냥 태극이라고 하면 될 걸, 왜 굳이 수수께끼 내듯이 천자문을 썼다고 생각하오?"
"모든 게 태극이니, 자신이 아는 태극에만 맞춰 비급을 이해하지 말길 바라는 현현 진인의 고심이라고 생각하오."
구후영이 발언을 끝내자 장로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수군거렸고, 일부는 구후영을 찾아와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럴듯한 소견이 꽤 있었으나, 구후영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이만 멈추지."
현영자는 장로들이 충분히 상의하길 기다려 입을 열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열여섯 글자는 비급의 일부가 아니다. 그저 비급을 해독하는 방향 정도를 알려주는 지침이다. 이 비급이 하나의 무공을 담은 게 아니라 삼풍 조사께서 남긴 모든 무공에 관한 깨달음임을 생각하면, 태극을 늘 염두에 두는 게 맞는 듯하다."
현영자 덕분에 상황이 정리되고.
"일단 인자가 가리킨 게 다양한 태극이란 주장에 입각하여 비급을 해석해 보자. 해보고 아니면 인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진정 뭔지 다시 고민하면 될 일이다."
인자에 관한 토론이 일단락되었다.
"음성양쇠陰盛陽衰 양성음쇠陽盛陰衰 위태극爲太極. 이 말에 대한 장주의 생각이 궁금하오."
기명제자는 거의 외인이나 다름없기에, 무당 장로들은 구후영을 장주로 호칭했다.
"어떤 부분에 의문이 있는 거요?"
구후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음이 성하면 양도 성하고, 양이 쇠하면 음도 쇠해야 태극이 유지되는 거 아니오?"
"그 부분에 관해서 난 생각이 다르오. 음의 기운이 성해질 때 양의 기운도 함께 성해지면 싸우자는 것밖에 안 되오. 음성양성陰盛陽盛과 음쇠양쇠陰衰陽衰는 구손具損이오."
그에 장로 한 명이 감탄했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문구가 음양동성陰陽同盛 일손구손一損具損이오."
음과 양이 함께 강해지면 그저 같이 감소한다는 뜻이다.
"장주의 고견이 궁금하오."
구후영이 뒤 구절을 비슷하게 유추하자 장로들이 안달 났다.
"중원의 대부분 무공과 달리, 태극권은 대결 상대도 무공에 포함하오. 나 혼자 태극을 이루는 게 아니라 상대까지 합쳐 태극이 되어야 하오. 현현 진인께서 내공 대결을 하고 태극에 관해 크게 깨우친 것도, 삼풍 조사의 태극권이 애초에 혼자 완성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기 때문이오."
말을 마친 구후영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혼자서 태극을 완성하기 직전까지 온 정학을 떠올린 탓이다.
"그게 방금 두 문구와 무슨 상관이오?"
"음성양쇠와 양성음쇠는 상대와 태극을 이루는 방법에 관해 말한 거요. 상대가 성하면 나는 쇠해서 수비에 집중하고, 상대가 쇠하면 난 성해서 공격에 치중하는 게 태극이오. 상대가 성하다고 나도 성해서 맞붙고, 상대가 쇠하였다고 나도 기운을 아끼는 건 태극이 아니오. 함께 손해를 볼 뿐이오."
"내 생각은 다르오."
포악한 늑대들이 무리에서 외로이 떨어진 양을 향해 이빨과 발톱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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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진 동안 고작 천자문을 시작하는 열여섯 글자와 구결 두 마디를 토론했다고?"
구후영과 옥무영이 밤에 몰래 만나 십삼 년 된 진가장의 여아홍을 홀짝였다.
"내가 말한 건 아주 글자를 이루는 점까지 의심할 기세였습니다."
구후영의 푸념에 옥무영이 껄껄 즐겁게 웃었다.
"텃세라고 생각해라. 그건 그렇고, 천자문을 차용한 인자는 태극을 인식할 때 한계를 두지 말고, 편견도 갖지 말라는 뜻이란 거지?"
"진정한 태극은 무궁하니, 그 일부를 보고 태극을 알았다는 듯이 기고만장하지 말란 거죠. 아무래도 현현 진인이 그간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감흥이 일어 쓴 게 아닌지 싶습니다."
옥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
"오늘 토론한 구결 있잖아. 싸울 때 상대가 강하면 기세를 줄여 수비하고, 상대가 약해지면 기세를 키워 공격하라. 너무나 당연한 얘기 아니야? 굳이 태극혜검의 첫 마디에 쓸 필요가 있을까?"
"그 당연한 걸 아무도 하지 않으니깐요."
구후영의 말에 옥무영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위력이 강한 게 최고라고 생각해 태극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양의검법만 익히는 게 지금 무당이니까."
옥무영의 말에 구후영은 느끼는 바가 컸다.
"사형한테 보여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구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십 개 장작이 대충 쌓인 곳으로 갔다.
"이게 일손구손입니다."
말을 마친 구후영이 손을 살짝 얹었다 떼자 결이 생생한 장작들이 썩은 고목이 벼락에 무너지듯 가루가 되어 폴싹 주저앉았다.
"뭐냐?"
옥무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 말라는 걸 하면 이렇게 위력이 강합니다. 대신, 제가 품은 내공의 태반이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한 거야?"
옥무영이 소매로 입가의 침을 닦으며 질문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 건진 저도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태극이 아닌 걸 하면 위력이 훨씬 강하단 거지?"
"단순히 파괴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긴 한데, 상대도 다치고 나도 다치는 건 양패구상이지 승리가 아니잖아요. 병법에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걸 최고로 치잖아요."
"그게 아니라, 태극으로 이기는 게 더 높은 경지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구나."
"강한 힘으로 상대를 이기는 건 무공이 아니죠. 그건 그냥 힘 싸움이잖아요."
"힘 싸움으로 이기면 안 되는 거였어?"
옥무영의 말에 구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왜?"
구후영이 하도 기운차게 일어난 바람에 더없이 놀란 옥무영은 몸을 한껏 꾸기고 목도 움츠렸다.
"천마가 태극권을 이기려고 만든 육양권법이 있는데, 직선과 빠른 공격을 고집하는 아주 무식한 무공입니다."
"그게 왜?"
"천마가 단순한 힘 싸움이 태극권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잖아요."
"어쩌면 약점이 있는 것도 태극이 아닐까?"
옥무영의 말에 구후영의 눈이 흐릿해졌다.
'부러운 녀석.'
옥무영도 자질이 뛰어나나, 이해는 느린 편이다. 그래선지 구후영의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재치가 너무 탐났다.
"형언하기 힘들지만, 사형 덕분에 태극에 한 걸음 다가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멀어져서 더 많이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
"높은 곳에선 넓게 보고, 낮은 곳에선 자세히 보죠. 사형이 날 높은 곳에 데려갔는지 낮은 곳에 데려갔는진 모르지만, 어쨌든 덕분에 개안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둘은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남은 여아홍을 모조리 마셔 없앴다.
"이 사형도 그냥 놀고 있진 않았다. 무려 오십 냥의 거금을 써서 태극혜검의 구결 하나 알아냈지."
"사형도 그렇고 무당도 그렇고. 제 안계를 끝없이 넓혀주네요."
"무당만 그런 줄 알아? 세상이 다 똑같아."
말을 마친 옥무영이 품에서 둘둘 만 종이 하나를 꺼냈다.
"혼자 보면 헛생각만 들 거 같아서 아직 확인 안 했다. 지금 같이 보자."
옥무영이 만 종이를 쭉 펴자 글자 열네 개가 보였다.
단분쌍單分雙 변화막측變化莫測. 쌍합일雙合一 위력막대威力莫大.
하나가 둘로 나뉘면 변화를 예측하기 어렵고, 둘이 하나로 합치면 위력이 막대하단 뜻이다.
"오!"
구결을 본 옥무영이 손뼉을 짝 쳤다.
"양의검법은 숫자로는 둘이나 검 하나로 펼쳐야 변화를 살릴 수 있고, 태극권은 음양의 둘이 하나로 조화해야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이구나. 난 판관필 두 자루를 쓰니 태극권을 익혀야겠다."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구후영이 말했다.
"양의검법은 익힌 적 없어서 잘 모르지만, 쌍합일 위력막대의 쌍은 양손을 말한 게 아닙니다."
"그럼?"
"나와 상대를 말한 겁니다. 아까 구결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긴 한데, 난 생각이 조금 다르다."
"경청하겠습니다."
"네가 아까 말했잖아. 태극을 인식하는 데 편견을 갖지 말라고."
"네."
"태극에 꼭 상대를 포함해야 해?"
"네?"
"혼자서 태극을 이루면 안 될까? 진정한 태극은 혼자서도 이루고, 누구하고도 이루는 게 아닐까?"
옥무영의 말에 구후영은 정학이 다시 떠올랐다.
'삼풍 진인은 처음엔 글을 익힌 선비였다가, 현령이 되어 십수 년을 관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화룡 진인을 만나 무공에 입문했고, 이립이 넘은 나이에 관직을 내려놓고 천하를 주유했지.'
이미 많은 걸 품었기에 장삼풍이 완성해야 할 태극은 아주 컸다.
'정학 진인은 불혹의 나이에도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 악인을 계도하는 일에 있어선 꽤 단호하나, 기본적으로 세상과 연을 끊고 산다. 그러니 혼자서 태극을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친 구후영은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사형. 삼풍 진인은 우화하기 전에 태극을 완성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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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온몸의 솜털을 올올이 세운 채 도정신하여 어려서부터 장삼풍의 가르침을 받고 무당 무공에 정통한 수십 명의 천재와 구결을 토론하고, 밤엔 옥무영과 술잔을 기울이며 편한 마음으로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이러한 나날이 반복되며 구후영이 무공과 태극에 관한 견해는 갈수록 깊어졌다.
그러나 무려 유월이 다가옴에도 무당은 구후영에게 마음을 열지 않아, 여전히 태극혜검을 구결로 쪼개고 순서를 섞어 보여줬다.
그리고.
어느새 잊혀버린 용호표국이 은밀히 움직였다.
- 작가의말
블랙홀에 관한 평소 생각을 무심결에 SNS에 올렸다가 카이스트로 끌려가 수십 명 교수에게 괴롭힘 받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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